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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의 여름 - 독특한 여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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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그린란드의 퓨전 계절

이상한 여름이다. 바다 위엔 여전히 빙산이 떠있고 이따금 눈발도 날리는데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다. 땅은 겨울을 부여잡고 있지만 하늘은 아랑곳없이 여름을 내려 보내고 있다. 여름과 겨울이 뒤섞인 북극권의 퓨전 계절, 그 한가운데에서 나는 오늘도 모기떼에 쫓기고 있다. 만일 당신이 유난히 모기에 잘 물리는 체질이라면 여름에 그린란드를 찾는 일만큼은 꼭 피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린란드의 여름 중 기온이 가장 높은 한 달 동안은 그 누구도 북극모기떼의 습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기약을 아무리 뿌려도 소용없다. 전속력으로 달려 봐도, 데굴데굴 굴러 봐도 깨알 같은 모기떼는 공기처럼 여전히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잘못해서 숨을 크게 들이쉬기라도 하면 한입 가득 모기떼를 삼키게 된다.

빙하가 녹으면서 만들어진 천연 수영장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다.

더위에 지친 개들은 시원한 바위를 찾아 하루 종일 죽은 듯이 잠들어있다. 그 위로 새카만 모기떼가 광란의 포식을 즐기고 있지만 개들은 이미 저항을 포기해버린 것 같다. 모기 때문에 가만히 서 있기도 어려울 지경인데 정작 이곳 주민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아이들은 반팔 옷을 입은 채 신나게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이 계절에만 집중적으로 열리는 온갖 축제들을 준비하느라 흥겹기만 하다.

여름 한 철, 그린란드의 ‘그린’을 볼 수 있다.

더위에 지친 썰매개가 바위 위에 늘어져 있다.

밤 11시경 백야 풍경을 찍으려고 나섰다가 스포츠센터 옆 강당 건물에서 파티 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오늘이 ‘Lady’s Night’이라서 4명의 일루리사트 여가수들이 콘서트를 연다고 한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자 별천지 풍경이 펼쳐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맥주잔을 든 채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린란드에 와서 이렇게 흥겨운 분위기는 처음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반갑게 말을 걸고 맥주를 권했다. 인구 5천 명, 바다와 빙하로 둘러싸인 이 마을 주민들은 이런 식으로 최대한 여름 한 철을 즐긴다. 새벽 2시쯤 행사가 끝나고 다들 맥주를 든 채 뿔뿔이 흩어졌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무리들 중에는 열 살 남짓한 꼬마들도 눈에 띄었다. 이거 참, 낯설어도 한참 낯선 풍경이다.

그린란드에서는 일 년 중 해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자 최대 국경일인 하지(6월 21일)부터 7월 말까지 약 한 달 동안 대부분의 축제와 행사들을 몰아서 치른다. 하지가 되면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통복장으로 갈아입고 산으로 올라가 기념식을 거행한다. 백야라 잘 보이지 않는데도 불꽃놀이를 하고 축포도 쏘아 올리며 하루 종일 음악과 춤이 끊이지 않는다. 축구 여름리그와 마라톤 대회, 비치발리볼 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지도와 나침반만 가지고 좌표를 찾는 크로스컨트리 경기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도 인기가 최고다. 현지인뿐만 아니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온 60세 이상의 노부부들까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우승자에게는 협찬사들이 내놓은 접시, 머그컵, 배낭 같은 상품들이 주어진다. 최고 기온 22도까지 올라가는 일루리사트의 여름, 꽃들이 서둘러 피고 지는 이 짧은 기간 동안 사람들 역시 꽃처럼 분주히 계절을 누리는 것이다.

마라톤 대회, 역주하는 참가자

오리엔티어링, 출발을 기다리는 참가자들

이누이트 가족의 피크닉

여름이 절정에 달하는 이 시기에 일루리사트 사람들은 대부분 휴가나 소풍을 떠난다. 인근의 아시아트나 시시미우트, 혹은 누크로 짧은 소풍을 다녀오는가 하면 멀리 프랑스나 태국, 덴마크로 떠나는 사람도 있다. 여름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전에 물개사냥을 함께 했던 리니의 배를 얻어 타고 30분 거리에 있는 오카추트를 찾았다. 50여 가구의 작은 해안마을이지만 시즌이 시즌인지라 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어린 손자 손녀들까지 우르르 해변으로 몰려나와 연신 그물을 끌어 올리고 있다. 그 안에는 꽁치처럼 생긴 물고기가 그물이 터질 정도로 가득하다. 이것이 바로 그린란드의 여름 명물 중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물고기 ‘아마사끄’다. 여름이 되면 산란기를 맞아 바위틈에서 수정을 하기 위해 수백만 마리의 아마사끄가 빽빽이 몰려든다. 그냥 뜰채로 건져 올려도 한 번에 백여 마리쯤 담길 정도다. 그렇게 잡아 올린 아마사끄를 사람들은 내장도 안 뺀 채 그대로 바위 위에 널어 하루 종일 말린다. 손바닥 크기의 아마사끄를 수만 마리나 말리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말린 아마사끄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식량이 되지만, 사료보다 가볍고 영양도 풍부하기 때문에 겨울철 썰매개들의 양식으로 아주 그만이란다.

산란을 위해 해안가로 몰려든 아마사끄 떼

바닷가 주변에는 가족 단위로 바위 절벽에 텐트를 치고 바비큐를 굽고 있다. 땔감은 극지방 특유의 키 낮은 식물뿌리인데 연기가 어찌나 많이 나는지 모든 음식이 훈제로 요리될 정도다. 또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멀리 하얀 빙산을 배경 삼아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빙하에서 녹아 내린 1급 청정수가 바위 사이에 고여 천연 호수가 되었으니, 아마 지상 최고의 수영장이 아닐까 싶다. 한나절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참 평화롭고 한가로운 그린란드의 전형적인 여름 풍경이다.


위대한 유산, 그린란드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오. 눈과 빙산으로 뒤덮인 이 아름다운 땅을.” 와각이 말했다.


그는 시시미우트 출신으로 6년 째 일루리사트에서 살고 있는 54세의 페인트 공이다. 25년 전 배를 타고 가다가 빙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아내와 아들을 잃은 아픈 기억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나라의 자연을 사랑한다고 한다.

“빙산이 무너진 건 혹시 지구온난화와도 관련이 있을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소.”


그러더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예전보다 기온이 올라서 떨어져 나오는 빙산의 양이 많은 건 사실이오만 그게 꼭 지구온난화 때문이겠소? 어쩌면 지구의 기온이 주기적으로 변하면서 지금 ‘더운 시기’를 지나는 것인지도 모르지.”

다른 그린란드 사람들처럼 그 역시 지구온난화와 그린란드를 함께 묶어서 말하는 것에 약간의 반감을 갖고 있었다. 세계는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고 있는데 정작 이곳 사람들은 온난화의 혜택을 누리는 것처럼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부담감 때문인 것 같다.

“세상 어디나 때가 되면 기후가 변하기 마련이고, 또 기후에 따라서 모든 게 바뀌기도 하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변해가는 환경에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이오.”

그의 말처럼 그린란드는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남쪽 지방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생겨나고, 빙하가 녹으면서 광산자원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석유와 금, 다이아몬드를 찾아 세계의 다국적 기업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런 시기에 젊은 세대들이 그린란드의 자연을 지혜롭게 지켜줬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오.”

일루리사트 해변에서 여름 낚시를 즐기는 관광객

기후 변화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름이 점점 길어지고 더운 날이 많아지면서 그린란드의 어느 곳에서는 전에 없던 풍요를 누리기도 하지만, 수많은 빙산과 유빙들 때문에 어부들의 조업일수는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 적잖이 당황해 하면서도 이들은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듯이 이 새로운 환경에 하루하루 적응해가고 있다. 그린란드에 와서 빙산만 보고 간다면 누구나 지구온난화를 얘기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한숨과 희망을 보게 된다면 지구온난화가 아닌 ‘적응하는 인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담담하게 그린란드의 자연과 미래를 이야기해주고 있는 일루리사트 친구 와각

녹아내린 내륙빙하에서의 재회

6월의 일루리사트를 뒤로 하고 2차 에어드롭을 위해 북쪽 마을 우마나끄로 향했다. 예정대로라면 북위 70도 59분 지점에서 탐험대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밤 10시 20분에 일루리사트 항을 출발한 배는 안개 자욱한 빙산의 바다를 밤새 가로질러 새벽 5시 30분경에야 우마나끄 항에 도착했다. 오전 11시, 현지에서 구한 헬기에 짐을 싣고 곧장 이륙했다. 바다 위에서 조심스럽게 떠오른 헬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자 엄청난 풍경이 펼쳐졌다. 구름 위로 솟아난 우마나끄 마운틴과 해안가의 산맥들, 그 아래로 호수와 빙하가 그림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나마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이 모든 행운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오후 1시 03분, 하얀 설원 위에서 탐험대를 발견한 뒤 헬기를 착륙시켰다. 다들 새까맣게 탄 얼굴로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대원들과 썰매개들이 그새 얼마나 야위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짐 보따리를 털썩 내려놓고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원들도 썰매개들도 엄청나게 고생을 한 것 같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단단하게 얼어서 눈으로 덮여 있을 줄 알았던 내륙빙하가 기온 상승으로 인해 얼음 슬러지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수백 km에 달하는 슬러지를 탈출하기 위해 대원들은 고도를 높였지만, 오히려 고도가 높아지는 바람에 개들이 고소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1차 에어드롭 이후 보름여가 지나는 동안 대원들에게도 썰매개들에게도 정말 고난의 행군이었던 것이다.

기온상승으로 생겨난 내륙빙하의 빙천과 호수

탐험대가 수없이 건너온 얼음 크레바스

“내륙빙하가 이렇게 다 녹아내리면 일루리사트도 금방 다 잠길 것 같더라.” 슬러지를 빠져나온 무용담을 한참 늘어놓던 정동영 대원이 끝으로 한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구온난화는 단순히 그린란드 해변 마을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만년설로 덮여 있는 저 깊은 내륙빙하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린란드의 여름은 눈으로 덮여 있지만 그 눈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고 있다. 지금처럼 해빙이 계속 진행된다면 우리처럼 개썰매로 내륙빙하를 탐험하는 것은 앞으로 더 이상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탐험을 할 수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랴. 이곳 사람들은 기후의 변화,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고, 지금보다 추웠던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더 더워질 미래에도 여전히 그린란드 이누이트로서 굳건히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이 탐험에서 정말로 배우고 기록해야 할 것은 기후변화의 데이터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에 맞서서 적응하고 극복해나가는 이누이트들의 삶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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