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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포르투칼

포르투칼 리스본 : 바다를 향한 거대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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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을 바라보다, 리스본 예수상

거대한 남미 대륙에서 오직 브라질만이 포르투갈어를 쓰게 된 것은 서른 두 살 청년의 운, 혹은 비운 때문이었다.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1468~1520). 바스코 다 가마의 화려한 귀환 이후 후속 탐험대를 맡게 된 그는 열 세 척의 함선을 이끌고 1500년 3월 8일, 인도로 출발한다. 바스코 다 가마가 밟았던 항로 그대로 아프리카 연안에서 멀리 떨어져 무역풍을 타고 가던 그는 강풍으로 돌변한 바람 때문에 표류하게 되었다. 희망봉을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야 할 지점을 놓친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커다란 원뿔 모양의 산이었다. 육지가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곳에 있었던 대륙. 그가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니라 브라질이었다.


현재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두 산 정상에는 거대한 예수상이 자리잡고 있다. 포르투갈에게서 독립한지 1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세운 이 예수상은 그 거대한 규모로 여러 영화에서 위용을 자랑했다. 높이 38m, 양팔의 길이 28m, 무게 1,145톤. 높이 710미터의 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체감규모는 훨씬 더 크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 6년간 에이토르 다 실바 코스타(Heitor da Silva Costa)의 설계로 만들어진 이 예수상은 기단 내부에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도 갖추고 있다. 2007년에는 신 세계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지정되어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리스본에도 이와 비슷한 거대 예수상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테주강을 바라보고 브라질 예수상과 비슷한 포즈로 서 있는 이 예수상은 브라질 예수상 이후에 만들 어졌다. 자신들에게서 독립한 것을 기념해 만든 조각상을, 심지어 본따서 만들다니! 여하튼 기단 75m, 예수상 28m의 적지 않은 크기로 탑 내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테주강과 리스본의 전망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니, 나름대로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파두가 흐르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뮤지엄(Casa-Museu Amalia Rodrigues)

파두는 일종의 메아리다. 포르투갈에서 나아간 이들이 포르투갈로 가지고 돌아온 “포르투갈의 목소리”이다. 라틴어 ‘Fatum(숙명)’에서 유래했다는 포르투갈 전통 가요인 파두(Fado)는 주로 숙명과 좌절, 고난과 그리움을 노래한다. 포르투갈 전통의 기타반주에 맞춰 검은 망토를 걸친 여가수, 파디스따가 부르는 애절한 곡조의 파두는 전용 파두 클럽들을 통해 아직도 포르투갈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파두의 기원 중 가장 유력한 것은 18세기에 브라질로 이주해간 포르투갈인들이 즐기던 춤이었다는 것이다. 남미와 흑인 노예들의 음악이 포르투갈인들의 정서 속에 섞여들었다. 그것들을 선원들이 즐겨 부르게 되면서, 파두는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1840년 이후에는 춤은 남지 않았고 오직 노래만이 알파마나 바이루 알뚜 부근에 위치한 수많은 파두 클럽들을 채우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목소리”라는 찬사를 받은 이는 자타공인 파두의 여왕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이다. 오늘날의 파두를 만들고 전세계로 전파시킨 그녀가 1999년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포르투갈의 수상인 안토니우 구테레스는 3일간의 국장을 선포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두 앨범

빈민촌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행상과 재봉사를 전전하다가 밤무대 직업가수로 데뷔한 그녀. 데뷔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스타가 된 그녀의 목소리가 “포르투갈의 목소리”가 된 이유는, 노래 속에 영혼의 절규를 담았기 때문이다. 드넓은 바다를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온 노래, 파두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목소리 안에서 영혼을 얻었다. 그녀가 살던 집은 현재 작은 박물관이 되어, 파두에 흔들린 이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해양왕 엔리케의 눈으로 바다를 보다, 발견의 기념비

해양왕 엔리케


포르투갈이 바다를 향해 일찍이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땅은 좁고 바다를 접한 면적은 넓은 지리적 요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다는 벽이지만, 또한 가능성이기도 했다. 그 바다에 대한 열망을 직접 실천한 해양왕 엔리케 덕분에 유럽은 대항해시대의 막을 열었다.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1394~1460). 일찌감치 바다로 나아가야 함을 깨달은 그는 아버지의 밑에서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정복하고 그곳을 중계무역에 활용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포르투갈 남단의 알가르베 총독으로 간 그는 그곳에서 유럽 각국의 항해가, 천문학자, 조선공, 지도제작자를 초빙하여 여러 항해 기기를 개발하고 선박을 개량하며 아프리카를 탐험하고 더 넓은 바다를 탐했다. 마침내 적도를 넘어 세네갈에 도착한 그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카보 베르데, 기니 해안, 시에라리온까지 도달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발한 원정활동은 이후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드는데도 징검다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열다섯번이나 원정대를 꾸려 아프리카 남쪽에 있는 미지의 땅에 보냈던 그. 직접 항해에 나선 적은 없지만, “해양왕”이라는 그의 별칭은 과분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 해양왕 엔리케의 사후 500년을 기념하여 [발견의 탑]이 세워졌다. 그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났다는 바로 그 자리다.

항해중인 범선 ‘카라벨’의 모양을 한 이 기념비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뱃머리 맨 앞에 서 있는 이가 바로 해양왕 엔리케이다. 그 뒤를 바스코 다 가마, 서사시인 까몽이스, 그 외에도 많은 모험가와 천문학자, 선교사가 따르고 있다. 높이 53m로 위용을 자랑하는 발견 기념탑을 보느라 바닥을 놓치지는 말 것. 광장 내 대리석 바닥에는 전성기 당시 포르투갈이 지배하던 나라들을 표시한 세계전도가 있다.




바스코 다 가마 다리

애덤 스미스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해’를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바스코 다 가마의 행로는 말 그대로의 최초가 아니라 “유럽인으로서 최초”일 뿐이지만, 유럽이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로 진입한 시발점으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바스코 다 가마가 리스본을 출발한 것은 1497년 6월이었다. 그해 11월에 희망봉을 돌고, 인도 서해안의 캘리컷에 상륙한 것은 이듬해 5월 20일이었다. 항해 자체는 괴롭고 힘들기 그지 없었다. 괴혈병, 폭풍, 그리고 선상반란의 위협이 상존했다. 하지만 항해의 성과는 분명했다. 엄청난 양의 후추를 싣고 1499년 리스본으로 돌아온 그는 상상을 초월한 이익을 남기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왕실로부터 연금, 재산에 덧붙여 귀족의 지위까지 부여받은 그는 아직도 역사상에 탐험가의 대명사와 같이 굳건한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포르투갈의 입장에서만 “영웅”이었을 뿐이다. 1502년 다시 캘리컷에 간 그는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조각낸 신체들을 캘리컷의 왕 자모린에게 보내며 “카레를 만들라”고 비아냥거렸다. 도시를 파괴하고 무력으로 제압한 그는 포르투갈의 교역에는 톡톡히 이바지했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악마’일 수밖에 없었다.


1998년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 해안에 상륙한,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인도와 포르투갈에서는 각각 기념행사가 있었으나, 그 행사의 성격은 판이했다. 리스본에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가 벌어졌으나 인토에서는 바스코 다 가마의 인형을 만들어 불태우고 검은 깃발을 올리며 항의행진을 했다.


바스코 다 가마 다리가 세워진 것도 1998년이다. 떼주 강 위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총 길이 17.2km로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 1, 2위를 다툰다. 걸어서 건널 수는 없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다. 이토록 긴 다리에 바스코 다 가마의 이름을 붙여주면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장 먼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온 것이 아닐까?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상륙 장면




[우스 루지아다스]의 아버지가 묻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Mosteiro dos Jerónimos)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Luís Vaz de Camões 1524년~1580)는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그의 책은 국내에 한권, 루지아다스가 번역되었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 그의 이름은 드높다. 1572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우스 루지아다스]는 “포르투갈 국민의 정신적인 성서”로 불린다.

수도원 건설의 스폰서였던 마누엘 1세


이 책의 제목이 뜻하는 바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에 살았던 주신 바쿠스의 아들이라고 하는 루조의 자손인 루지다니아인, 즉 포르투갈인”이다. 이 애국적인 대서사시가 찬양하고 있는 것은 인도항로의 발견, 즉 바스쿠 다 가마의 첫 번째 원정이다. 이 역사적 사건은 포르투갈의 역사와 신화와 얽혀 웅장한 위대함을 갖게 되었다. 11음절의 8연시(聯詩) 10편, 전부 1,102절(節)로 되어 있는 이 대작은 작가 자신이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겪은 경험과 더불어 풍부한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가히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비견될만 하다.


현재 카몽이스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안치되어 있다. 대항해시대의 고유한 건축양식인 마누엘양식으로 지어진 이 아름다운 건물은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항로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약 1세기에 걸쳐 건축된 수도원이다. 원래는 해양왕 엔리케가 세운 예배당이었으나, 미누엘 1세가 제로니모스 파 수도사들을 위한 수도원으로 증축했다. 이곳에서 리스본 항구를 출발하는 항해단을 위한 미사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강에서 바다로, 벨렘 탑

리스본이 자리하고 있는 테주 강 하구는 바다와 상당히 가깝다. 테주 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지점. 그곳에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강물은 밀물과 썰물의 영향을 받아 물 높이의 차이를 보인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 벨렘 탑이 애초에 물속에 세워진 건, 그 때문 아니었을까.


현재의 벨렘탑은 물 속에 있지 않다. 테주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육지로 걸어나왔다. 처음 지어졌던 당시, 물이 차올랐다 빠지곤 했던 1층은 정치범 감옥이었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절부터 19세기 초까지 감옥으로 사용되던 그 1층은, 때마다 차올랐다 빠지는 물로 죄인들을 고문했다.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하던 독립운동가, 나폴레옹 군에 반항하던 애국자 등 시대에 따라 사상은 달랐지만 그들은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특징 때문에 “테주강의 귀부인”이라는 애칭까지 가지고 있는 이 아름다운 건물을 싸잡아 폄하하면 곤란하다.


물 위에 앉은 나비와 같다는 벨렘 탑

1515년부터 21년까지 7년간 지어진 이 마누엘 양식의 3층탑은 현재 리스본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옛날 왕족의 거실로 이용되었던 3층의 테라스는 아름답고, 2층에는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렘의 마리아상’이 자리하고 있어 모든 떠나는 이들을 따뜻하게 품는다.


벨렘 탑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다. 선박출입을 감시하는 요새이기도 했고, 모든 탐험대의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탐험가들은 오랜 항해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벨렘 탑을 보았고, 돌아와 지친 눈으로 처음으로 벨렘탑을 보았다. 바다를 통해 오는 이들에게, 벨렘탑은 리스본의 얼굴이었다.




축구를 통해 세계로 나가다, 알쿠셋(Alcochete) 스타디움.

포르투갈어를 사용한다는 것과 축구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당연히 우연이겠지만, 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과 포르투갈은 둘다 축구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축구장 전경


축구에 대한 포르투갈의 집념은 열광에 가깝다. 포르투갈에서 축구는 인생역전의 유력한 프로그램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정부에서도 축구를 권장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포르투갈이 배출한 세계적인 선수들의 목록을 보라. 에우제비오, 피구, 호날두 등.


대항해 시절 이후 축소되고 위축된 포르투갈에게 축구는 세계로 나아가는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이 아닐까? 늘 넓은 땅을 동경해온 이들에게 축구 경기장은 또 다른 ‘영토’인 것은 아닐까?


알쿠셋(Alcochete) 스타디움은 리스본을 대표하는 스포르팅 팀의 축구장이다. 2003년 개장을 기념하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친선경기를 가졌을 때, 스포르팅은 3-1로 승리를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축구선수공장”으로도 불리는 이 팀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 수많은 훌륭한 선수들을 배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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