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용맹, 관용과 검약까지 타고난 지도자 술탄 살라딘. 진정한 기사였던 그의 흔적을 좇아 알레포의 성채에서 살라딘성을 거쳐 기사들의 성 크락데슈발리에까지. 아직 오지 않은 공존과 평화의 미래를 기원하며 걷는 길. 불세출의 지도자 술탄 살라딘
중동 지역을 여행하는 이들 사이에서 시리아는 가장 매력적인 나라로 꼽힌다.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과 멋진 풍경, 역사적인 건축물들, 저렴한 물가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 덕분이다. 그 시리아 곳곳에는 이슬람 세계가 낳은 불세출의 지도자 술탄 살라딘의 흔적이 가득 배어있다.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alāh ad-Dīn Yūsuf ibn Ayyūb, 1138~1193)는 이라크의 티그리트 지방에서 쿠르드족 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세가 되던 해, 장기(Zangi) 왕조의 지도자 누레딘의 군대에 들어가 용맹함을 떨치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이집트,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며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십자군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전설처럼 승리했고,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에게 함락된 예루살렘을 88년 만에 재탈환했던 인물이다. 예루살렘은 오랫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의 공통된 성지였다. 서기 1095년,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봉건 제후들에게는 영토와 전리품을 나눠주고, 사분오열하던 유럽을 통합하기 위해 십자군이 모집되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40일간의 포위공격 끝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점령 후 이틀간 남자, 여자, 아이를 가리지 않고 4만 명의 무슬림이 잔혹하게 살해됐다. 무슬림과 함께 싸웠던 유대인들은 십자군이 입성한 후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라는 장로의 지시를 따라 한곳에 모여 있었다. 십자군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예배당을 포위한 십자군들은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대인들이 불타 죽는 것을 꼼꼼히 확인했다. 서기 2,000년, 로마의 교황은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과 만행을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꼭 9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88년이 지난 1187년 10월2일. 예루살렘을 재탈환한 살라딘은 어땠을까? 유대인들은 예배당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국가 보조금을 받았고, 기독교 교회는 그대로 남았다. 복수를 위한 살인은 허용되지 않았다. 기독교의 성묘를 파헤치자는 강경파의 주장에 살라딘은 “천국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자비”라고 맞섰다. 기독교 포로들은 약간의 몸값만 받고 고향으로 돌아갈 물과 식량까지 건네 풀어줬다. 살라딘의 동정심과 관용은 3차 십자군을 이끌고 온 상대편 적장에게도 이어졌다.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야파 전투에서 낙마해서 싸울 때 말 두 마리를 보내고, 열병으로 앓아누웠을 때는 과일과 눈(雪)을 보내기도 했으니. 그는 생전에 어떤 종류의 사유재산도 지니지 않았다. “재물 보기를 모래같이 하는 사람도 있다.”며 부와 화려함을 경멸했다. 그가 다마스커스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개인 금고에는 약간의 은부스러기만 들어 있을 뿐이어서 친척들은 장례비용을 꾸러 다녀야 했다. 그의 죽음은 온 백성에 의해 진정으로 애도되었다. 살라딘은 지혜와 관용을 겸비한 진정한 기사이자 절제의 미덕까지 갖춘 왕이었다. 죽기 석 달 전인 1192년 11월, 리처드와 평화협정을 맺어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 후 예루살렘은 700년간 이슬람 국가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그 기간 동안 길 위에는 피 한 방울 떨어진 적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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