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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라오스

라오스 : 산골에서 만난 소중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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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북쪽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라오스 중부의 타들로라는 곳을 여행할 때 우연히 만난 이태리 여행객 때문이다. 여행객들이 통상적으로 묻듯이 그에게 무엇 때문에 라오스에 왔고, 어디를 여행할꺼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대뜸, 말대신 포스트 카드 한장을 꺼내보였다. 그 포스트카드에는 여러 다른 소수부족들이 그들만의 전통 복장을 입은채 웃고 있는 조그만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데 군데 사진이 오려져 있는 것도 보였다. 그는 나에게, 자기는 이 포스트카드의 주인공 절반을 이미 찾았다며, 찾은 주인공들에게는 그 포스트카드의 사진을 오려서 기념으로 주었다고 했다. 사진속의 주인공들을 만났다니 신기함에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가르쳐줄수도 없고, 가르쳐줘서도 안된다고. 그건 나의 몫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이태리에서부터 이 라오스의 민족들에 대해 공부하고, 여기와서 이사람 저사람 사진 보여주면서 라오스말,사투리를 섞어가면서 수소문하고, 오토바이 택시를 며칠 혼자서 대절해가면서, 그렇게 찾은 사람들인데, 그런 노력과 모험도 없이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약간 샌님처럼 굴긴했지만, 그의 말에 백번 공감하며, 라오스 북부로 올라가면서 나 혼자서 한번 찾아보자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베트남에서부터 그때까지 계속해서 오토바이로 여행을 하고 있었기에, 뭐 길이든 아니든 내 맘대로 수정하면 되니 어려울 건 없을 것 같았다.

그 뒤 약 2주후, 나는 어느새 라오스의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라오스 북부의 어느 지점을 지나치니, 말 그대로 전통복장을 하고, 걸어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였다. (그들의 삶을 존중하기 위해, 앞으로 부족명칭과 구체적인 지명은 언급하지 않겠다.)

생필품을 팔려는 사람부터 해서, 돌로 때려죽인 큰 도마뱀을 팔려고 나온 사람, 사향고향이를 팔려고 나온 사람들도 길가에서 하나 둘 만났다.

 
 
마을도 여기저기 많이도 지나쳤었다. 한 마을이라도 내려서, 사람들과 얘기라도 하고 싶었으나, 라오스 말이라곤 인사말 몇 개와 숫자세는 것 밖에 할줄 몰랐던 낯선 이방인인 내가 그들의 소소한 평화를 깨뜨리며 친근하게 다가서긴 쉽지 않았다.

그렇게 조그만 교감을 나눌수 있는 마을을 찾아다니는 통에 하루는, 날이 금새 저물었고, 결국 산을 넘지 못한채, 이 산중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근처의 한 소수민족 마을의 평화는 오토바이를 타고 짐을 한가득 싫은 이상한 이방인에 의해 깨지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설 때 쯤에는 산중 마을이라 전기도 없었고, 말 그대로  암흑 그 자체였다.

해가 지기전에 산을 넘지 못할거라는 것은 오토바이를 타던 내내 예감했던 일이지만, 이 마을에서 나를 재워줄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마을은 20가구도 채 되어 보이지 않았다. 산길을 5~6시간 운전한 탓에,몸도 지치고, 어쩔 도리가 없어 그마을의 유일한 가게에서 과자 한봉지를 사서 뜯어먹고 앉아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말도 없이 과자만 뜯어먹는 내가 누군가 싶어 모여들었다. 상점 안에 조그만 촛불 빛에 갖고 있던 라오스 사전을 꺼내어, 사람들에게 내가 누군가 부터해서, 왜 여기 이르렀고, 잠잘 곳이 필요하다는 말을 천천히 했다. 

문제는 여기 사람들 중 라오스말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계하는 이들도 몇 있었다. 보다 쉬운 대화로 손짓 발짓하며 최대한 미소를 지어보이니, 몇몇 알아듣기도 하고, 호응도 해준다. 그때 밖에 트럭이 서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수박을 한 가득 실은 트럭이 와있다. 조그만 마을들을 돌며 산지 수박을 파는 듯한데, 큰 수박 하나가 채 우리돈으로 500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돈이 없는 소수민족이라, 이것저것 재기만 하고, 도무지 사질 않는다.

내가 대뜸 수박 두어개를 사서 들고와서, 사람들 앞에서 깨어 나누어주니 이제는 분위기가 꽤나 반전이 되었다. 결국 수박을 먹으며 얘기가 통하여, 내가 앉아있던 상점의 작은 공간에 잘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잘자리를 펴고 잠깐 있으니, 이 잡화상 주인의 형 되는 사람이, 찾아와서 인사를 한다. 그리고 손짓과 행동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와이프가 무슨일이 있다고 하는듯하다. 여러 단어를 찾아 물어보니, “내 와이프가 아픈데, 와서 봐줄수 있냐”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고 얘기해도, 막무가내로 좀 봐달라고 한다. 이 산길로 약 한나절 이상을 오토바이로 되돌아 가야 몽족 의사 yaher 가 하고 있는 조그만 간이 진료소라도 갈수 있는걸 생각하면, 이 사람들이 약을 받거나, 제대로 된 병원을 간다는 건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쩔수 없이 이 사내의 집으로 따라 들어가니, 전통 의상을 입은 그의 아내가 부엌에서 갓난애의 젖을 물리고 있는데, 언뜻 보기에도 사지를 덜덜 떨고, 이 쌀쌀한 저녁에 땀을 비오듯 흘린다.

상태가 예사롭지 않은데, 병원을 가봐야 된다고 얘기는 하지만, 이 사람들의 경제력이나, 가까운 병원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도 하루가 넘게 걸리는 걸 감안하면 고개는 끄덕이지만,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안다. 

할 수 없이 내 가방에 들어있던 해열제와 종합 감기약 몇 알을 꺼내주며, 복용법을 설명했다.

말라리아 같은 큰 병이 아니길 기도하며, 이 사람들이 병원에 갈수 없는 현실을 속으로 개탄했다. 사내는 가게에서 자지 말고, 자신의 집에서 자라고 권유했고, 순식간에 아들의 방을 비워주곤, 잠자리를 펴줫다.

세상에는 많은 가난한 이들이 있지만, 이들의 삶 또한 거칠고 험했다. 그들의 잠자리라고 해봐야, 시멘트 바닥에 천 하나를 댄 것이고, 돈벌이 할 것은 거의 없고,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거나, 맹꽁이를 잡거나, 산짐승을 팔거나 하는 부수익으로 조금의 돈을 가지는 식이다.

먹을거리도, 매일 산속에 들어가 죽순이나 먹을만한 것을 손수 캐와야 하루끼니를 이어가는 식이다. 그날 저녁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을 내왔는데, 손님이라고 대접받은 음식은 밥 한공기, 물 그리고 죽순과 소금만 넣은 국이 전부였다. 

그들이 낮에 산으로 일하러 갈 때 점심 바구니에 맨밥에 소금뿐이었던걸 보면, 그나마 나는 손님으로 대접을 후하게 받은 것이었다.

 
이 마을에 먹을게 없다는 걸 다시 볼수 있는 에피소드로, 그 다음날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해 사람들이 안보이는 숲으로 들어가, 용변을 급히 보는데, 저쪽 옆에서 갑자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사람인가 싶어 쳐다보니, 흑돼지 한마리가,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왜 저 돼지가 재수없게 쳐다보지 하면서, 돌을 던지는데, 돌을 정통으로 머리에 맞아도 물러나기는커녕, 슬슬 더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용변이고 뭐고, 놀라서, 급히 처리하고 걸어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로 가서 맛있게, 그것을 먹어치웟다.

 
 
그날 오전, 이 사람들의 험한 삶을 뒤로하고 나는 또 다른 마을로 떠나게 되었다. 그때즈음, 다음 마을을 가기 전에 나는 몽골에서 잠시 만났던 Canadian Tom을 재회하게 된다. 당시 방콕에 보금자리를 잡고 있던 Tom과는 몽골이후 종종 연락을 했었는데, 내가 오토바이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더니, 잠깐이라도 같이 여행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tom과는 내가 여행하고 있던 근처 큰 읍내에서 재회를 하고, tom이 탈만한 스쿠터도 하나 빌렸다. 렌트라는 개념이 없던 곳이라, 조금 비싸게 빌리긴 했지만, 같이 다니는 즐거움은 돈에 비할게 못되었다.



 
 
Tom과 같이 며칠 같이 여행하는 동안 나는 제 2의 마을에서 묵게 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첫번째 마을에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두번째 마을에서는 마을 어른의 허락을 쉽게 얻어냈다. 잠자리도 첫 번째 잤던 곳보다 좀 더 편했다.

첫번째 마을은 물을 매일 길어오는 곳이라, 마실 물 부탁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이 마을에는 공용 수도꼭지가 하나 있어, 깜깜한 밤에 발가벗고 가서 며칠 못한 샤워도 할 수 있었다.

키가 180이 넘는 TOM이 조그만 수도꼭지 앞에서 발가벗고 비누로 몸을 씻어대는걸 보니, 웃겼지만, 본인은 꽤 만족한 미소로 돌아오며, 비누를 넘겨주었다.

 
도착한 날은 마을의 애들과 사탕도 나눠주고 놀아주기도 하며 지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의료의 혜택을 못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발에 조그만 상처가 곪아 종아리가 땡땡 부은 소녀를 보았는데, 몇번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병원으로 가야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어른들을 설득해 소녀를 병원으로 옮겨줄 수도 없는 상황에 마음이 아팠다. 그저 갖고 있던 소독약과 솜만 전달하고 와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긴급 진료소를 혼자 지키고 있던 몽족 의사인 yaher에게 소녀의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밤에는 이 산골의 적막과 군불때는 냄새를 맡으며 마을 어른들과 그리고 Tom과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Tom이 자기도 여행을 많이 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며,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준 내게 고맙다고 했다. 내게 고마워할게 아니라, 이렇게 이방인을 의심없이 환대 해준 이 산골사람들에게 고마워 해야할 일이었다.

다음날 Tom과 나는 몇 마을을 같이 지나치다, Tom은 스쿠터를 반납하고 도시로 가는 버스에 올랐고, 나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왔던 길에 첫번째 머물렀던 마을에 들러 무엇보다 먼저, 아팠던 그 여인집으로 찾아가 보았다, 사내는 숲에 일 나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여인 혼자 갓난애를 데리고 집에 있는데, 몸이 많이 호전되어, 이제는 밝게 웃어준다. 몇십분 기다리니, 땀이 범벅이 된 사내가 밝게 웃으며 반긴다. 아내가 이제 괜찮냐고 물으니, 손짓으로 많이 좋아졌다는 표현을 한다.

속으로 다행이다. 큰병이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몇번을 말했는지 모른다.

그날밤 나는 반 수화로 얘기하긴 하지만, 이 사내와 이런저런 얘기도 하며, 또 이집에서 하루밤을 신세지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나서 제일 가까운 읍내까지 왔는데, 게스트하우스에 밤에 짐을 푸는 순간 “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밤에 혹시 모르니까, 아내가 또 열이나고 아프면 쓰라고 해열제를 꺼냈는데, 내가 들고 다니던 전체 약통을 통째로 두고 온 것이었다. 꼬박 6시간을 산길을 내려왔는데, 어쩔수 없었다. 약통에 있는 약을 모르고 먹으면 안될터. 날이 밝자마자 다시 6시간을 달려 그 마을에 다다랐다.마을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내가 마치 옆 마을 정도에 갔다온 줄 생각하는 모양이다. 

숲에 일 나간 사내를 한 시간여 기다리니, 사내가 내가 무었 때문에 왔는지 벌써 알고 있었다.집에 가니 내가 잃어버린 약통을 누가 손댈까, 천정에 소중하게 모셔놓았었다.
혹시나 약이 귀한 곳이라, 무슨약인지 잘 모르면서, 약을 몇 개 빼거나 먹지는 않았을까, 하나하나확인을 해보는데, 다행히도, 그런 의심을 한 내 자신이 초라할 만큼 약은 그대로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어 간단한 인사로 고맙다는 표시를 한 후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오는 길은 너무나 피곤했다. 비포장 산길을 몇 시간씩 충격흡수도 안되는 구식 오토바이를 타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알 것이다. 그날 이후로 며칠간 엄청난 몸살로 게스트하우스 밖을 못나가고 약만먹고 방에 누워있었다. 하지만, 몸살을 앓고도, 흐뭇한건 내가 그동안 접해지 못했던 또다른 세상을 길에서 만났다는 것, 그 세상에는 우리가 가진 문명의 혜택이란걸 받지 못하면서도, 누구를 시기하거나, 욕심부리지 않고, 그들만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오히려 내게 스승이 되어 가르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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