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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미국

미국 뉴욕 : 현실과 환상의 경계… 예술은 위대한 정신병자들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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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경계… 예술은 위대한 정신병자들의 세계다?

작가에게 자신이 쓴 원고의 대부분을 버려야 할 때만큼 뼈아픈 순간이 있을까.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 공포는 마음을 두 갈래로 분리시키는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를 일으킨다. 어떻게든 남아 있는 원고를 살리겠다는 감성과 냉정하고 차분하게 원고를 모두 절단한 후, 잘못된 지점을 교정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이성은 엄청난 파열음을 불러일으키며 충돌한다. 

고층 건물이 즐비한 뉴욕 맨해튼에는 미래의 예술가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지난 일요일, 600매 정도 쓴 원고의 대부분을 버려야 한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다. 반쯤 넋이 나간 채 나는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텔레비전을 켰다. 검은 옷을 입은 이소라가 의자에 앉아 어깨를 수그린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날 찾지 말아줘. 나의 슬픔 가려줘. 구름 뒤에 너를 숨겨 빛을 닫아줘." 어쿠스틱 기타가 베이스로 깔리는 그 참혹하고 어두운 노래는 아일랜드 가수 '크랜베리스'의 검은 그림자를 연상시켰다. 이전과 다른 이소라의 목소리는 늑골을 파고들며 짙은 슬픔을 낙인처럼 새기고 있었다.

그 기괴한 노래의 원곡은 놀랍게도 보아의 발랄한 댄스곡 'NO.1'이었다. 원곡과 전혀 다른 새로운 버전의 'NO.1'은 마치 분열된 두 개의 자아를 보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누군가 이 곡을 새롭게 해석한 이소라에게 '흑마법사'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고성에 앉아 검은 망토를 흩날리며 슬픔을 짓이겨 부른 괴기의 노래라는 것이다.

발레 영화 '블랙스완' 속에 등장하는 '백조의 호수'는 두 개의 자아를 한 사람이 연기해야 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백조와 흑조,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연기해야 하는 주인공은 그러므로 혹독한 자아분열을 겪는다. 스스로 완벽해지길 원하는 뉴욕시티발레단의 '니나'는 그렇게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새로운 도전에 점점 자신의 몸이 '흑조'가 되어가는 망상에 시달린다.

어린아이처럼 오르골을 올려놔야 잠을 자고, 귀여운 인형을 모으며, 엄마의 '예쁜 딸'일 뿐인 니나. 그녀는 청순한 백조 연기는 완벽하지만 흑조가 가진 악마적인 섹슈얼리티를 전혀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토마스'의 지적 때문에 괴로워한다. "네 춤은 꼭 불감증에 걸린 것 같아"라는 그의 말이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예술가로서의 영혼을 뒤흔든 것이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녀는 자유롭고 성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발레단 단원 '릴리'를 질투한다. 흑조가 가진 섹슈얼리티를 기술로 습득해야 하는 그녀에겐 그것을 천성적으로 타고 난 릴리가 넘기 힘든 장벽이나 참을 수 없는 자신의 것을 기어이 빼앗을 경쟁자로 느껴지는 것이다.

발레는 높이의 예술이다. 누가 더 많이 뛰고, 누가 더 많이 도느냐로 날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불가능의 예술이기도 하다. 이 기형의 예술을 완벽히 소화해내기 위해 발레리나는 관절을 틀고, 단단한 뼈를 조금씩 열어가는 기괴한 통증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 완벽함에 대한 욕망과 뒤틀린 관절의 대비, 이 심리적 풍경은 지구에서 예술가들이 가장 많다는 뉴욕의 심장부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또 '니나'의 오른쪽 어깨 상처가 자꾸만 부풀고, 그 안에서 기어이 가시가 나오고, 마침내 흑조의 검은 날개가 돋아나는 과정은 소녀의 관자놀이에서 거미가 나오는 '레몽 장'의 소설 '벨라 B의 환상'을 연상시킨다.

뉴욕은 예술가들의 도시다. 밥을 먹다가 '로버트 드니로'와 마주치거나, 카페에서 '스칼렛 요한슨'과 함께 줄 서 있기도 한 곳이 뉴욕이다. 그곳에 사는 뉴요커들이 요란하게 사인을 받는 대신 쿨한 얼굴로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건, 평범해 보이는 동네 카페와 레스토랑의 점원들 역시 미래의 뮤지컬 배우이거나 화가이고, 거리의 연주자들이나 청소부도 오디션을 준비하는 미래의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유브 갓 메일'의 주인공 캐서린은 뉴욕의 지하철에서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는 나비를 보았다는 말로 러브레터를 작성한다. '블랙스완'의 니나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또 다른 자신의 그림자(데자뷰)와 마주친다. 뉴욕의 지하철은 이렇듯 '로맨틱 코미디'와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의 간격만큼이나 다르다. 말하자면 '블랙스완'은 예술가들의 도시인 뉴욕의 신경증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 위에서 보여준다.

니나가 걸어가는 링컨센터 맞은편에는 음악 천재들의 산실 줄리아드가 있다. 유명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과 뉴욕시티 발레단의 공연장이 함께 있는 이 거대한 예술의 전당은 장엄한 위용과 다르게 예술가들의 내면 풍경과 덧대어지면 왜곡되어진다. 문득 루게릭 환자 역할에 몰입했던 어느 영화배우의 말이 섬뜩하게 떠올랐다. 

만약 자신이 암에 걸린다면, 암 환자 역할을 가장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공연이 끝나고, 마침내 흑조가 되어버린 니나의 마지막 말도 그런 것이었다. "It was perfect." 그러므로 예술은 위대한 정신병자들의 세계다. 600매의 원고를 쓰는 데 100일이 걸리고, 그것을 전부 지우는 데 1초의 시간이 걸리는 세계. 나는 600매의 원고에 검은 블록을 씌웠다. 그리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1초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블랙스완: 나탈리 포트만, 뱅상 카셀 주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분열'을 원작으로 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작품이다. 뉴욕시티 발레단의 '니나'가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으로 발탁되면서 생기는 내면적 갈등을 심리 스릴러 형식으로 다뤘다. 

자신의 몸이 점점 흑조로 변형되어가는 기괴한 꿈에 시달리는 '니나' 역할로 나탈리 포트만은 2011년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나탈리 포트만은 이 영화의 발레를 지도하던 뉴욕시티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벤자민 마일피드와 사랑에 빠지며 약혼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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