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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국

태국 치앙마이 : 엄마는 떠났다. 꿈꾸던 평온 찾아 따뜻한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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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떠났다. 꿈꾸던 평온 찾아 따뜻한 그곳으로…

얼마 전, 칼슘제를 처방받았다. 의사는 안경을 내려쓰며 나를 무심히 보더니 "젊은 사람치고 좀 빠르긴 한데…"라고 시작하는 얘길 늘어놓은 후, 골다공증 초기라고 진단했다. 나는 약 몇 가지를 더 처방받았다. 그중에는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는 알약도 있었다. 하루에 한 알. 근육통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식후 상관없이 밤에 먹는 게 좋다고 약사가 말했다.

태국 북쪽에 위치한 치앙마이의 논과 전통 가옥이 평화롭게 보인다. 영화‘수영장’은 치앙마이를 배경으로 일본인인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표준체중을 넘지 않는 체격에 비해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건 집안 내력과 관련 있었다. 엄마가 쉰 즈음 먹기 시작한 약을 나는 마흔이 되기도 전에 먹게 된 셈이었다.

유전은 늘 슬픈 쪽으로만 적용된다.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편견일 뿐인데,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그런 믿음은 자꾸 굳어져 간다.

언젠가 할머니와 엄마를 차례로 잃고, 자궁암에 대한 공포로 자신의 자궁을 들어내는 어느 여자의 수기를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얘길 경찰 시험을 공부 중이던 사촌 남동생에게 말해줬는데 그때 그 아이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에이. 그럼 유방암이면 유방을 도려내겠단 얘기예요?" 수기 속 여자는 딸 두 명을 낳고 자신의 아기집과 영영 작별한다. 그 수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엄마도 (이해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뻐할 거다! 그것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결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 '수영장' 역시 조금 특별한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영화 속 엄마 교코는 자신의 꿈을 위해 자신의 딸 '사요'를 할머니가 있는 일본에 맡기고, 먼 태국의 '치앙마이'에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엄마가 일하는 치앙마이의 게스트하우스로 사요가 어느 날, 트렁크 하나를 들고 찾아온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선 '메종 드 히미코'를 연상시키는 평화로운 게스트하우스가 나오지만 그곳에는 영화 속에 가늘고 긴 '오다기리 조' 같은 남자 대신 평균보다 훨씬 작고 나이 든 여자와 아이가 살고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지만 버려진 개를 키우며 살아가는 게스트하우스 주인 기쿠코와 교코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청년 이치오, 태국소년 비이 말이다.

너무 평온해서 도대체 이런 삶이 현실에 존재하기는 할까, 막연히 궁금해지는 그런 모습인 채로 말이다. 하지만 사요는 자신을 도쿄에 놔두고 태국까지 간 엄마가 버려진 태국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에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영화는 이런 사요의 심리를 관찰하며 이들 모녀와 이치오, 기쿠코의 일상을 쫓는다.

'수영장'을 본 건 매일 비가 내리던 8월이었다. 하늘을 보면 "이건, 너무 하잖아!" 라는 탄식이 나온다거나 "차라리 물고기가 되고 말지!"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날씨였다. 온몸이 젖은 빨래 같아서 햇빛에 널어 말리지 않으면 곰팡이가 필 것처럼 욱신거렸다. 습도계의 눈금도 80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었고, 입맛이 뚝 떨어져 매일 보리차에 밥을 말아 엄마가 담가준 오이지와 함께 먹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작가들의 트위터를 보면 '온몸이 수해지역 같고 젖은 벽지 같다'는 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원고 마감이고 뭐고, 일산의 한 노천카페에 나와 친한 선배와 얘길 하다가 '치앙마이'가 소설을 쓰기엔 최고의 도시란 말을 들었다. 방콕과 떨어져 있어 물가가 싸고, 북쪽에 있으므로 관광지인 방콕보다 4~5도 정도 온도가 낮아서 날씨 때문에 사람을 지치게 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따뜻하고 안온한 기온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대부분 유순한 표정과 웃음을 가지고 있는데, 길거리에서 그런 아이들과 마주치면 문득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이 하찮게 느껴진다는 말엔 귀가 솔깃했다. 갓 튀긴 바나나 튀김을 두 손에 쥐고 참 맛있게 냠냠대던 영화 속 태국소년 비이처럼 말이다. 문득 깨끗한 운동화나 잘 졸라맨 구두 대신 느슨한 슬리퍼를 길바닥에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그리워지는 기분이었다. 부처님조차 정좌해 앉아 있지 않고 머릴 괴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도시라면 더 말해 뭐하겠는가. 당장 인터넷에 들어가 치앙마이로 가는 가장 싼 표가 있는지 살펴봐야 마땅했다.

8월에 햇빛이 모자라 고생하거나, 입맛을 잃고 급격히 몸무게가 줄어든 사람이라면 칼슘제 대신 이 영화를 권유할 만하다. 내게 골다공증 진단을 내린 의사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자외선 차단제는 조금만 바르고(이건 피부과 선생님과 정반대!) 오후 3시 이후에 팔과 다리를 드러낸 채 햇빛 속을 30분쯤 산책하는 게 뼈 건강에 필수적이라고 한다. 뼈에 좋은 건 칼슘제가 아니라, 오후 3시의 햇빛임을 깨닫게 해주는 8월이었다. 그 8월에 우연히 본 '수영장'은 당장 더 많은 햇빛을 얻기 위해 치앙마이로 달려가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고.

●수영장: 인기 드라마‘런치의 여왕’의 각본을 쓰기도 했던 오모리 미카 감독의 작품. 고바야시 사토미와 모타이 마사코, 가세 료가 함께 연기했다. 재밌는 우연 하나.‘ 안경’에 출연했던 배우가 모두 이 영화에 출연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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