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내륙에서 라트비아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다우가우필스(Daugavpils)는 라트비아 제2의 도시이다(‘다우가프필스’로 불리기도 하지만, v자가 자음 앞에 왔을 때 묵음이 되는 라트비아어의 특성상 ‘다우가우필스’로 부르는 것이 맞다). 러시아 국경에서의 복잡한 여권심사를 마치고 다우가우필스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누구나 러시아를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간판이나 표지판, 안내문들이 모두 러시아어와는 상당히 다른 라트비아어로 적혀 있어 국경을 넘어 새로운 문화권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다우가우필스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라트비아어 간판이 달린 서점에 들어가도 내부에 진열된 책들은 90% 이상이 러시아어로 된 책들이며, 라트비아어로 된 메뉴판을 가져다주는 식당에서도 종업원과 손님들은 모두 러시아어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심지어 영화관에 가도 최신 할리우드 영화가 러시아어로 더빙되어 상영될 정도다.

다우가우필스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보행자 전용거리인 리가 거리. <사진: 다우가우필스 관광청>

라트비아는 소련 시절 발트3국에서 가장 러시아화가 많이 진행된 지역이기도 하지만. 다우가우필스가 있는 동부 지역은 특히 더하다. 다우가우필스 주민들 중 60% 이상이 러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라트비아 안의 작은 러시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우가우필스는 한국인뿐 아니라 발트3국을 자주 다니는 외국인들에게조차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인구 규모 역시 10만여 명에 불과해 90만 명 정도가 사는 수도 리가와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가 엄청나다. 변변한 구시가지도 없고, 크게 내세울 만한 유적지도 없는 곳이라서 관광객도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도시에 대해서는 명성에 비해 크게 볼 것이 없다는 선입견도 많다.

하지만 러시아인 이외에도 라트비아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벨라루스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어우러져 만든, 발트3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색다른 풍경들도 많고, 과거 무역 거점으로서의 영화를 되찾기 위해 국제공항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우가우필스 요새를 휘감고 있는 해자. <사진: 다우가우필스 관광청>

다우가바 강변에 위치한 다우가우필스

다우가우필스라는 이름에는 ‘다우가바 강변의 도시’라는 의미가 있을 만큼, 이 도시는 다우가바강(서드비나강)과 역사를 함께 하고 있다. 수심이 깊으면서도 물결이 잔잔해서 중세 시절부터 대표적인 무역로로 사용되어 왔고 스웨덴 고틀란드섬의 사람들이 다우가바강을 통해 그리스로 갈 수 있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만큼 명성이 높다.

리가를 정복한 리보니아 기사단들(검우기사 수도회)이 이 지역에 성을 건설한 1275년을 도시 역사의 시작으로 삼고 있으며, 당시에는 뒤나부르그(Dünaburg)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때부터 무역 거점으로 발전했지만, 16세기 중엽부터 라트비아 동부의 라트갈레(Latgalė) 지역이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리투아니아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다우가우필스가 속한 라트갈레 지역은 독일 루터교의 영향이 비교적 컸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로마 가톨릭이 번성했고 서부의 표준 라트비아어와 많이 다른, 리투아니아어와 라트비아어의 성격을 모두 보이는 라트갈레어라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보다 로마 가톨릭 성당이 더 많은, 약간은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가 거리 한가운데 자리잡은 웅장한 로마 가톨릭 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 러시아 인구가 많은 다우가우필스이지만 로마 가톨릭 성당이 더 많다. <사진: 서진석>

1차대전 이후 라트비아가 최초로 독립했을 당시, 라트갈레 지역은 언어적으로 라트비아어에 조금 더 가깝다는 이유로 라트비아와 한배를 타게 되었다. 한때 라트갈레어는 라트비아어의 사투리로 취급되어 많은 관심을 얻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독립적인 언어로 인식되어 라트갈레의 중심도시인 레제크네를 중심으로 하여 라트갈레어 방송, 교육, 편찬사업 등 라트갈레어 부활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우가우필스는 2차 대전을 겪으면서 큰 손실을 입었으나,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답게 철강, 섬유, 식품가공업, 경공업 등 소련 내부의 원자재를 가공하는 공업단지가 집중적으로 건설되면서 소련 내부의 고학력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왔다. 그 결과 한때 러시아인의 수가 이 도시 전체 인구 중 80%에 육박하기도 했다.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 내륙에서 생산되는 원자재에 의존하는 현지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러시아 유민들의 시민권 취득이나 교육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로 여러 주변 국가들의 투자가 늘어났고, 다우가우필스가 가진 다문화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축제와 문화행사들이 열려 외지인들의 방문이 늘어나자 과거에 가지고 있던 조금은 어두웠던 고정관념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다우가우필스가 자랑하는 볼거리, 다우가우필스 요새 (Daugavpils Cietoksnis)

다우가우필스 요새는 19세기 초 건설 당시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1577년 이반 대제의 명령에 의해서 성곽이 최초로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거듭하였으나, 현재의 모습이 완성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초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벌 야욕에 불타오르던 1810년 알렉산데르 1세가 ‘러시아 제국의 서부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건설을 명한 요새는, 1812년 나폴레옹 군대가 다우가우필스를 실지로 장악하면서 나폴레옹 군대의 진격을 막고자 했던 초기의 계획을 완전히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1833년 니콜라스 1세 시절에 완공되었다.

요새 내 텅빈 군사시설과 함께 서있는 아파트. <사진: 서진석>

한때 군사시설이었음을 말해주는 무기. 현재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사진: 서진석>

해자, 요새 전체를 휘감는 성벽, 웅장한 모습의 성채, 소방서, 보루 등 당시의 군사시설물과 함께, 요새 안에 살았던 이들을 위한 주거건물, 공공건물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러시아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 서유럽의 침공에 대항하고자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1940년 소련 붉은군대가 다우가우필스를 점령했을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리나 궁전에 있던 호박실을 약탈한 독일군이 급하게 퇴각을 하면서 요새 어딘가에 그 보석들을 숨겨놓았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남아 있다.

현재 요새는 다우가우필스 최고의 자랑거리로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홍보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 지역이 방치되어 있거나 개발 중이다. 특히 소련 시절 밀려드는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부에 아파트까지 건설되어 일반 시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때는 위용을 자랑했으나 주인이 사라진 텅 빈 요새 한가운데 서면 사라진 도시 안에서 길을 잃은 느낌마저 든다.

다우가우필스 시내 관광안내소에 미리 신청하면 가이드의 자세한 안내를 받아 관광할 수 있고, 요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으로도 재밋거리를 찾아볼 수 있다. 2005년부터 대단위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공사가 끝나면 라트비아 최대의 볼거리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히 보이는 지역이다. 시내에서 대략 3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전차나 버스를 타면 금방 도착한다.

19세기 후반의 운치있는 건물들이 가득한 다우가우필스 시가지

다우가우필스에는 특별히 구시가지라고 부를 만한 지역이 따로 없지만, 요새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시에톡스냐(Cietokša) 거리와 다우가우필스 중앙역 앞에서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도로인 리가 거리(Rigas iela), 사울레스 거리(Saules iela) 등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에서는 19세기 후반기에 건설된 운치 있는 건물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리가 거리 한가운데 광장에 자리 잡은 통일의 집(Vienibas nams)은 라트비아 공화국 1대 대통령 카를리스 울마니스가 1934년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시민들의 요청에 화답하여 건설해 준 건물로 유명하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기능주의와 네오-고전주의를 혼합한 양식의 이 건물에는 현재 대규모 공연장, 문화센터, 시립도서관, 관광안내소 등이 입주해 있다.

다우가우필스를 방문하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곳은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이다. 1883년 아르누보 양식으로 건설된 건물에 1938년 입주한 이 박물관은, 라트갈레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다우가우필스 도시의 역사와 함께 중세, 근대 시절 이 도시에 살았던 시민들의 생활상, 도시가 낳은 대표적인 예술가인 레오니드 바울린스(Leonids Baulin), 다우가우필스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추상화가로 활동한 마크 로스코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라트비아 동부에서 가장 아름답고 규모가 큰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 <사진: 서진석>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 내부 <사진: 서진석>

중앙역에서 시작되어 다우가바강에 이르는 대략 1km의 보행자 전용거리인 리가 거리는 다우가우필스에서 가장 활기차고 화려한 거리이다. 방문객들이 많은 여름이면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열리며, 분위기 좋은 식당과 커피숍, 상점들이 즐비해 도시의 분위기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거리이다. 특히 보도블록 사이사이에 박힌 조명은 여름밤의 정취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다우가우필스는 라트비아 전체에서 가장 녹지가 많은 곳으로도 손꼽힌다. 다우가우필스가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마크 로스코, 한때는 사투리에 불과했던 라트갈레어의 위상을 높인 라트비아 최대의 문호 라이니스 , 라트비아 서사문학의 아버지 안드레이스 품푸르스 등 여러 위인들을 주제로 한 크고 작은 광장은 도시를 산책하는 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가는 길

다우가우필스에는 국제공항이 없으므로 수도 리가를 통해서 들어오는 방법이 가장 편하다. 2011년 현재 하루 네 차례 기차가 운행하고 있으며, 기차에 따라 2시간 50분에서 4시간까지 걸린다. 버스로 이동할 경우 리가에서 거의 매시간 버스가 출발하고, 경유 도시에 따라 3시간 반에서 4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러시아로 이동하는 국제철도노선은 없으나, 유로라인이나 에코라인 등의 버스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카우나스에서는 기차나 버스를 통해서 이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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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호수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서있는 '트라카이 성' 전경

발트해를 껴안은 곳. 흔히 발트 3국으로 일컫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여행 좀 해봤다는 여행객들에게도 아직 낯선 곳이다. 직항편이 없어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닿기는 힘들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면 그 어떤 유럽여행보다 더 큰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중 리투아니아는 고즈넉한 풍광이 여행객들을 매료시키는 곳. 마치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 낭만적인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 고즈넉한 풍광, 우아한 도심…빌뉴스 

러시아 북서부에 자리한 리투아니아는 발트 3국 중 가장 면적이 크다. 또한 가장 낙후된 곳이기도 하나 그만큼 고즈넉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가장 먼저 찾을 곳은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발트 3국의 수도 중 유일하게 바다와 면하지 않은 수도이기도 하다. 이곳의 옛 명칭은 빌나, 영어로 빌니우스라고도 불린다.12세기부터 역사가 시작된 이곳은 이후 다양한 민족이 모여 국제도시로 성장했으며 발트 3국 중 가장 중요한 금융도시로 번성했다. 

빌뉴스는 그야말로 중세도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빌뉴스 역사지구는 3.6㎢ 규모에 1500여 개의 건축물이 모여 있어 천천히 둘러보며 여행하기 좋다.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중세 건축물들과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힌 도심 풍광, 차분한 분위기가 한데 어우러져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곳에 위치한 대표적인 중세 건축물로는 700년간 리투아니아인들의 신앙적 중심지였던 빌뉴스 대성당, 1051년 지어진 최고의 고딕양식 건축물 성안나 교회, 14세기 지어진 대통령궁 등이 자리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빌뉴스 역사지구의 명물은 바로 빌뉴스 대학이다. 리투아니아 최초의 대학으로 1579년 설립됐다. 이후 수많은 문학가와 철학가들을 배출했다. 대학교 건물 전체가 유물이며 박물관이라 칭할 만하다. 

빌뉴스를 찾았다면 '트라카이'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빌뉴스에서 30㎞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해 꼭 한번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둘러보아야 할 명소는 트라카이 성이다. 호수 위의 성으로 불리는 이곳은 마치 동화 같은 풍광을 연출한다.  

◆ 리투아니아인의 성지…샤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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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개 십자가와 이야기를 품은 샤울레이 십자가 언덕

샤울레이는 리투아니아 북부에 자리한 작은 도시. 리투아니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빌뉴스에서 220㎞ 정도 떨어져 있으며 차량으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샤울레이는 14세기부터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해 19세기 이후 급속도로 발전했다. 

리투아니아인의 성지로도 불리는 샤울레이의 명소는 단연 '십자가 언덕'이다. 수십만 개의 십자가가 모여 있는 이곳은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다녀간 이후 더욱 유명해졌다. 마을 외곽에 자리한 '도만타이'로 가면 십자가 언덕을 만날 수 있다. 버스를 타고 들어가서 다시 20분 넘게 걸어야 할 만큼 교통이 불편하지만 빽빽이 꽂혀 있는 십자가가 특별한 경관을 연출해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언덕으로 향하는 길. 사람들의 행렬을 따라가다 보면 기념품점도 만날 수 있다. 가지각색 다양한 십자가를 판매하고 있어 이곳의 특별한 분위기를 간직하려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언제부터 이 언덕에 십자가가 꽂히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언덕 위에 십자가를 세웠다. 어지러웠던 시절 조국의 독립과 실종자들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세워졌다고 알려진다. 이후 소련이 군대를 동원해 불도저로 밀어버렸지만 십자가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인지 이곳에 서면 왠지 숙연한 마음이 든다. 

VIP여행사(02-757-0040)에서 발트 3국을 포함한 '북유럽/발틱' 여행 상품을 선보인다. 오는 7월 6일 단 1회 출발하는 상품으로 핀에어 항공을 이용한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을 둘러보는 12일 일정이다. 왕복 항공료, 유류할증료 및 택스, 전 일정 4성급 호텔, 전용 버스, 식사, 관광지 입장료 등을 포함하며 노옵션 행사 상품으로 요금은 459만원이다. 

[한송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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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3국 한가운데 자리 잡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īga)는, 라트비아뿐만 아니라 발트3국 전체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다.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대부분 리가에 진출해 있어 발트3국 중에서는 한국인 교민의 수나 한국과의 교역량도 가장 많은 곳이지만, 라트비아의 이야기는 언론에 자주 등장하지 않아 제대로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다우가바강. 러시아 내부에서 발트해로 흐르는 이 웅장한 강은, 리가에게 무역적 요충지의 가치를 부여하긴 했으나, 동시에 수많은 강대국들의 각축장인 되는 비극을 낳기도 했다. <사진: 김향란>


리가는 첫눈에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의 모습을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인다. 한자동맹 시절 중세상인들이 만들어놓은 길드 건물들이 구시가지에 가득하고 에스토니아와 같이 독일의 오랜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그 흔적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독일의 사상가인 요한 헤르더(요한 헤더)와 오페라 작곡가 바그너 등 유럽의 명사들에게 사상적 예술적 동기를 부여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바그너는 1837년부터 1839년까지 2년의 짧은 기간 동안 리가에 거주했지만, 크리스마스 럴럴의 대명사인 ‘소나무야(Oh, Tanenbaum)’와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인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영감을 리가에서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유럽 건축사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담긴 미하일 아이젠스타인(Mikhail Eisenstein)이 설계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은 유럽 전체에서도 최고로 알려져 있으며, 역시 리가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세르게이 아이젠스타인(예이젠시테인)은 세계 영화사상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전함 포템킨]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세계 최경량 카메라인 미녹스 카메라가 최초로 개발 생산된 곳이며, 1985년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백야]의 주연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의 고향 역시 리가이다. 러시아의 민요로 잘 알려진 ‘백만 송이 장미’도 알고 보면 리가 태생의 작곡가 라이몬즈 파울스(Raimonds Pauls)가 작곡한 라트비아의 노래다. 그 후 러시아의 여가수 푸가초바(Alla Pugatschowa)의 음반에 수록되면서 러시아의 노래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그 내용은 러시아와는 상관없는 라트비아 전설 속의 이야기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유럽 문화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수행해온 리가는, 발트3국 최대의 도시라고 하지만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작고 아담하기만 하다. 그러나 일단 탐험을 시작하면 곳곳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많이 숨어 있는 흥미로운 지역이 바로 리가이다.




발트독일인들의 흔적

리가 건설의 시작은 공식적으로 12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트해 무역거점으로서의 가치가 점차 부각되기 시작할 무렵, 독일은 발트해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리가를 그 거점으로 선택한 것이다. 독일 브레멘의 대주교였던 알베르트(Albert) 대주교가 리가만에 배를 댄 것이 바로 리가 역사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독일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병합하여 리보니아라는 공국을 건설하여 발트해안 지역의 지배를 확실히 하기 시작했으며, 라트비아인들은 독일인들의 지배를 받는 농노로 전락했다. 이후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가 번갈아가면서 라트비아를 지배했지만 발트독일인이라 불리던 독일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고유 권리를 인정받으며 1차 대전 전까지 라트비아에서의 문화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리가 구시가지에는 발트독일인들과, 리가를 거점으로 삼아 무역활동을 해온 중세 상인들이 건설한 건물이 아주 많다.

검은머리전당의 낮과 밤 <출처: Arroww at commons.wikimedia.org, 서진석>


무엇보다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검은머리전당이다. 이 건물을 사용했던 검은머리길드는 아프리카, 남미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해온 미혼 상인들이 결성한 무역 조합으로써, 이집트 출신의 한 흑인 성인을 수호신으로 여겨 건물마다 그 성인의 얼굴을 장식했다. 리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다우가바강(서드비나강)이 내려다보이는 시청광장 한쪽에 있는 화려한 외부장식의 이 건물은, 상인들이 리가에 머무는 동안 여관이나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원래는 같은 장소의 다른 건물을 임대해 사용했으나 15세기에 건물을 사들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친 후에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2차 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80%가 파괴되고 독일의 잔재라는 미명하에 소련 정부가 완전히 철거해버린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2001년 리가 건설 8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새로 복원되었다.


검은머리전당 광장 앞 한쪽 구석에는 세계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1510년 겨울, 길드 회원들이 그 자리에 갖가지 장식을 한 전나무를 세우고 밤새도록 즐긴 것이 유래가 되어 전 세계로 퍼졌다는 것인데, 라트비아 관광청은 그 사실을 내세워 겨울마다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그 외에도 눈여겨 보아야 할 건물은, 바로 리가의 상징과도 같은 삼형제(Trīs brāļi) 건물이다. 이웃 나라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있는 ‘세자매’와 견줄만한 이 세 건물은 리가에 있는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다양한 기간 동안 만들어진 집 세 채가 어깨를 맞닿아 서 있다. 오른편 흰 건물이 15세기에 세워진 가장 맏형으로, 왼편으로 갈수록 나이가 한 세기씩 젊어진다. 현재는 라트비아 건축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생김새에 비해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리가의 명물 삼형제 건물.

스웨덴문으로 가는 골목길. 과거에는 군사시설이었으나 현재는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선물가게들이 밀집된 골목으로 바뀌어 있다. 



금으로 만든 수탉이 우는 도시, 리가

리가 시내에서는 유독 높은 교회 첨탑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 첨탑마다 서 있는 금빛 찬란한 수탉 모양의 풍향계는 리가의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베드로 성당 꼭대기에 서 있는 금수탉이다. 13세기 리가 상인들의 헌금에 의해서 건설된 이 성당은, 리가의 중요한 랜드마크로서 현재는 미사를 드리는 성당이라기보다는 높은 첨탑 위에서 구시가지를 관망할 수 있는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무역도시인 리가에서 풍향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 성당에 가장 먼저 수탉 모양 풍향계가 생겼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한 구절과 연결되어 베드로와 수탉이 자연스럽게 연관짓게 되었다고 한다. 닭이 어둠을 내쫓고 새벽을 부르는 신령한 동물이라는 지역의 토속신앙과도 연결되어 리가의 높은 첨탑에는 어김없이 수탉이 올라가게 되었다.

베드로성당과 함께 리가 역사의 시작부터 이 도시를 굽어보던 역사적인 건물인 야고보 성당. 이 건물의 꼭대기에서도 어김없이 금수탉을 볼 수 있다. 

리가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베드로 성당과 검은머리전당. 높은 첨탑 위에는 리가 구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베드로 성당 뒤편으로는 리가를 건설한 알베르트 공의 고향인 브레멘에서 그림 형제의 동화 [브레멘 음악대]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로 구성된 재미있는 동상이 조성되어 또 다른 재미있는 볼거리를 만들어준다.

베드로 성당과 견줄만한 중요한 성당 건물은 돔성당이다. 1201년 알베르트 대주교가 리가 건설을 시작했을 당시부터 대주교 관저와 대성당으로 사용되었던 이 성당은 수백 년 동안 증축되면서 세 가지 건축양식이 한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초기 고딕양식의 기반 위에 바로크 양식의 첨탑을 중심으로 바실리카 양식이 혼합된 웅장한 모습 이외에도 1884년 완성되어 한때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파이프 오르간 역시 중요한 자랑거리다. 관광객이 몰리는 여름철에는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공연이 자주 열린다.



지배의 흔적

라트비아 역시 수백 년 동안 주변 국가들의 끊임 없는 지배를 받았고, 리가 구시가지 곳곳에는 외부세력의 지배와 거기에 맞서 싸우기 위한 투쟁의 흔적들이 잘 녹아있다.

리가 구시가지 동편에 남아 있는 성벽의 흔적. 대부분 파괴되고 그 일부가 소련 시절에 복원되었다. 

유명세에 비해서 볼 것은 없다는 불평이 이어지는 스웨덴문.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리가 구시가지 역시 한때는 육중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였으나 여러 전쟁과 침략으로 전부 파괴되었고 현재는 그 일부만이 구시가지 동편에 복원되어 있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구시가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자 얼굴이 양각된 문을 볼 수 있다. 이 문은 성벽을 통과해 구시가지로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17세기 말에 새로 만들어진 문이었는데, 1621년 당시 라트비아를 지배하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스웨덴이 라트비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념하여 ‘스웨덴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문이 만들어진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게 되고, 라트비아 전역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에 들어간다.

다우가바 강변에 위치한 리가성(Rigas pils)은 1340년 리보니아 기사단 사령관의 관저로 건설된 곳이었으나, 이후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 라트비아를 지배한 국가의 지역사령부 건물로 줄곧 사용되어 왔다. 리가성 위에서 어떤 나라의 깃발이 휘날리는가를 통해 라트비아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파악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현재 라트비아 공화국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리가성은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문학박물관, 사진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이 위치해 있어 관람도 가능하다.

독일, 폴란드, 스웨덴, 제정 러시아 등 라트비아를 

지배한 세력들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 있는 리가성. 대통령 집무실이 된 지금, 라트비아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라트비아의 자유와 해방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오랜 지배의 역사에 맞서 싸운 라트비아인들의 투쟁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리가 시내 한가운데 있는 ‘자유의 여신상(Brīvības piemineklis)’이다. 1차대전 종전 후 잠시 독립을 이루었던 1935년에 조성된 42미터 높이의 푸른색 석상은 라트비아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밀다(Milda)의 모습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완공된 이 건물은 라트비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고, 2차대전 발발 후 소련에 의해 시베리아로 끌려가거나 독립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라트비아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사람들의 헌화가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여신상 아래쪽으로는 1차대전 중 라트비아의 독립을 위해서 싸우던 용사들의 활약상과 라트비아의 민족서사시 라츠플레시스의 내용을 소재로 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검은머리전당 바로 앞에 위치한 검은색 상자 같은 건물은 소련 시절 라트비아 출신으로 독일군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이후 모스크바로 건너가 스탈린의 개인호위병으로까지 활동했던 소총수들의 업적을 기린 기념관이었으나, 현재는 1차 대전 종전부터 1991년 독립까지 라트비아인들의 투쟁의 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점령박물관으로 변화되었다. 한때 그 기념관의 주인공이었던 라트비아 소총수들의 붉은 석상이 여전히 그 옆에 서 있어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리가의 아르누보 양식

강성했던 리가의 과거를 보여주는 아르누보 건물들. 현재는 관공서나 학교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리가는 구시가지 이외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의 건물들로도 명성이 높다. 아르누보 양식은 유럽적인 소재에 국한하지 않고 이집트, 이슬람, 자연 등 다양한 요소들을 일반 건물에 과감히 차용한,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건축양식이었다. 요즘 회자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맞먹을 새로운 예술양식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었고, 리가는 브뤼셀, 헬싱키 등과 함께 19세기 말 아르누보 양식의 대표적인 도시로서 명성을 알리게 되었다.


리가 태생의 유대인 미하일 아이젠스타인의 설계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들은 구시가지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다.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외관의 건물들은 현재 학교, 관공서, 아파트 등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중세 시절부터 무역도시로서의 명성을 알렸던 리가가 얼마나 부강한 도시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가는 길
리가는 발트3국에서 가장 많은 노선이 취항하는 도시이므로, 한국에서 연결편을 찾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 루프트한자, 에어프랑스, 핀에어 같은 유럽의 주요항공사 이외에도 아에로플로트, 우즈베크 항공, 터키 항공 등 다양한 항공사가 리가로 가는 노선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발트3국 여행시 리가를 거점지역으로 삼아도 좋다. 라이언에어 같은 저가 항공 역시 리가로 가는 취항노선을 점차 확장하는 중이다.


러시아의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 대도시나 인근 키예프민스크 등지에서의 기차 노선 역시 잘 마련되어 있으나, 서유럽에서 오는 기차 노선은 아직 전무하다. 그 외 유로라인 같은 국제버스노선을 통해 유럽에서 버스로 들어오는 것도 가능하다. 빌뉴스탈린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수시로 있으며 5시간 정도 걸린다.

북유럽 白夜여행

북반구의 여름인 6~8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 중 하나는 북유럽이다. 이맘때쯤 북유럽은 파란 색조를 띤 하얀 밤, '백야(白夜)'의 나라로 변한다. 늦은 밤이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하늘과 거리의 신비하고 서정적인 모습은 북유럽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장면이다. 여기에 북유럽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호화 유람선을 타고 발트해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아올 수도 있다.

코레일관광개발은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 등 발트 3국을 비롯하여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핀란드 등 북유럽 4개국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까지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는 상품을 선보였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구(舊)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북유럽 특유의 붉은 지붕과 녹음 짙은 숲과 나무가 조화를 이룬 이 도시는 중세의 소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거리의 상점과 성벽, 지붕 등에서 14~15세기 소박한 중세를 만날 수 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는 중세 고딕양식부터 바로크, 현대 건축까지 시대별 건축물을 볼 수 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는 중세 고딕양식부터 바로크, 현대 건축까지 시대별 건축물을 볼 수 있다. / 코레일관광개발 제공

리투아니아의 성지(聖地)인 샤울랴이의 십자가 언덕에는 5만여개의 십자가가 모여 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800년 동안 쌓인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딕양식부터 바로크, 현대 건축물이 늘어선 거리를 걷다 보면 시간여행을 떠난 것 같다. 옛 시가지에는 발트 3국에서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돔 성당을 비롯하여 고딕풍의 '검은 머리 전당', 화약 탑, 스웨덴 문, 리가 성, 박물관 등이 줄지어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 가면 카를 요한 거리를 찾아보자. 왕궁과 극장은 물론, 뭉크의 그림 '절규'를 감상할 수 있는 국립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늦은 밤 요한 거리에서 백야를 감상할 수도 있다. 자연의 걸작이라 불리는 웅장한 피오르는 노르웨이 여행의 핵심으로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게이랑에르 피오르'는 세계 3대 피오르 중 하나로, 노르웨이 자연주의 화가들의 작품 배경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송네 피오르'는 세계에서 가장 길고 깊은 피오르. 송네 피오르의 종착지점인 베르겐은 소박한 멋을 풍기는 항구도시로, 목조건축물의 고풍스러움과 어시장(魚市場)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은 세계적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도시로 유명하다. 1913년 만들어진 인어공주 상(像)은 올해로 100살이 되었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역동적인 모습을 표현한 게피온 분수와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시청사도 독특한 매력을 자랑한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은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물의 도시'. 크고 작은 배들이 섬 사이를 오고 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구(舊)시가지 감라스탄은 중세 향기가 가득하다. 스웨덴 왕궁은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과 프랑스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이다. 호화 유람선 '실자라인(바이킹 라인)'을 타고 스웨덴에서 핀란드 헬싱키로 가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다.

헬싱키는 백야 현상이 절정인 6~8월 전 세계 관광객들로 붐빈다. 헬싱키 대성당은 헬싱키 항으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헬싱키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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