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4478m. 숫자부터가 고압적이다. 생김새는 또 어떤가. 너무 뾰족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독불장군 같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서 45도 이상의 급경사 암벽이 1500m 이상 솟아 있다. 하지만 첫눈으로 갈아입고 하얀 입김을 내뿜을 때는 장난꾸러기 같았다. 스위스 남부 '발레주(州)의 심장' 마터호른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 산은 깎아지른 듯한 호쾌한 모습으로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로고로도 쓰이고 있다. 발레주 여행은 '스위스의 숨은 보석'과의 만남이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는 없어도 동화 같은 마을은 있다. 스위스 산골마을 체르마트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아담한 집들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저 멀리 마터호른이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 스위스관광청 제공

◇뾰족한 머리의 마터호른

취리히에 도착한 뒤 기차를 3시간 타고 한달음에 마터호른의 관문 체르마트(Zermatt·해발 1650m)로 향했다. 산골마을 체르마트로 넘어가는 산악 구간에서는 알프스 명산에 대한 기대감으로 엉덩이를 자리에 붙일 수가 없었다. 기차는 첩첩산중으로 난 철로를 따라 달렸고, 산등성이를 돌 때 가끔 마테호른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마터호른 글래시어 파라다이스 전망대(3883m)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이곳에서는 몬테로사(4634m)에서 마터호른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4000m 이상의 고봉(高峰) 29개를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고봉은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수네가 파라다이스(2293m) 전망대는 땅속으로 달리는 케이블카를 이용해 갈 수 있다. 산 중턱에 펼쳐진 평지인데다 호수까지 있어 마터호른을 구경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다. 호수에 비친 마테호른의 모습이 낭만적이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 물결이 일면 산이 일그러진다. 호수에 비친 마터호른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한참 기다려야 했다.

등산열차를 이용하면 고르너그라트 전망대(3089m)에서도 마터호른을 볼 수 있다. 올라가는 길에는 울창한 나무와 꽃들이 마중나와있다. 중간역인 리펠베르트와 리펠알프 등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신혼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는 로이커바드의 노천온천. / 스위스관광청 제공

산을 내려온 뒤의 허기는 퐁듀로 달래면 좋다. 퐁듀는 빵을 긴 꼬챙이에 꽂아 와인과 함께 녹인 치즈에 찍어 먹는 요리로 이미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몬테로사 호텔의 윔퍼 슈투베 레스토랑은 색다른 퐁듀를 선보였다. 감자, 서양배, 토마토, 버섯도 같이 찍어 먹을 수 있다. 와인과 함께 먹으면 소화가 잘된다고 한다.

산 아래에 있는 체르마트는 청정마을이다. 바퀴를 달고 다니는 차는 전기차뿐이다. 자동차 여행객은 인근 도시인 태쉬에 차를 주차해두고 열차를 이용해 이 마을로 들어와야 한다. 자연을 지키려는 노력은 돌과 나무만으로 지은 전통가옥에도 잘 드러나 있다. 폭설에 대비하기 위해 납작한 돌을 이어 만든 지붕은 우리네 너와 지붕과 닮았다. 이 돌을 본 한국 사람들은 열에 아홉 "삼겹살 구워 먹는 돌판 같다"고 한마디씩 했다.

이 산중 마을은 사시사철 스키를 탈 수 있고 여름에는 하이킹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일본 관광객들이 많았다. 관광 안내책자에 일본어 안내까지 있을 정도다.

◇알프스의 온천 도시 로이커바드(Leukerbad)

로이커(Leuker)에서 산을 넘어온 보람이 있었다. 차창 밖은 천 길 낭떠러지였고 반대편 차창에는 험한 산들이 스쳐가는 길을 버스로 넘었다. 스위스 온천의 대명사 로이커바드는 그 명성 그대로였다. 이곳에서는 수영복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노천온천에 몸을 맡기면 된다. 눈발이 날려 코가 시리고 귀도 감각이 없지만 몸과 마음이 정화된 기분이다. 몸을 뒤로 젖히고 누우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알프스의 준봉들이 베개가 되어준다.

로이커바드의 역사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인들은 겜미고개(2314m)를 넘나드는 고단함을 온천으로 달랬다. 피카소, 마크 트웨인, 괴테, 모파상 등 유명 인사들도 즐겨 찾았다고 한다.

유럽 최대의 알프스 온천 브뤼거바드(Burgerbad)도 빼놓을 수 없다. 온천물에 미네랄이 풍부해 젊음을 되찾아준다고 한다. 월풀, 물놀이 기구도 있어 가족들이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린더너 호텔의 스파센터 알펜테름도 실내·노천 온천을 갖추고 있다. 마사지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스위스 스포츠 대표팀이 치료센터로 이용할 정도다. 40도 열탕도 있지만 대개 31~35도를 유지해 한국사람들에게는 다소 미지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누드 사우나도 있다.

케이블카를 이용해 겜미고개에 올랐더니 천하가 발 아래다. 바위산 밖으로 툭 튀어나간 전망대는 아찔하지만 시야을 넓혀준다. 산 위의 호수 다우벤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여름에는 알프스 야생화가 흐드러지고, 겨울에는 크로스컨트리 스키 길을 열어준다. 산상 레스토랑에서 내놓은, 맥주와 와인을 곁들인 멧돼지 구이와 스위스식 감자전 뢰슈티가 일품이다.

알레치 빙하는 태고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유네스코는 이 때묻지 않은 자연을 지키기 위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 스위스관광청 제공

◇거대한 얼음의 강, 알레취 빙하

알레취 빙하에서는 잠시 말을 아껴도 된다. 대자연은 모든 것을 냉동 보관해놓았다. 시간은 멈춰 서다 못해 켜켜이 쌓여 있다. 길이 23㎞, 깊이 900m, 너비는 무려 1000m. 알프스 최대이자 최장이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로 녹고 있다. 유네스코(UNESCO)는 이곳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했다.

빙하를 따라 형성된 알레취 숲은 하이킹 하기에 좋다. 전나무가 길을 안내하고 소나무가 포근하게 감싸준다. 노루와 마주치기도 했다. 아이거, 융프라우 등 4000m가 넘는 봉우리들을 보며 걸을 수 있는 건 덤이다.

리더알프(Riederalp)는 알레취 빙하로 가는 전진기지이다. 뫼렐에서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된다. 리더알프에서는 '콜레라'라는 별미를 맛볼 수 있다. 콜레라가 퍼져 있어 식재료를 교역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절,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만으로 만든 파이다. 음식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지만 맛은 일품이다.

◇중세로의 시간 여행, 시옹(Sion)

시옹은 두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 주변은 현대식이지만, 구시가지는 중세였다. 닳아서 윤기가 나는 구시가지의 길바닥은 이곳이 스위스의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것을 말해준다. 언덕 위에 있는 2개의 고성(古城)은 시옹의 상징이다. 발레르성 내 교회에는 14세기에 만든 파이프오르간이 있다. 옛날 감옥으로 사용됐던 곳에는 가정집이 들어서 있다.

시옹은 스위스의 최대 와인 산지.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은 클로 드 코세타 와이너리. 서 있기도 힘든 산비탈에 포도나무가 버티고 있는 걸 보면 경외감까지 든다. 와이너리에서는 와인 시음과 함께 색다른 요리들을 맛볼 수 있다. 꿀로 장식한 염소치즈, 버터를 곁들인 훈제 송어가 입맛을 돋운다. 요리 냄새에 식당 한쪽에서 낮잠 자던 개가 깨어나 손님 곁을 어슬렁거린다. 스위스 와인은 생산량이 많지 않아 거의 대부분 국내에서 소비된다. 시옹 구시가지와 와이너리에서 와인 시음을 즐길 수 있는 가이드 투어(5~10월)를 이용할 수 있다.

>> 여행수첩

●환율: 1스위스프랑=약 1260원

●스위스패스: 여러 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스위스패스를 구입하는 게 편하다. 8일짜리가 268유로(2등석 기준). 8일 동안 철도·버스·유람선 등 거미줄 같은 스위스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 판매는 www.raileurope-korea.com

●기억해두세요: 알프스 산맥 주변은 고산지대여서 음식이 좀 짠 편이다. 특히 수프는 거의 소금 덩어리다.

옷은 여러 겹 입는 것이 좋다. 3000m가 넘는 고봉들이 많은데, 산 아래는 10도 이상이어도 정상에는 살을 에는 영하의 바람이 부는 경우가 많다. 발레 주(州)의 시옹 등 서부지역은 불어를 사용하고, 체르마트·로이커바드·리더알프 등에서는 독어를 사용한다.

●스위스관광청: www.MySwitzerland.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