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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 : 썰매개의 나라 - 100년 전 탐험 방식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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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그는 별을 향하여 코를 쳐들고 늑대처럼 길게 울었다. 죽어서 먼지가 된 그의 조상들이 하던 행동이었다. 별을 향해 코를 쳐들고 길게 우는 조상의 소리는 몇 세기를 거쳐 그의 몸 안에 잠재해 있던 선율이었다. 그리고 그의 선율은 슬픔을 알리던 조상들의 것이었고, 그들에게 적막과 추위와 어둠을 의미했다.

- 잭 런던 作 [야성의 부름(Call of the wild)] 중에서

태어난 지 한 달 된 그린란드 개. 멀리 아득히 펼쳐진 빙원을 바라보고 있다. 다가올 썰매개의 운명을 이 녀석은 과연 알고 있을까.

100년 전 탐험 방식 그대로

일루리사트에는 북유럽의 영웅인 크누트 라스무센의 생가가 있다. ‘에스키모 연구의 아버지(father of Eskimology)’라 불리는 라스무센은 개썰매로 북서항로를 탐험한 최초의 유럽인이다.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모두 7차례의 북극 대탐험에 성공했으며 그것을 모두 기록으로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라스무센의 생가는 지금 박물관으로 남아 당시의 원정 기록과 여러 도구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곰 가죽과 털로 만들어진 무거운 침낭은 영하 100도에서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한 세기 전에 쓰이던 버너와 썰매, 박제된 썰매개들도 전시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장비들로 그런 탐험을 할 수 있었을까?’ 아문센과 스코트, 섀클턴, 그리고 라스무센까지, 소위 ‘탐험의 영웅시대’라 불리던 그 시절의 탐험이란, 말 그대로 인간과 자연의 거짓 없는 한 판 승부였을 것이다.

“나에게 겨울과 썰매개를 달라.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 크누드 라스무센(Knud Rasmussen, 1879~1933)

라스무센이 일곱 번의 북극 원정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썰매개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긴 이누이트의 나라가 아니라 썰매개의 나라야.” 그린란드에서 알게 된 동갑내기 친구 칼(Karl Peter)이 말했다. 지구상의 다른 지역에서는 개가 없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지만, 이곳 그린란드의 북극권에서는 개와 인간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수천 년 전부터 그린란드의 이누이트들은 썰매개와 공생해왔다. 개들은 혹한의 빙원에서 인간의 발이 되어주었고, 인간은 개들에게 먹이와 잠잘 곳을 마련해주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을 극복해야 했던 이누이트 사냥꾼들은 오로지 개들의 생존력과 야성의 본능에 의지해왔다. 썰매개들은 거센 눈 폭풍과 블리자드 속에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으며, 특유의 동물적 감각으로 위험한 크레바스나 얇은 얼음을 피할 수 있었다.

개썰매 훈련 도중 스노모빌을 타고 오는 현지인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줄에 묶인 채 서열 싸움을 하고 있는 썰매개들. 이 치열한 싸움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이누이트들은 스노모빌이 아닌 개썰매를 최고의 운송수단으로 꼽는다. 스노모빌은 기름이 떨어지거나 고장이 나면 조난으로 이어지지만 썰매개는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연료, 즉 야성의 생존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북극의 얼음이 다 녹아내려 그린란드의 지형이 바뀌지 않는 한 개썰매는 영원히 눈 덮인 벌판을 달릴 것이다.

우리의 이번 원정은 100년 전 라스무센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장비 없이 오직 개썰매만으로 그린란드 북극권을 종단하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시시각각 얼음이 녹아내리는 지금, 우리 탐험대가 성공적으로 원정을 마친다면 아마 역사상 마지막 개썰매 원정팀으로 기록될 지도 모른다.


죽거나 혹은 존중받거나

그린란드 북극권에는 애완견이 없다. 북위 66도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오로지 썰매개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린란드 썰매개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다른 어떤 개들도 북극권을 넘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북극권(Artic Circle)의 도도한 경계선 위에 있는 개들만이 썰매개로 성장할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실제로 썰매를 끌 수 있는 영광은 오직 최후의 생존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오늘도 숙소 앞 설원에서는 썰매개들이 울고 있다. 이들은 경박하게 짖지 않고 그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잔뜩 치켜든 채 늑대처럼 길게 울부짖는다. 개들 중에서 늑대와 가장 가까운 종으로 혹한의 북극지방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진화해온 까닭에 이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한 개’로 인정받고 있다.

날씨가 따듯해지면서 눈이 녹고 군데군데 마른 풀이 돋아나면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그린란드의 북극권에서 사는 개들은 ‘살아남은 개’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태어나서 6개월이라는 1차 생존 기간을 기적적으로 통과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한 달 반가량은 어미젖을 먹으면서 크고 그 이후부터는 사람이 던져주는 사료나 넙치를 받아먹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여야 한다.

썰매개들이 물개 고기를 먹고 있다. 영예로운 썰매개들에게만 주어지는 최고의 먹이이다.

개들 간의 서열 싸움은 냉혹하기 짝이 없다. 강한 놈이 으르렁거리며 위협을 가하면 약한 녀석들은 무조건 바닥에 드러누워 네 다리를 하늘로 뻗은 채 세상에서 가장 비굴한 모습으로 낑낑 울어댄다. 철저하게 복종한다는 뜻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인정받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그 자세로 누워있다. 그래야 죽지 않는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어린 개들은 20여 마리의 사나운 성견들이 벌이는 먹이 경쟁에 낄 수조차 없다. 어쩌다 경쟁의 틈바구니로 들어갔다가 물려 죽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간혹 경계선 밖으로 툭 튀어나오는 사료 부스러기만이 어린 개들의 유일한 먹이가 된다.

그렇게 처음엔 어미 곁에서, 그 다음엔 무리 속에서 커가며 힘을 얻게 되면 행동반경이 점차 넓어지기 시작한다. 도로를 넘어 다른 마을까지 혼자 돌아다니며 알아서 먹이를 구하는 것이다. 사나운 개들의 기습을 피해가며 굶어 죽지 않고 6개월을 살아낸 녀석들만이 비로소 줄에 묶이게 된다. 6개월이란 시간은 개의 송곳니가 사람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는 기간이기도 하다. 줄에 묶이는 순간부터 이 개들에게는 안정적으로 먹이를 공급받을 기회와 훗날 썰매를 끌 수 있는 가능성이 동시에 주어진다.

그린란드의 썰매개들은 애완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죽거나 혹은 존중 받을 뿐이다. 시시각각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6개월을 넘긴 뒤 다시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소수의 썰매개들만이 그린란드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이다.

가장 강한 자만이 썰매를 끌 수 있다

6개월을 넘긴 개들은 모두 훈련을 받게 된다. 무거운 썰매를 끌고 긴 시간 동안 사냥을 떠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인과의 소통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썰매개들이 꼭 알아들어야 할 말은 ‘오른쪽, 왼쪽, 달려, 멈춰’ 이 네 마디이다. 아무리 강하고 우수하다 할지라도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개는 즉시 안락사에 처해지고 만다. 지옥훈련이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혹한의 날씨,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르는 블리자드, 그리고 뜻하지 않은 크레바스 등등 수많은 위험 속에서 개와 사람이 한 몸처럼 움직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잔혹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훈련을 모두 받아내고 마침내 썰매를 끌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면 개들은 그제야 비로소 주인으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게 된다.

최후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썰매개들은 사냥과 운송이라는 고유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썰매개들은 차가운 설원에 배를 깔고 하얀 지평선 끝에서 불어오는 극지의 바람을 덮고 잔다. 만일 당신이 그린란드의 빙판 위를 달리는 썰매개를 본다면 그들로부터 ‘위대한 생존’이 무엇인지 느끼게 될 것이다. 매순간 겹겹이 닥쳐오는 죽음의 위기를 모두 넘긴 뒤 당당하게 자신의 네 발로 만년설을 내달리는 썰매개들이야말로 그린란드의 자랑인 것이다. 인간과 더불어 5천 년의 세월 동안 세대를 거듭해오는 동안 가장 강한 자들만 살아남은 것이 바로 오늘날의 썰매개들이다. 그래서 그린란드 사람들은 지구상의 모든 개들 중에서도 오직 이곳의 썰매개들만이 최고의 정신력과 지능, 그리고 질긴 생존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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