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더 가까운 '쓰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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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타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아소만. 쓰시마를 통틀어 최고 절경이다. /최보식 기자
직업적 관심 때문에 나는 쓰시마(對馬島)를 가보고 싶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사흘 뒤 이승만 대통령이 첫 기자회견에서 꺼낸 게 '대마도 반환' 요구였다. 이듬해 연두 회견과 연말 회견에서도 "대마도는 우리의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것. 일본이 아무리 주장해도 '역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역사의 증표란 조선 후기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 같은 것이다. '백두산은 머리, 대관령은 척추, 영남의 대마와 호남의 탐라를 양발로 삼다(以白山爲頭 大嶺爲脊 嶺南之對馬 湖南之耽羅 爲兩趾)'라고 영토를 정의했으니까. 하지만 이승만의 야심 찬 '대마도 카드'는 6·25 발발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 쓰시마에는 일본의 육·해·공 자위대가 배치돼있다.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쓰시마의 이즈하라(嚴源) 항구까지 2시간 남짓 걸렸다. 산과 바다에 둘러싸인 이즈하라의 첫인상은 움직임이 멈춘 정물(靜物) 같았다. 시내에서는 돌아다니는 주민도 안 보였다. 초여름 햇볕 속의 소도시는 너무 적요해,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 여행 동기가 됐던 '역사(歷史)'는 이런 풍경 앞에서 증발할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서 차로 5분 거리, 언덕배기에 있는 쓰시마대아호텔에 짐을 풀었다. 쓰시마에서 가장 현대적이라는, 지은 지 14년 된 이 호텔에는 냉장고가 없었다. 방음(防音)이 안 됐다. 바깥에서 하는 대화가 침대맡에서 들리는 듯했다. 모바일 전화도 안 터졌다. 처음에는 불편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핍과 간소함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쓰시마 홍보 포스터에는 '유(癒·힐링)'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호텔 뒤편 해안 절벽에는 잔디 공원이 조성돼 있었다. 느릿느릿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밤에는 배의 불빛과 창공의 별을 보고, 새벽에는 바다 피부를 뚫고 나오는 선혈(鮮血)의 해를 볼 수 있었다.

제주도 면적의 절반도 안 되는 쓰시마는 89%가 산(山)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빼면 모두 삼나무·측백나무·밤나무 등이 군락을 이룬 원시림의 산이라고 보면 된다. 그 사이를 파고든 산길은 좁고 가파르다. 전(全) 구역에서 차량 제한 속도는 시속 40㎞(간혹 5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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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이 바닷속에 잠겨 있는 와타즈미 신사.
첫날 오후에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화강암 계곡인 아유모도시(鮎もどし·은어가 돌아온다는 뜻) 자연공원을 거쳐, 최남단 쓰쓰자키(豆酸崎)에 닿았다. 절벽 아래로 청색 바다에 허연 포말(泡沫)이 부서졌다. 내려오는 한류와 올라가는 난류가 여기서 충돌한다. 해변인데 갈매기는 보이지 않고, 대신 솔개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저녁에는 쓰시마의 전통식인 '이시야키(石燒)'를 먹었다. 돌판에 양념한 생선 등을 구워 먹는 것인데, 한때 우리가 돌판에 삼겹살을 구워 먹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1인당 2700엔이다. 저녁을 먹고 나와 시내 골목을 걸으니 불 꺼진 업소가 대부분이었고 여전히 행인은 보이지 않았다.

쓰시마 인구는 약 3만3000명. 이 중 1만6000여 명이 이즈하라 부근에 산다. 섬에는 대학교와 공장이 없다. 여기 청춘(靑春)들은 고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본토로 떠난다. 섬은 점점 고령화되고 있다. 쓰시마의 존재는 우리에게만 강렬할 뿐, 일본에서는 단지 숱한 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본토인들이 여기까지 여행 오는 일은 거의 없다. 쓰시마에서 거리를 활보하는 일군(一群)의 무리가 있으면 어김없이 한국 관광객이다.

둘째 날, '일본의 해변 100선(選)'에 선정된 미우다(三宇田)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도 일본인은 없었다. 스물댓 명의 한국 소녀들뿐이었다. 수학여행을 온 전남 벌교여고 1학년생이었다. 개인당 7만원을 내고, 학교재단 이사진이 재정 지원을 해서 3박 4일간 왔다고 했다. 쓰시마가 이렇게 올 수도 있는 곳이구나. 학생들은 새벽에 벌교 집을 나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오전에 쓰시마의 북쪽 항구인 히타카쓰(比田勝)로 들어왔다. 뱃길은 49.5㎞, 여객선으로 1시간 거리였다.

쓰시마의 관광 코스는 대부분 높은 전망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산과 산으로 중첩돼 있어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가야 '풍경(風景)'이 열리기 때문이다. 러시아 발틱 함대를 격파한 쓰시마 해전(1905년)의 전망대도 해안 절벽에 만들어 놓았다. 발틱 함대는 대서양과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거의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이곳까지 싸우러 왔다. 이미 파멸이 예상됐던 것이다. 하지만 저 출렁거리는 앞바다에 무슨 전투 흔적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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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와 상점에는 대부분 한글이 병기돼 있다.
기념탑에는 부상당한 채 포로가 된 러시아 제독 로제스트벤스키의 병실을 방문한 도고 헤이하치로(東�平八郞) 제독의 모습을 새겨놓았다. 군복 차림의 도고 제독은 내려다보고, 환자복을 입은 로제스트벤스키는 침대에 앉아 있다. 이 장면에 대해 '평화(平和)' '우호(友好)'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용어(用語)는 자신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선택된다.

쓰시마를 통틀어 최고의 경관(景觀)을 볼 수 있는 지점은 에보시타게(烏帽子岳) 전망대다. 거기에 올라섰을 때 초록 무덤 같은 섬들이 푸른 바다(아소만·淺茅灣) 위에 흘러갈 것처럼 둥둥 떠 있었다. 신의 솜씨 중에서도 가히 으뜸이었다.

이 전망대에서 조금 내려오면 와타즈미(和都多美) 신사가 있다. 신사 입구에 있는 기둥 문(門)인 '도리이(鳥居)'가 다섯 개다. 그 중 두 쌍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왜 문을 바다에 세웠을까. 누구를 향한 문일까. 바다 너머 누구를 불러들이려는 걸까. 그 누구에게로 가려는 걸까. 신비함은 아름다움의 격조를 높인다.

귀국하는 셋째 날에는 이즈하라 시내를 걸었다. 정조의 '화성(華城) 행차도'를 벽에 새겨놓은 청계천처럼, 이곳 시내에는 '조선통신사 행렬도'를 새겨놓은 수로가 있다. '통신(通信)'은 믿음(信)을 서로 통하게 한다는 뜻이다. 한 번 여정(旅程)에 1년~1년 반이 걸렸던 조선통신사의 첫 도착지가 쓰시마였다. 이 때문에 쓰시마에서는 8월에 '아리랑 마쓰리(祭り)'라는 조선통신사 축제가 열렸다. 하지만 2013년 쓰시마의 어느 신사 '불상 도난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으로 밝혀지면서 축제는 2년간 중단됐다. 작년에 재개됐으나 '아리랑 마쓰리'는 '미나토(港) 마쓰리'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섬에서 우리의 '역사'를 찾으려고 하면 여행 일정이 숨 가쁠 것이다. 한말(韓末) 의병을 일으켰던 74세의 유생 최익현(崔益鉉)이 옥사한 곳, 쓰시마 도주와 결혼한 고종(高宗)의 고명딸 덕혜옹주의 비극적 삶…. 그런 관심에서 다들 배를 타고 건너오지만, 막상 이 섬에 하루만 머물러도 인간의 역사 대신 '자연(自然)'에 둘러싸일 것이다. 아주 나른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젖어들면서.

쓰시마 개념도
쓰시마는 바다낚시나 등산을 즐기는 이들에게 매력적이다. 특정 목적이 없으면 단체 상품을 택하는 게 무난하다.

쓰시마에는 음식점이 많지 않고 수준은 높지 않다. 추천을 받아 2박 3일간 필자가 찾아간 음식점은 다음과 같다.

쓰시마대아호텔에서 5분 거리에 있는 ‘うどん茶屋(우동차야)’, 이즈하라 시내에서 이시야키(石燒)를 하는 ‘千兩(센료)’, 회전 초밥 가게인 ‘すし屋(스시야)’, 사스나 지역에 있는 메밀국수 집 ‘そば道場(소바도조)’.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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