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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빈 - 스파이들의 대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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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냉전의 호텔 - 임페리얼 호텔

지난 2009년 12월, 빈 중심가 임페리얼 호텔의 객실에서 필드 케이르라는 남자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는 요르단 중앙정보부의 전직 지휘자이며 최근까지 국왕 압둘라 2세의 최측근이었던 자. 경찰은 심장 마비라고 발표했지만 여러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해 초, 우마르 이스라일로프라는 남자가 빈 거리에서 대낮에 총격으로 살해당했다. 그는 러시아 군이 체첸 공화국에서 벌인 잔혹 행위의 주요한 목격자였다고 한다.


스파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눈앞에 펼쳐져도 낯설지 않은 도시. 빈은 언제나 국제 정보전의 한가운데 있어 온 도시다. 냉전 시대 동서의 스파이들이 공공연히 정보전을 펼치던 곳이었고, 철의 장막이 해체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에서 외국인 정보 조직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스파이 허브(Spy Hub)다. 가장 위험한 나라의 정보원들조차 ‘전통에 따라’ 자유로운 활동을 벌이고, 국제원자력기구(IAEA)나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같은 국제기구가 곳곳에 있고, 무기 구매와 돈 세탁도 용이하다. 공교롭게도 케이르가 죽은 임페리얼 호텔은 냉전 시대 크렘린의 모든 정보가 집결되던 빈 적군(Red Army)의 수뇌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회담방 - 쉔부른 궁전

오스트리아가 대제국이었을 때부터 빈은 스파이들의 도시였다. 아니, 이 제국의 영광 자체가 첩보 활동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1740년에 즉위한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철의 정열로 이 제국을 다스렸다. 다산의 여제였던 그녀는 모두 16명의 아이를 낳았고, 이들을 통해 전 유럽과 사돈을 맺어 권력의 거미줄을 짰다. 루이 16세에 시집 보낸 마리 앙트와네트 역시 그 중 하나였는데, 여제는 다른 자식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녀들에게 스파이 임무를 맡겨 일거수일투족을 알리게 했다. 그런데 주요 보고 사항이란 것이 덜 떨어진 루이가 아무리 앙트와네트가 유혹해도 침소에 들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으니, 오죽 속이 탔을까?

여제가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을 보고 경쟁심에 불타 화려하게 증축했다는 쉔부른 궁(Schloss Schönbrunn)에서 그녀는 반대의 입장에 처해 있었다. 궁 안에는 곳곳에서 밀파된 스파이들이 득실거렸기에, 시종과 시녀의 출입조차 통제한 비밀 회담방을 마련해 두어야 했다.


단두대에 오른 마리 앙트와네트의 주요 죄목은 쉔부른 궁에 편지를 보내 스
파이 활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도시를 구하고 커피를 얻은 스파이 - 콜시츠키 거리

스카이 콜시츠키는 성안에 갇힌 시민들을 구한 덕분에 도시 최초의 카페를 열었다.


1683년 오스만 제국의 터키 군사들이 빈을 공격하자, 시민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두 달 동안 적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점차 식량과 물자가 떨어지고 지쳐가던 시민들은 항복이 임박해왔다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이때 폴란드 출신의 장사꾼인 콜시츠키(Georg Franz Kolschitzky)라는 자가 나선다. 그는 아랍인 행세를 하며 오스만의 노래를 부르며 터키 군사 지역을 통과해,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곧 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다. 빈 시민들은 머지않아 해방의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


이때 성 밖의 터키군이 남기고 간 포대 중에 이상한 곡식이 있었다. 아랍 문화에 익숙한 콜시츠키는 이것이 '커피'임을 알고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한다. 그는 ‘푸른 병 아래의 집(Hof zur Blauen Flasche)’이라는 빈 최초의 카페를 열고 기독교인들을 커피에 중독되게 만들었다. 커피 가루를 걸러내고 우유를 더하는 빈 특유의 전통도 이때 생겨났다. 지금 빈의 남쪽에는 콜시츠키의 이름을 딴 거리(Kolschitzky-gasse)가 있어 아랍 복장을 하고 커피를 따르는 그의 조각상을 볼 수 있다.

[제3의 사나이]의 카페 - 카페 모차르트

빈을 세계인들에게 ‘스파이 도시’로 각인시킨 장본인은 뭐니뭐니해도 영화 [제3의 사나이]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한 뒤 빈이 네 열강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오랜 친구의 연락으로 빈에 도착한 미국의 소설가는 친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음을 알게 되고, 사건을 뒤쫓다 무기 암시장과 같은 빈의 어두운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느와르 영화의 대명사로 꼽히는 이 작품은 시종일관 어두운 톤으로 대관람차, 묘지, 하수로 등 빈의 여러 장소들을 화면 속에 담는다. 대관람차에서는 그 유명한 명대사가 펼쳐진다. “이탈리아는 체사레 보르자 밑의 40년 동안 전쟁과 테러와 유혈낭자한 참상을 당했지만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와 르네상스를 만들었다. 스위스는 그들의 형제애로 5백 년 동안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얻어 뭘 만들었나. 뻐꾸기시계다.” [제3의 사나이]의 무대가 되는 빈을 탐험한 뒤에는 알베르티나 광장 모서리의 ‘카페 모차르트’에 앉아 잠시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스릴러 작가 그래엄 그린이 시나리오를 썼던 장소이며 영화에도 등장한다.


냉전 시대,빈은 암시장의 어둠이 흘러넘치는 도시였다.

마타 하리가 되고 싶었던 사랑의 여간첩 - 요한 스트라우스 동상

치명적인 매력의 여자 스파이,마타 하리의 전설은 빈에서 귀엽게 부활했다.


마타 하리와 본드걸. 우리에겐 치명적인 매력의 여성 스파이들에 대한 판타지가 있지만, 실제 정보 세계에서 이런 실례를 찾기란 극히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빈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한때 마타 하리가 무희로 공연하기도 했던 이 도시에서 ‘마리나’라는 닉네임의 KGB의 여간첩을 만나보자.


마리나는 아리따운 금발의 여성으로 파리의 러시아 이민자 사회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프랑스 정보조직에 섭외되어 모스크바 무역박람회에 참가한 것이 이쪽 세계에서의 첫 일이었다. 별것 아니었다. 러시아 혈통이고 예쁘니까 자연스럽게 사업가들과 친해졌고, 그들의 대화를 기록해 전달하면 되었다. 따분했다. 그녀는 이후 뮌헨에 있는 미국의 이념 방송국인 ‘라디오 리버티(Radio Liberty)’의 러시아어 방송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올레그 투마노프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카나리아 군도로 여행을 가서 그녀와 한 침대에 누운 투마노프는 자신이 KGB의 스파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곧 설레게 되었다. 비밀과 위험에 매혹되는 소녀의 마음으로. 마리나는 1974년부터 KGB 정보원이 되었다. 그녀는 이 일을 즐겼다. 비밀 편지를 작성한다든지 하는 일엔 낙제점이었지만, 방송국에서 술을 마시며 동료들의 비밀을 건네 듣는 일은 아주 잘했다. 그녀는 이 정보들을 모아 빈의 스파이들에게 전했다. 그녀의 빈 지도에는 주요 접선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스타트 파크(Stadt Park)의 유명한 요한 스트라우스 동상도 그 중의 하나다. 나중에는 방송국에 설치할 폭탄을 배달하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이는 거절했다고 한다. 소녀 스파이의 로맨틱한 감성에 맞지 않았나 보다.

제임스 본드의 놀이동산 - 대관람차

명품 중독의 바람둥이 스파이, 제임스 본드에게도 빈은 지나칠 수 없는 도시다. 역대 007 중에서 제일 인기 없는 티모시 달튼이 주연을 맡는 바람에 빛이 바랬지만, [007 리빙 데이라이트]는 이 도시를 배경으로 화려한 스파이 전쟁을 보여준다. 본드는 슬로바키아에서 암살범으로 의심되는 본드 걸 밀로비와 그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 ‘레이디 로즈’를 빈으로 데리고 온다.

쉔부른 궁전, 놀이동산(Wurstelprater), 그리고 유명한 대관람차((Wiener Riesenrad)를 지나는 액션 활극이 펼쳐진다.


제임스 본드도 당연히 이 첩보 도시를 피해갈 수 없었다.(영화이미지)

비엔나 커피는 없어도 비엔나 땅굴은 있다 - 슈베하트

1940년대 후반 빈을 분할 통치한 여러 나라들은 적국의 정보를 캐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영국 측이 임페리얼 호텔의 소련 측 본부에서 크렘린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경로를 알아내게 된다. 영국군은 빈 남동쪽 슈베하트(Schwechat) 지역의 고속도로 밑에 땅굴을 파고 전화선을 따낸 뒤, 근처에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위장 가게를 연다. 영국제 남성복과 잡화 같은 걸 팔았는데, 의외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오퍼레이션 실버(Operation Silver)라 불린 이 작전은 훗날 베를린에서 보다 큰 규모로 진행된 오퍼레이션 골드로 발전했다. 오스트리아는 국토의 3/4이 산악 지역인지라 터널 굴착에 있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한다. 한반도 휴전선 지역에서 발견된 북한 땅굴에 장비와 기술력을 제공한 것도 바로 그들. 그런데 이들은 장비를 제공한 사실을 남한 측에 슬며시 알려주었다고 한다. 역시나 스파이 정신이 투철한 나라.

“빈은 카페에 둘러싸인 도시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했다. 빈은 유럽의 대도시 중에서 가장 먼저 커피 문화를 받아들인 곳이며, 19세기 말의 고풍스러운 문학 카페의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도시다. 카페 센트럴(Café Central), 카페 데멜(Café Demel), 호텔 자허(Hotel Sacher) 등 전통의 커피하우스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빈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다. 물론 [비포 선라이즈]에서 하룻밤 풋사랑의 무대가 되는 레코드 가게, 다리, 공원, 묘지들을 둘러보는 것도 멋진 일이다. 모차르트, 왈츠, 오페라로 대표되는 클래식 음악의 세계에 한껏 빠지는 것도 훌륭한 선택. 11월부터 시작되는 유럽 최대 규모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놓치기 아깝다. 길거리 곳곳에서 파는 핫 와인 한 잔으로 몸을 덮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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