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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음악 축제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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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맥주, 축구, 그리고……

뮌헨은 독일 최대의 주인 바이에른의 주도로서, 그 정치·경제·문화적 위상은 이제 막강하다.

뮌헨. 이 단어를 떠올릴 때면 나를 포함한 중년 이후의 독자들은 전혜린의 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독일이라는 곳이 아련하게 먼 나라였고 뮌헨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던 그때, 전혜린의 감각적인 글로 접한 뮌헨은 지금도 독자들의 머릿속에 마치 고향처럼 각인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혜린이 독일에 도착해서 첫발을 디딘 뮌헨은 스산한 날씨와 어설픈 거리로 묘사되었다. 아름답거나 낭만적이라기보다는 세계를 황폐화시킨 나치의 발원지, 미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암울한 과거를 가진 도시, 전후(戰後)에 나타난 사회 재건의 움직임 속에서 콘크리트로 무미건조하게 서 있던 도시, 더 나은 독일의 앞날을 위해 면학과 노동으로 일관하는 진지하면서도 황량한 회색 빛 도시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이미 두 세대나 지난 지금, 뮌헨의 풍경은 그때와는 너무나 많이 다르다. 전혜린이 다시 살아온다면 깜짝 놀랄 게 분명하다. 뮌헨은 독일 최대의 주인 바이에른의 주도로서, 그 정치·경제·문화적 위상은 이제 막강하다. 바이에른 주는 독일에서 가장 부유하고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그 중에서도 뮌헨은 문화적으로 가장 앞선 도시다. 독일은 유럽 연합에서 가장 막강한 경제, 문화 국가가 아닌가. 그러니 뮌헨은 독일뿐 아니라 중부 유럽의 중심 도시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게다가 뮌헨은 독일의 남부 끝에 자리 잡은 지리적 특성 때문에, 같은 독일 땅인 베를린보다는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와 더 가깝다. 즉, 북유럽에서 남유럽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또한 베로나, 인스브루크, 잘츠부르크, 취리히 등 주변 외국 도시에서 접근하기가 매우 쉽다.

뮌헨의 마리엔 광장은 여행객들로 항상 붐빈다.

서울에서 뮌헨으로 가려면 프랑크푸르트를 거치는 수밖에 없다. 베를린과 뮌헨이 거대한 공항 증축 공사를 하면서 독일 제2의 허브 공항을 꿈꾸고 있지만, 아직은 독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프랑크푸르트를 통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으로 가는 항공편으로 갈아타도 되고, 열차나 도로를 이용해도 상관없다. 물론 인근의 다른 나라 도시들, 베로나나 취리히, 잘츠부르크에서 진입해도 문제없다.

일단 뮌헨 시내에 도착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혜린이 묘사한 스산한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 놀랄지도 모른다. 육중하고 세련된 건물과 화려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품위를 지닌 거리가 방문객을 맞는데, 대부분 전후에 복원된 것들이다. 대도시라고 하지만 인구가 130만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교통 체증도 매연도 별로 느낄 수 없다.

젊은 세대들에게 뮌헨,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 자동차, 맥주, 축구, 이 세 가지일 것이다. ‘바이에른 자동차 공업’의 머리글자를 딴 BMW 자동차와, 100가지가 넘는다는 뮌헨 맥주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과 ‘뮌헨 1860’의 두 팀으로 대표되는 분데스리가는 뮌헨의 자부심이다. 이 세 가지는 물론 거리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독일의 어느 지역보다 BMW가 많고, 온 시내를 뒤덮다시피 한 다양한 상표의 맥줏집들을 볼 수 있으며, 거리 곳곳에 칸이나 발락같은 축구 스타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내가 뮌헨에서 만난 한 버스 기사는 뮌헨의 중류층 남성들의 생활에 대해, 맥주를 마시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뮌헨 남자들이 관심을 갖는 대상은 오직 세 가지예요. 축구, 자동차, 아이들.”

중부 유럽의 문화 수도

뮌헨은 또한 음악과 미술 애호가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곳, 특히 세계 정상의 음악 공연이 열리는 곳이다. 뮌헨 뒷골목에 있는 클래식 음반 가게인 ‘마술 피리’의 젊은 주인은 ‘음악 도시’ 뮌헨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계 정상급 지휘자가 이끄는 일류 오케스트라가 셋이나 공존하는 도시가 뮌헨 말고 세계 어디에 있겠어요.”

뮌헨은 유럽에서 가장 지적인 분위기의 도시 중 하나다.

옳은 말이다. 그와 그런 말을 나누었던 당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Bayerische Staatsoper, 흔히 ‘뮌헨 국립 오페라 극장’이라고도 부른다)은 주빈 메타가 감독으로 있었다. 지금은 켄트 나가노에게 넘어갔지만. 로린 마젤이 이끌어 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마리스 얀손스가 그 뒤를 이었다.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르주 첼리비다케에 이어 제임스 레바인, 그리고 현재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상임 지휘자를 맡고 있다. 지금 나는 인구가 백만 명 남짓한 도시의 음악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때로는 하루 저녁에 이 세 오케스트라가 각기 다른 곳에서 동시에 콘서트를 여는 곳이 바로 뮌헨이다. 마술 피리의 주인은 지금까지도 지난 시즌에 있었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 연주한 말러 시리즈의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뉴욕 필하모닉의 차기 감독으로 내정된 마젤은 뮌헨 시민들에게 고별인사처럼 말러 시리즈 공연을 선물했는데, 몇 달에 걸쳐 한 곡씩 말러 곡을 연주한 것이 아니라 단 두 주 만에 말러 교향곡을 모두 연주했던 것이다. 공연 마지막 날에는 모든 관객이 기립하여 20분 동안 노대가 마젤에게 경의를 표했다며 연신 자랑하던 그의 눈동자는 감회에 젖어 있었다. 카라얀이 이끌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독주에 대항해, 베를린에 굴복하거나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적 자긍심을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유럽 도시는 바로 뮌헨이었다.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페스티벌을 기념하여 기둥을 색색의 무늬로 장식해 놓았다.

오페라 페스티벌, 오페라의 지존

뮌헨에서는 매년 7월이 되면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이 그 성대한 깃발을 올린다. 잘츠부르크나 베로나보다 더 오래된 1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페스티벌은 음악 수준과 전위적 무대 연출에서 세계 최정상이다. 많은 분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를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내게 종종 묻는다. 내 대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뮌헨이다.

메트로폴리탄 극장은 오페라의 본고장이 아니며, 관객들의 수준이 유럽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고, 그들의 상업성은 천박함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은 과거의 영화에 미치지 못하며, 무대에서는 이탈리아 경제 불황마저 느껴진다. 빈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연출이 너무 많고, 베를린은 오페라에 한해서는 실망스러운 무대가 많으며, 파리 역시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 잘츠부르크나 바이로이트는 최고 수준이지만, 이곳들은 어디까지나 시즌을 운영하는 오페라 극장이 아니라 페스티벌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최고의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곳은 단연 뮌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필적할 만한 곳은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정도가 아닐까?

뮌헨이 최고라는 사실은 가수진에서나 무대 디자인에서나, 연출의 전위성에서나 오케스트라의 수준에서나, 또 관객의 품격에서나 극장의 역사성에서나 모두 그러하다. 이런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의 핵심이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인 것이다.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내부. 메조 소프라노 발트라우트 마이어가 관객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이 페스티벌은 여타 오페라 축제들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대부분의 페스티벌이 유명한 휴양지나 의미 있는 유적지 등에서 열리며, 또한 축제극장 등 특별한 무대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은 평소 시즌제 공연을 하는 도심 한복판의 상설 무대인 뮌헨의 오페라 하우스, 즉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다. 대부분의 음악 팬들이 페스티벌 지역을 향해 휴가를 떠나기 전인 6월 말에서 7월 사이에 미리 개최하는 것도 특징이다.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의 프로그램 역시 독특한데, 페스티벌을 위해 특별히 새롭게 준비되는 프로덕션은 원칙적으로 하나도 없다. 그 대신 지난 시즌, 즉 지난해 가을부터 그해 봄까지 올린 오페라와 발레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역사적 가치가 있으며 극장을 대표할 만한 작품들을 엄선하여 각 작품 별로 매일 1~2회씩 번갈아 가며 공연하는 것이다. 그러니 국립 오페라 극장의 1년 시즌 총정리 무대가 바로 페스티벌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처럼 뮌헨에 상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계적인 극장의 공연들을 짧은 기간에 다 훑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 외에 몇 가지 실내악과 콘서트, 중요한 성악가의 리사이틀이 추가되어 페스티벌의 전체 프로그램이 완성된다.

스타들의 산실

특히 2003년은 이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이 시작된 지 350년이 되는 해로서, 거리 곳곳에 내걸린 기념 깃발들이 페스티벌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그 어느 해보다 화려한 공연들로 구성된 그해에는 6월 말부터 7월 말까지 40일간 매일 최고의 무대가 펼쳐졌다.

그때 가장 주목 받은 공연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였다. 어쩌면 가장 진부할 수도 있는 레퍼토리가 어떻게 거듭나는가를 보여 준, 즉 연출의 시대를 선도하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역량을 보여 준 무대였다. 안드레아스 라인하르트의 전위적이고 현대적인 무대 디자인은 적과 흑의 강렬한 조화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 떠오르는 신성으로 비올레타 역을 맡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노련한 질감의 음성과 빼어난 외모, 영화를 방불하게 하는 사실적인 연기로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을 압도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2005년의 잘츠부르크 공연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알프레도 역의 롤란도 비야손이나 제르몽 역의 파올로 가바넬리 역시 대단한 열창을 했지만, 그녀에게 가려져 버린 형국이었다.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의 음악 감독이었던 주빈 메타가 지휘한 작품들 중에서는 《팔스타프》가 가장 각광을 받았는데, 이 공연은 극장 앞의 막스 요제프 광장에서 거대한 스크린을 통해 시민들에게 무료로 중계되기도 했다.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에서는 매년 가장 중요한 한두 작품을 이 광장에서 스크린으로 상영하여 모든 시민들에게 보여 주는 행사를 한다.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의 최대 강점은 스타 가수들이 총출동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세계 오페라계를 이끌어 갈 예비 스타가 등장하는 곳이 뮌헨이다. 네트렙코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스타들이 뮌헨 무대를 통해 능력을 검증 받았다.

에디타 그루베로바, 발트라우트 마이어, 르네 콜로 등의 대가들은 이 극장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가졌으며, 최근에 이 극장을 통해 실력을 검증한 가수들은 베셀리나 카사로바, 아냐 하르테로스, 크리스티네 오폴라이스, 니노 마차이제, 카르멘 오프리사누, 에카테리나 시우리나, 요나스 카우프만, 조세프 칼레야, 로버트 딘 스미스, 매튜 폴렌차니, 파볼 브레슬리크 등으로 그 면면이 화려하다.

전후 재건의 상징,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뮌헨에는 모두 3개의 오페라 하우스가 있지만 페스티벌의 중심은, 바이에른 왕이 기거하던 레지덴츠 궁 앞에 있는 막스 요제프 광장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이다. 1818년에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지어진 이 거대한 건물은 처음에는 수준 높은 모차르트 공연으로 유명했다. 루트비히 2세의 치하 때는 바그너 악극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극장으로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개관하기 전까지는 바그너의 신전이자 바그네리언들의 메카로 군림했다.

또한, 국립 오페라 극장은 1850년대에 이미 이탈리아의 젊은 작곡가이던 베르디의 시리즈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전위적인 프로젝트로, 독일만의 극장이 아닌 국제적인 오페라 극장의 면모를 확립했다. 그 후에 이 극장은 19세기 최고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나 한스 크나퍼츠부시 등 대가들에 의해 명성을 쌓으면서 알프스 이북의 최고 오페라 하우스로 자리 잡았다.

이 극장이 여름 페스티벌을 최초로 시작한 것은 1875년이다. 페스티벌은 지휘자 브루노 발터와 그를 잇는 클레멘스 크라우스에 의해 그 위상이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음악계뿐 아니라 바이에른 지역의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이었던 이 극장은 1943년 미군의 단 하룻밤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페스티벌은 다른 극장에서 열리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기에 게오르크 솔티, 루돌프 켐페 등이 극장과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이 건물이 새로 문을 연 것은 1963년이다. 과거와 같은 모습의 극장이 2,100석의 방대한 규모로 건설되었고, 레지덴츠 궁 안의 쿠빌리에 극장도 함께 재건되었다.

쿠빌리에 극장은 500석에 불과한 왕실 전용 극장으로, 처음 설계한 건축가 쿠빌리에의 이름을 땄다. 이 극장을 찾기는 쉽지 않은데, 왕의 거처인 레지덴츠 궁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복궁 안의 한 건물에 위치한 셈이다.

구운 도자기를 일일이 붙여서 실내장식을 한 쿠빌리에 극장은 로코코 양식의 백미다.

쿠빌리에 극장은 구워서 만든 도자기를 일일이 붙여서 실내장식을 한, 세계에서 손꼽히는 화려한 극장이다. 또한 로코코 양식의 백미로 평가 받는 등 건축학적으로도 중요한 건물이다. 페스티벌 기간에는 이 귀한 곳을 잠깐 공개해 모차르트나 바로크 오페라, 실내악 등을 공연한다. 쿠빌리에 극장은 시즌 중에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프로그램을 소화하는데, 주로 모차르트나 몬테베르디의 음악같이 규모가 작은 오페라와 실내악들을 공연한다. 마치 파리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바스티유 극장과 가르니에 극장 두 곳을 소유하고 운용하는 것과 흡사한 시스템인데, 쿠빌리에 극장의 경우에는 문화재이기 때문에 공연 횟수가 매우 적다. 그러니 뮌헨을 방문하는 중에 쿠빌리에 극장에서 공연이 있다면, 절대 놓치지 말기 바란다. 유서 깊은 곳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음악적인 경험에서나 건축적인 경험에서나 소중한 기회다. 안타깝게도 공연이 없다면, 시간을 내서 일반에 개방되는 내부만이라도 보기를 권한다.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과 쿠빌리에 극장이 원래의 모습을 찾은 이후, 이 두 극장을 아우르는 이름으로 거듭난 기관인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는 볼프강 자발리시가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자발리시가 일본의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떠나기 전까지,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두었다. 그 후로는 페터 슈나이더, 아우구스트 에버딩 등이 감독을 맡았으며, 또한 이곳은 전설이 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가장 많이 지휘봉을 잡은 극장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주빈 메타가 감독으로 있으면서, 시즌과 페스티벌의 공연과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를 모두 관장했다. 메타 시절에 이 페스티벌은 다양한 연출을 보여 주고 세계적인 가수들을 출연시켜 세계 정상의 위치를 유지했다. 메타가 사임한 뒤에는 켄트 나가노가 극장의 전권을 물려받았는데, 메타 시절에 못지않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은 모차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이 극장의 전통적인 레퍼토리인 빅 3 오페라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을 하는 곳으로 국제적 명성이 높았다. 요즘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비롯하여 프랑스, 체코 오페라 등에서도 탁월한 수준을 과시하고 있다.

뮌헨의 세 번째 극장인 ‘슈타츠테아터 암 게르트너플라츠(Staatstheater am Gartnerplatz)’는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과 완전히 독립해 자신들만의 프로그램을 꾸린다. 이곳은 빈의 폴크스오퍼나 베를린의 코미셰 오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으로서, 오페레타 등의 가벼운 레퍼토리를 주로 다루며, 외국 작품이라도 독일어로 공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뮌헨 티켓 구하기

이 책의 초판본에서는 이 페이지의 제목이 “신청서 우편 접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나 싶다. 당시에는 이 페스티벌의 티켓을 구하는 것이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초판본 내용을 그대로 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은 티켓 구하기가 비교적 어려운 편이다. 우편 주문을 우선적으로 받기 때문이다. 미리 용지를 구해서 독일어로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아주 일찌감치 신청을 받는 것도 아니고, 각 공연마다 개막 두세 달쯤 전부터 받는 것이 보통이다. 현지에 살지 않고서는 적기에 신청서를 접수시킨다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에디타 그루베로바나 안나 네트렙코 같은 인기 가수가 출연하는 날은 인터넷이나 전화 판매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좋은 자리는 다 없어진 경우가 많다.

가장 좋은 예매 방법은 현지에 아는 사람을 확보해서 그에게 독일어로 신청서를 접수시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뮌헨 현지에 작은 단골 호텔을 만들어서 그 매니저에게 부탁을 해 놓곤 한다. 보고 싶은 좋은 공연이 있으면 그에게 미리 전화나 팩스로 날짜와 조건을 이야기하고 그의 은행 계좌로 송금하는 방법을 쓰는데, 독일인답게 항상 정확하게 잘해 주었던 것 같다. 물론 숙박은 그의 호텔에서 해야 한다.

하지만 예약이 되지 않았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나는 예약을 하지 않은 때에도 이 극장을 찾아와서 한 번도 그냥 발길을 돌린 적이 없었다. 물론 행운이 따라 주었지만…….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의 로비에 들어가면 커다란 게시판이 눈에 뜨인다. 여기서는 자신이 사 놓은 공연 티켓을 사정상 인계하겠다는 많은 쪽지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부분 자신들의 티켓을 아예 복사해 붙여 놓고 있어서 리얼하고 익사이팅한 느낌이 든다. 재미있는 것은 그곳에서 뮌헨뿐 아니라 바이로이트·잘츠부르크·빈·베로나 페스티벌의 티켓들도 볼 수 있고, 심지어 멀고 먼 시애틀의 스리 테너 콘서트 티켓을 발견한 적도 있다. 물론 뮌헨 필하모닉이나 베를린 필하모닉의 티켓도 보이고 듣도 보도 못한 공연의 정보를 알 수도 있어서 과연 뮌헨은 음악의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지금은 티켓을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으며,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는 티켓의 범위도 넓어졌다. 그렇다고 인터넷으로 원하는 티켓을 다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2011년 시즌의 요나스 카우프만의 리사이틀 같은 경우는 인터넷 판매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매진이었다. 뮌헨 오페라를 지탱해 온 ‘내부인들’이 모든 티켓을 선점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뮌헨, 빈, 잘츠부르크도 대동소이하다.

뮌헨의 또 다른 랜드 마크들

뮌헨이 음악뿐 아니라 미술로도 중요한 도시라고 이미 말했는데, 이 도시에 대단히 많은 미술관이 있기 때문이다. 뮌헨의 별명은 ‘박물관의 도시’로, 이곳은 인구 130만 명에 100개가 넘는 박물관을 보유하고 있다. 박물관의 종류도 초상화, 마차, 도자기, 유리, 동전, 보석, 기계, 자동차 등 생각할 수 있는 물건은 거의 다 있다. 하지만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이다.

뮌헨이 미술 분야에서도 중요한 도시인 것은 세 미술관 때문이다. 이 미술관들은 역대 바이에른 왕들과 지금의 뮌헨 시가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장소로, 고대부터 로코코까지의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하는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 그 후부터 근대까지의 작품들과 특히 인상파 컬렉션으로 유명한 ‘노이에 피나코테크(Neue Pinakothek)’, 끝으로 우리 시대 거장들의 미술품들이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는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Pinakothek der Moderne)’를 가리킨다. 공연이 없는 오전이나 낮 시간을 이용해 이 미술관들을 방문해 보면, 그동안 뮌헨이라는 도시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들이 일거에 바뀌는 감동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특히 노이에 피나코테크에서는 뮌헨이 보유하고 있는 많은 인상파 작품들에 놀라게 될 것이며,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가구, 주방 기구, 전화기, 오디오, 자동차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독일인들의 예술학적 정신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이 세 미술관을 통해 우리는 문화를 사랑하고 예술가를 존경하는 그들의 정신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또한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최근에 문을 연 브란트호르스트 미술관(Museum Brandhorst)도 찾아보기 바란다.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 옆에 있는 이곳에서는 뮌헨이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세계 첨단의 도시라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뮌헨에 온 당신, 저녁에는 공연을, 낮에는 미술관을 방문한다면 매일 유럽 예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

최고의 무대를 지향하다

2011년 페스티벌에는 유달리 좋은 공연들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벨리니의 《카풀레티 가와 몬테키 가》는 이브 아벨이 지휘하고 뱅상 보사르가 연출을 했는데, 더욱 화제를 모은 것은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의 의상이었다. 무대 위로는 하늘을 나는 두 남녀의 커다란 석고상이 배치되어, 누가 보아도 이룰 수 없는 안타까운 커플을 상징하고 있었다. 줄리에타 역의 에카테리나 시우리나는 시종 드레스를 반만 걸치고 나와서 위태로운 자세로 연기하여 자신의 비극을 강조했으며, 로메오 역에는 바지 역할의 일인자인 베셀리나 카사로바가 열창했다. 모든 이들은 그녀들이 대체 언제 라크루아의 의상을 입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2막이 올라가기 전에 드디어 그의 의상이 등장했다. 각기 다른 드레스를 입은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마치 오트쿠튀르 쇼 장면처럼 객석에서 무대 위로 놓인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이것은 줄리에타가 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의미하는 장면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는 과거 오토 셴크의 연출을 유르겐 로제가 재공연한 것으로 좀 섭섭했지만, 도인 같은 모습의 레이프 세게르스탐의 지휘는 대단했다.아냐 하르테로스, 케이트 앨드리치, 루시 크로, 이 세 여가수들의 노래는 너무나 훌륭하고 앙상블이 완벽해서,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장미의 기사》 중 최고였다. 또한 오크스 남작 역을 연기한 피터 로즈의 명연 역시 인상적이었으며, 가수 역을 맡은 표트르 베찰라는 단 한 곡의 아리아만 부르고도 관객들로 하여금 인터미션 때 사인을 받으려고 장사진을 치게 했다.

그 외에 도니체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에디타 그루베로바와 파볼 브레슬리크가 열연을 했고, 《사랑의 묘약》은 니노 마차이제와 매튜 폴렌차니가, 드보르자크의 《루살카》는 크리스티네 오폴라이스와 표트르 베찰라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니나 슈템메와 벤 헤프너가 불렀다.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로엔그린》, 《돈 조반니》, 《폰토 왕 미트리다테》 등도 페스티벌 무대를 장식했다.

2012년에는 안드레아스 크리겐부르크가 연출하는 바그너의 《반지》 전 4부작이 페스티벌 무대를 장식하게 되고, 마이어의 《코린토의 메데아》를 비롯하여, 《라 보엠》, 《투란도트》, 《라 트라비아타》, 《호프만의 이야기》, 《장미의 기사》, 《신데렐라》, 《보체크》, 《폰토 왕 미트리다테》 등이 올라갈 예정이다.

한 명의 오페라광이 남긴 것들

뮌헨 주변에는 작고 개성 있는 도시들이 있어서 당일이나 1박 정도로 멋지고 유익한 나들이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퓌센 근처의 노이슈반슈타인 성城이다. 이곳은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이자 오페라광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지은 성채들 중 하나인데, 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유럽 성채의 원형으로 각인된 곳이다. 성 안에서는 바그너 오페라의 장면을 그린 벽화들과 《로엔그린》에 나오는 호수와 백조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바그너에게 심각하게 경도되었던 생전 왕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성의 꼭대기에 있는 메인 홀이 정사를 돌보기 위한 곳이 아니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나 《탄호이저》에 나오는 것처럼 노래 경연 대회를 하기 위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과연 인생에서 오페라란 무엇인지”라는 자문에 빠지게 된다. 오페라 팬이라면 당연히 한 번은 방문해야 할 이곳은 렌터카로 가도 괜찮고, 뮌헨 중앙역에서 버스나 기차로도 갈 수 있는데, 약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루트비히 2세의 또 다른 숨은 궁전 린더호프도 방문할 가치가 충분할 만큼 아름답다. 린더호프의 성채가 있는 산 아래 마을 퓌센은 한국 관광객들이 스쳐 가는 곳인데, 시간이 허락한다면 하루나 이틀 혹은 그 이상 머물기를 권한다. 전원의 향취를 만끽할 수 있다. 숙박비가 무척 싼 이곳은 자전거를 빌려 일대를 하이킹하거나 느긋하게 숲길을 산책하거나 종일 책만 읽고 있어도 행복한 곳이다. 특히 페스티벌이 열리는 여름과 단풍이 장관을 이루는 가을에는 나그네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척이나 황홀하다.

그 외에도 뮌헨 주변에는 뉘른베르크, 슈방가우, 울름, 파사우, 잘츠부르크, 인스브루크 등 음악적인 사연들로 유명한 여러 도시들이 있어서 음악 팬들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그리고 덜 유명하지만 가까워서 부담이 적은 소도시 아우크스부르크나 레겐스부르크 등을 소풍 삼아 방문해 점심이라도 먹고 온다면 참으로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인간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오페라 거리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이 끝나면, 사람들은 막스 요제프 광장 건너편의 슈테판 하우스로 달려간다.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사람들이 오페라를 보던 차림 그대로 앉아서 유명한 그 집의 소시지와 맥주를 열심히 먹는다. 조금 있으면 악기 케이스를 든 오케스트라 악사들도 몰려 들어온다. 바로 방금 연주를 했던 국립 오페라 극장 단원들이다.

언젠가는 음악가들 사이에 우리나라 고등학생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동양 소녀가 있었다. 약관의 나이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의 악장에 올라 화제가 되었던 중국계 바이올리니스트 야메이 유였다.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주자들을 호령하던 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평상복을 입은 그녀는 호기심에 맥주를 노리는 홍조 가득한 앳된 소녀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시민들을 일일이 응대해 주었다. 이제 식당 안은 관객과 음악가들의 열띤 토론장이 되어 버렸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다만 예술과 인간이 어우러진 뮌헨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늦은 밤 불빛 아래 맥주잔을 든 그녀의 뺨은 점점 더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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