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시간에 잠에서 깼지만 그럼에도 여유가 없었다. 씻는 둥 마는 둥 옷가지만 대충 챙겨 입은 채 방을 나섰다. 호텔 정문에는 우리 일행을 등산로 입구까지 데려 갈 버스가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 직원들이 아침 도시락과 점식 도시락이 든 봉투 하나씩을 나눠준다.
야쿠시마의 숲에는 몇몇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편의시설이 없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등산객의 몫이다. 야쿠시마의 숙박업소에서는 어디 할 것 없이 전날 예약하면 도시락을 준비해 준다. 행여 깜빡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등산로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에는 새벽 일찍부터 도시락을 판매한다.
야쿠시마 숲 들어가자, 계곡의 엄청난 수량과 거친 소음
예상대로 새벽 어스름을 뚫고 비가 내렸다. 애당초 맑은 날씨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여기는 야쿠시마. '일주일에 8일, 한 달에 35일' 비가 내린다는 동네다. 그나마 가장 적게 내리는 해안가의 연 평균 강수량이 4000mm, 숲 속은 고도에 따라 8000~1만mm까지 내린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연 평균 강수량은 1275mm이다. 그러니 야쿠시마에서 맑은 날을 기대하는 것은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거나, 전생에 혹은 평소에 복을 엄청 지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저 이 비가 폭우로 변하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다(물론 이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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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몬스기로 향하는 여정은 빗속을 뚫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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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약 40분을 달려 '아라카와등산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일행은 선 채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새벽부터 입맛이 있을 턱이 없지만 생존을 위해 열심히 구겨 넣었다. 빗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굵어졌다. 비옷을 꺼내 입는 등 나름 열심히 채비를 했지만 과연 얼마나 버텨줄지 다들 걱정스런 눈치다.
해발 600m에 위치한 아라카와등산구에서 조몬스기까지의 거리는 약 11km, 표고차는 700m 정도다. 시작점에서 8km까지는 벌목한 삼나무를 운반하던 산림철도가 깔려있다. 철길을 따라 걷는 이 코스는 경사가 완만해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 수준이다. 본격적인 산행은 '오카부보도입구'에서 시작되는 약 2.5km 구간. 평소 운동량에 따라 힘들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이 코스에는 야쿠스기의 대표선수에 해당되는 유명한 삼나무를 차례로 볼 수 있어 수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야쿠시마의 숲은 시작부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하는 계곡의 엄청난 수량과 유속 그리고 거친 소음이 여간 사납지 않다. 마치 절집의 입구에서 잡귀의 범접을 막고 중생을 정화시켜주는 사천왕상을 연상케 한다. 그 이름조차도 뱃사람들이 거친 바다를 일컫는 '황천(荒天 아라카와)'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천길'의 그 황천(黃泉)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야쿠시마 사람들은 이 거친 계곡 때문에 전기를 얻는다.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계곡물을 이용한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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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카와 계곡은 이방인의 간담을 서늘하게할 정도로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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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을 1시간쯤 걸으면 고스기타니 초중학교가 있던 터에 닿는다. 잡초만 무성한 학교 터는 대충 봐도 만만찮은 규모다. 1920년대에 조성된 이 마을에는 한때 500명의 주민이 살 정도로 번성하다 1970년 국가 주도의 벌목 사업의 축소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못나서 살아남은 야쿠스기가 그렇게 고마울 줄이야
17세기부터 본격화된 벌목은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됐다. 사츠마번의 재정난을 덜어 주었던 야쿠시마의 삼나무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의 밑거름이 됐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가 재건의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300년 넘게 진행된 벌목으로 섬 면적의 80%가 훼손됐다. 1993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될 당시에는 훼손되지 않은 20% 정도만 지정됐다. 만약 그 20%라도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야쿠시마의 오늘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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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만들어진 산림철도는 야쿠스기를 운반하는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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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넘게 버텨 온 야쿠스기의 운명 또한 이와 비슷하다. 예뻐서 봐 준 것이 아니라 못나서 살아남았다. 곧게 뻗지 않은 삼나무는 수령이 아무래 오래되어도 목재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곧고 높게 자란 야쿠스기는 어김없이 잘려 나갔다. 그래서 살아남은 야쿠스기는 둘레에 비해 생각보다 키가 크지 않고 그 생김새 또한 하나같이 기괴하다. 별 볼일 없는 내 처지에 빗대니 과하게 감정이입이 된 탓일까? 못나서 살아남은 야쿠스기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좀 잘났다고 고개 빳빳이 들고 거들먹거릴 일이 아니다. 세상사 세옹지마라는 말이 이 숲에 서면 절로 수긍이 간다.
고스기타니마을 터를 지나 30분쯤 걸으니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를 보니 왼쪽 오솔길을 따라 90분 정도를 걸으면 '시라타니운스이계곡'에 닿는다고 한다. 조엽수와 야쿠스기 그리고 초록의 이끼로 뒤덮인 이 계곡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 원령공주 > 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야쿠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하는데, 빠듯한 일정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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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의 숲은 고요했고, 그 고요함은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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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은 고요하다
밭은 고요하다
흙은 고요하다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해발 700m 지점을 지나니 본격적인 야쿠시마의 숲이 펼쳐졌다. 숲은 고요했다. 일본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야마오 산세이는 고향인 도쿄를 떠나 1977년 가족과 함께 야쿠시마의 숲에 정착했다. 2001년 숲의 일부가 되기까지 그는 농부이자 시인으로 살았다. '이것은 하나의 의견인데'라는 겸손함과 '벌이가 안 되는 것은 괴롭지만'이라는 솔직함, 야쿠시마의 숲을 노래한 시인의 현학적이지 않은 태도가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야마오 산세이는 숲을 찾는 인간들에게 '결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걸을 것, 잡담을 삼가고 침묵을 지키며 걸을 것'을 당부했다. 그러면 생명이 깃든 모든 것으로부터 '참다운 나(가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야쿠시마의 숲에서는 신사나 도리이를 발견할 수 없다. 일본에는 '야오요로즈가미(八百万神)'라는 말이 있다. 신의 숫자가 800만이나 된다는 소리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곳곳에 크고 작은 도리이와 신사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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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의 숲은 그 자체로 신(가미)이고, 숲을 이루는 모든 것이 신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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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로 땅이 갈라지고, 시뻘건 용암이 터져 나오고, 거센 폭풍우가 몰아친다면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까? 간단하다.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조상, 심지어 동물에게 까지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경외하게 된다. 경외하는 모든 대상은 '가미(神)'가 되고 신에게 생존과 농사의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이것이 원시신앙이다. 원시신앙이란 신에 대한 의례를 통해 재앙을 물리치거나 공동체적 결속을 다지는 일체의 행위를 일컫는다. 이러한 원시신앙이 수천 년 간 이어져 온 것이 바로 일본의 신도(神道)다.
따라서 신도는 일본이라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개인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일본에서 신도는 종교이자 도덕이며 생활로서 태고적부터 존속해온 일본의 전부이자 일본인의 '삶' 자체다.
그런데 야쿠시마의 숲에는 신에게 의지하기 위한 그 어떤 상징물도 없다. 숲 자체가 신이고, 그 숲을 구성하는 모든 죽은 것과 산 것이 신의 일부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야마오 산세이가 '참다운 나'를 두고 '가미'라고 한 것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침묵하며 걷기, 고요함을 깬 것은 사슴
그의 당부대로 서두르지 않고, 잡담도 않고,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걸었다. 숲이 나를 받아줄지 어떨지는 몰라도 숲의 일부가 되어 보기로 했다. 어쩌면 생애 최고의 광경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출발한 여정이었건만, 이미 나를 스쳐가는 모든 것들이 생애 최초이자 최고의 풍경이었다. 숲의 일부가 되지는 못했을지언정, 어쨌거나 나는 그 숲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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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땅에 살고있는 사슴들은 인간을 경계하지도, 그렇다고 굳이 가까워 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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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을 깬 것은 사슴이었다. 저만치서 두 마리의 사슴이 부스럭 거리며 나타났다. '원숭이 2만, 사슴 2만, 사람 2만', 오래전부터 야쿠시마를 상징해 온 말이다. 한번 보이기 시작한 사슴은 그 후로 수시로 출몰했다. 2만이나 되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많았다. 사슴은 인간을 경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본의 유명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닳아빠진 녀석들처럼 먹을 것을 구걸하지도 않아다. 이곳은 본래부터 녀석들의 땅이었고, 인간은 잠시 스쳐가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사슴도 인간도 서로를 간섭하지 않고 각자에게 허락된 길을 갈 뿐이다.
3시간쯤 걸으니 8km에 이르는 철길이 끝났다. 본격적인 산행을 앞두고 '오카부보도' 입구 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나로서는 강한 흡연의 욕구가 일었다. 일본 역시 제법 깐깐한 금연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흡연자에게 관대한 나라다. 국립공원이나 유명 관광지의 경우 제한적이지만 흡연이 가능한 장소를 마련해 두고 있다.
나와 같은 처지인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산장 후미진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 아이러니 하게도 고요함에 매료되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숲의 공기를 그때서야 실감했다. 청량하고 향기로웠다. 내 언제 다시 이런 곳에서 다시 담배를 피워 볼 수 있을까 싶어 연거푸 두 개피를 피웠다. 하지만 위험했다. 지금까지 마셔왔던 것과 차원이 다른 공기는 복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흡입력이 전혀 달랐다. 공기 좋은 곳에 있으니 담배 따위가 얼마나 백해무익한지 절로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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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땅 속으로 내리지 못한 야쿠스기는 수천년의 세월을 거치며 나름의 생존방식을 터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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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휴식을 취한 일행은 채비를 갖추고 다시 걸었다. 경사가 제법 심하고 길도 험했지만 그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지나 온 길이 예고편이라면 진짜 풍경은 지금부터다. 천 년이 넘은 야쿠스기가 차례로 나타났다.
삼나무의 평균 수명이 500년인데 반해 야쿠스기가 천 년을 넘게 사는 것은 척박한 환경 때문이다. 섬 전체가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인 야쿠시마는 토양의 깊이가 평균 30cm 밖에 되지 않는다. 멀리서 날아 온 약간의 흙이 섬을 덮었고 오래전 죽은 식물들이 다시 그 위를 덮었다. 그렇게 쌓인 토양에서 야쿠스기는 뿌리를 내렸다. 죽은 것을 딛고 살아야하는 야쿠스기는 제 욕심을 차리기보다 염치 있는 삶을 택했다. 성장을 최소화함으로써 숲의 환경에 적응했다. 야쿠스기자연관에서 본 1660년 된 야쿠스기 나이테의 중심부는 0.1mm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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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전 잘려나간 야쿠스기의 그루터기에서는 새로운 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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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 한 것은 다음 세대에 성장한 삼나무들이다. 인간에 의해 잘려나간 야쿠스기의 그루터기와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야쿠스기에는 온통 이끼가 끼어 있었고, 그 이끼 위로 새로운 삼나무가 자랐다. 제 어미의 품에 뿌리를 내린 형국이다. 어미를 품고 자란 삼나무는 성장이 빨랐고 곧게 자랐다.
수령이 천 년이 되지 않은 고스기(小衫)는 대부분 이렇게 성장한 것이다. 죽은 것들이 만든 토양에서 어미가 자랐고, 죽은 어미를 딛고 다음 세대가 성장을 거듭했다. 야쿠시마의 숲은 이렇게 만들어졌고, 이 숭고한 생명의 대물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고작 100년을 사는 인간의 처지에서 야쿠시마의 숲이 경이로운 것은 바로 이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숲에서는 겸손 따위를 언급하는 것조차 겸손하지 않게 느껴진다.
8년 동안 상상했던 조몬스기, 이 느낌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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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그루터기 속에서 올려다 본 야쿠시마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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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000m에 이르니 '윌슨그루터기'가 나타났다. 1900년대 초반 미국의 식물학자 윌슨 박사에 의해 발견됐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약 300년 전에 잘려나간 2000년 된 야쿠스기의 흔적이다. 중심부가 썩어서 비어있고 그루터기 아래를 통해 나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부에서 하늘을 올려다 볼 때 하트 모양이 보여 유명해진 그루터기이기도 하다.
밑동의 지름만 4m인 윌슨그루터기의 내부 면적은 다다미 8조 규모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몇 조'라는 식으로 방의 넓이를 다다미의 갯수로 표현했다. 다다미 두 장이 대략 한 평에 해당된다. 4평쯤 되는 다다미 8조는 꽤 넓은 방을 의미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공간에 대해 '뻥'을 칠 때는 '다다미 8조'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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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이 이런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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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그루터기를 지나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빗속을 뚫고 숲길을 걸은 지 꼬박 4시간. 정신은 더없이 맑고 충만했지만 속은 비어 있었다. 대자연의 경이로운 풍경 속에서도 인간의 배고픔은 어김없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주먹밥에 몇 가지 반찬이 전부였지만 꿀맛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익숙하고 정겨운 냄새가 감지됐다. 일행 중 한명이 시중에 판매되는 깻잎 무침을 챙겨와 나누고 있었다. 해발 1100m의 야쿠시마의 숲에서 먹는 깻잎무침이라니! 깻잎 두 장에 그렇게 감격할 줄은 미처 몰랐다. 행여 야쿠시마를 가실 분들은 꼭 한번 고려해 보실 것을 권한다.
식사를 끝내고 해발 1200m에 이르니 '다이오스기(大王杉)'가 나타난다. 수령 3천년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조몬스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야쿠시마에서 가장 오래된 삼나무였고, 그래서 '대왕'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다. 이미 대왕의 자격을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 보다 오래된 나무가 나타났으니 나무는 나무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꽤 난처했을 것이다.
다이오스기를 뒤로하고 밥심에 의지해 마지막 에너지를 쏟았다. 저 멀리서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경사를 오르니 웅성거림은 탄성으로 바뀌었다.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고르고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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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몬스기는 이곳에서 나를 수천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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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깊은 산속에서 느닷없이 만난 백발의 노인과도 같았다. 옅게 드리워진 안개는 분위기를 한층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이건 대체 뭐지?' 8년 동안 상상했던 모습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굉장히 거대한 무언가를 상상했던 것에 비해서는 왜소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어떤 기운과 감정이 자꾸만 나를 끌어 당겼다. 안개가 걷히니 노인의 표정은 점점 선명해졌다. 조몬스기가 지나 온 시간의 흔적은 크기가 아닌 그 표정에서 드러났다.
수피, 지금껏 이런 나무의 표정은 본 적이 없다. 그동안 봐 왔던 흑백으로 찍은 수많은 인물사진이 스쳐 갔다. 명암의 대비가 선명한 흑백사진은 세월의 흔적과 스토리를 짐작케 하는 힘이 있다. 수천수만 장의 사진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조몬스기의 수피로 날아와 박혔다. 역사, 조몬스기는 그 표정으로 지나 온 역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 표정 앞에서 나무가 7000년을 살았느니, 3000년을 살았느니 하는 것은 부질없었다. 관건은 시간의 길이가 아닌, 시간의 깊이였다. 이 척박한 곳에서 나홀로 인고의 세월을 버텨 온 나무였기에 가능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한없이 인자해 보기기도 했고, 때로는 무서워 보이기도 했다. 그 심중을 헤아리는 것은 애당초 불가했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만 볼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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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속깊은 노인의 심중을 헤아리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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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하루 종일 노인의 표정을 바라보고 싶었으나, 이제 그만 내려가란다. 잠시 그쳤던 비는 폭우가 되어 다시 내렸다. 감정을 수습하고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나 온 길만큼 다시 가야하는데 비의 양이 심상찮았다. 연 평균 강수량 8000~1만mm는 그제야 실감이 났다.오후가 되니 숲은 빠른 속도로 어두워졌다. 이미 온 몸은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원숭이 가족이 나타나 작별 인사를 한다. 달리 비를 피할 곳이 마땅찮은 숲에서 저 녀석들이나 나나 이 무슨 고생인가 싶다.
그래, 어차피 삶은 고행이다. 고행은 고행인데 정신은 왜 이다지도 맑은 것일까? 몸은 천근만근이고 다리는 풀릴 대로 풀렸는데, 이 가볍고 충만한 기분은 대체 뭔가. 이 맛에 그 험난한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 걸까? 빗속에서 별 쓸데없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다들 들떠있다. 숲을 오를 때는 그렇게 침묵하던 일행들이 숲을 내려갈 때는 침묵을 놓았다.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말을 해야 했고, 고단함을 잊기 위해서라도 말을 해야 했으며, 점점 식어가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말을 해야 했다.
출발점을 두어 시간 앞두고는 슬슬 저체온증 증세를 보였다. 누군가 초콜릿을 나눠 준다. '오, 마이, 갓!' 달콤함이 이렇게 따뜻하고 감사한 줄 미처 몰랐다. 단 음식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앞으로는 초콜릿을 사랑하기로 했다. 버스에 오르니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정말로 간절한 것이 있었다. 누군가 달걀 하나 푼 컵라면을 내민다면 영혼을 팔고서라도 바꾸고 싶었다. 11시간 동안의 긴 여정의 감동과 깨달음은 그렇게 세속적인 욕망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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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숲에 있었고, 그 기억은 아마도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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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변한 것도 달라진 것도 없다. 나는 다시 떠날 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 숲에 있었고, 조몬스기의 표정을 봤다. 그 기억만큼은 평생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