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상징하는 바로 그곳, 왕궁 Grand Palace

반들반들한 대머리 몽꿋 국왕역을 맡은 율 브린너는 이 영화, [왕과 나]에서 자존심 강하고 의욕적인 ‘왕’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만들어냈다. 애나 레오노웬스라는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마가렛 란든의 책 [애나와 샴의 왕]을 영화화 한 이 이야기는 샴의 왕과 그의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온 영국인 미망인인 애나의 갈등과 신뢰를 보여준다.

몽꿋 국왕, 즉 라마 4세는 태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외교의 장을 열었던 진취적인 인물로, 현재 룸피니 공원 입구에 가면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왕과 나]의 율 브린너와 그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애나의 이야기는 태국에서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는 이유로 전면 금지되어 있다. 책, 뮤지컬, 영화 모두 태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역사적 신뢰도와는 무관하게, 왕에 대한 존경심이 극진하여 왕을 영화나 뮤지컬 따위로 묘사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율브리너가 대머리가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좀더 호남형의 주인공이었으면 어땠을까 궁금하다.

정식 명칭이 “프라 보롬 마하 랏차 왕”인 왕궁은 1782년, 라마 1세가 수도를 방콕에 세우면서 건설하기 시작하여 끊임없이 증축하고 확장했다. 지금은 왕이 머물고 있지는 않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왕궁은 태국 현지인이나 여행자 모두에게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차끄리 마하 쁘라삿 홀(Chakri Maha Prasat Hall)”은 영화 [왕과 나]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유럽유학을 다녀온 라마 5세가 지은 이 건물은 태국의 양식과 유럽의 양식이 반반씩 섞여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왕실전용사원, 에메랄드 사원(Temple of Emerald Buddha)

라마 1세 때 왕궁과 함께 지어진 왕실전용사원인 왓 프라 깨우가 “에메랄드 사원”이라 불리는 이유는 분분하다. 흔히 빛을 받으면 더욱 화려해지는 외양 때문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사실은 본당에 모셔진 불상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프라 깨우”라 불리는 이 불상이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벽옥으로 만들어져 푸르게 빛나는 모습을 보면, 에메랄드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1m가 채 되지 못하는 아담한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은 태국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불상이다. 기원전 인도 북부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전설에 가까울정도로 구구절절 복잡한 사연을 안고 떠돌던 이 불상이 이곳으로 온 것은 1778년. 라오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라마 1세가 전리품으로 가지고 온 것인데, 이 불상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번성한다는 소문 탓인지 아직도 라오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태국이 이 불상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옷 갈아입히기 행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우기, 건기, 겨울, 세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는 행사는 국왕이 직접 집행한다. 계절마다 갈아입는 옷은 왓 프라 깨우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에메랄드 사원에 모셔져 있는 “에메랄드 불상”은 태국국민 최고의 보물이다.

프라 깨우에 대한 국민들의 애정은 접어두더라도 에메랄드 사원에는 볼거리가 많다. 부처의 갈비뼈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 황금으로 덮인 둥근 탑인 “프라 시 라따나 체디(Phar sri Rattana Chedi)”.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왕실도서관인 “프라 몬돕(Phra Mondop)” 등의 화려한 건축물들을 보며 태국의 전통적인 건축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손님은 왕이다, 카오산 로드 (Thanon Khaosan)

카오산 로드에서는 여행자들이 왕이다.


태국의 왕은 방콕 구석구석 손길을 안 뻗치는 곳이 없지만, 카오산로드에서만큼은 주춤하지 않을까. 여행자들의 해방구인 이곳은 방콕의 일부라기보다 세계의 일부에 가깝다. 여행자들은 이곳에 모여 “여행자들의 나라”를 실감하며 흥겨워한다.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모두 ‘왕’이다.


카오산 로드는 밤마다 축제가 벌어진다. 해가 질무렵이면 교통이 통제되며, 전 세계에서 몰려든 배낭족들은 어슬렁어슬렁 길거리로 나온다. 폭 10여 미터, 길이 350여 미터의 길지 않은 골목인 이 거리에는 여행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손때묻어 낡은 여행가이드북에서부터, 술과 분위기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환락의 순간까지. 값싼 숙소, 기념품가게, 현지여행사, 여행용품가게, 중고가게, 옷가게, 노천카페와 바. 열기는 밤새 식지않는다. 사람들은 길거리에 앉아 레게머리를 땋거나, 맥주병을 들고 배회한다.


누군가는 거리공연을 하고, 누군가는 길가에 세워놓은 한 칸짜리 책장인 헌책방에서 다음 여행에 필요한 책을 고른다. 짧은 일정의 여행자에게 맞춤형 강습을 제공하는 무에타이 교습소가 있는가하면, 거리에는 헤나와 초상화 그려주는 사람들이 진을 친다. 장기체류자들이 어느새 직원이 되어있는 바는 손님주인 구분없이 어울린다.



왕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두싯(Dusit) 위만멕궁전(Vimanmek Palace)

왕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왕은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관광지 한가운데에서 이미 오래전에 탈출했다. 평온하고 한적한 두싯에 새로 궁전을 짓고 이사한 사람은 라마 5세. 유럽의 건축양식을 도입한 왕궁이 늘어선 이 지역의 이름, 두싯이 뜻하는 바는 “천국”이다.

1901년에 완공된 첫 왕궁이 위만멕 궁전이다. 유럽풍과 태국의 전통이 적절히 조화된 이 건물의 특징은 티크목으로 지었다는 것. 쇠못은 전혀 쓰지 않았다.

내부에 81개의 방이 있는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왕이 살던 시절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31개의 전시실이 오픈되어있는데, 왕의 삶을 엿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응접실, 침실, 서재, 욕실, 드레스룸에 궁녀들의 방까지. 그리고 그 방에서 쓰던 물건들까지 잘 보존되어있다. 라마5세와 가족들의 고급스러운 취향이 반영된 물건들은 왕족의 생활을 상상하게 한다. 정교하고 섬세하며, 또 아주 고급스럽다.


두싯에는 위만멕 궁전 이외에도 다양한 볼거리들이 있다. 단일건물로는 방콕에서 가장 크다는 아난다 사마크홈 궁전, 방콕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히는 대리석 사원, 주로 방콕 현지인들에게 인기있는 두싯 동물원, 갖가지 수공예품이 전시되어있는 아비섹 두싯 궁전박물관, 창 똔 왕실 코끼리 박물관, 왕실차량박물관 등등.


그러니까, 결국 왕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칫랄라다 궁전(Chitralada Palace)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곳은 삼엄한 경비로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 있다.





단일건물로는 방콕에서 가장 크다는 아난다 사마크홈 궁전

왕이 내려준 도시의 배꼽, 락 므앙(Lak Muang)

첫번째 기둥은 라마 1세가 방콕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국에서 왕은 도시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왕은 도시에 ‘배꼽’을 선사한다. 그것을 ‘락 므앙’이라고 하며, ‘도시의 기둥’이라는 뜻을 지닌다. 도시를 건설하기위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상징적인 기둥을 세우는 것. 그 도시가 번영하고 평화롭기 위해 락 므앙은 꼭 필요하다.


방콕의 락 므앙은 두 개다. 첨탑 모양의 사원 안에 나란히 서 있다. 둘 중에 높은 것은 약 4m의 크기로 1782년 라마 1세가 세운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라마 4세가 오래된 기둥을 대신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도시마다 기둥의 모양은 다르다. 방콕의 락 므앙은 연꽃봉오리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방콕으로부터 거리를 표시하는 기준점이 바로 락 므앙이다. 하지만 그런 실질적인 역할보다 더 큰 역할을 맡고 있다. 태국인들은 기도를 하려고 끊임없이 이곳을 찾는다. 불공을 드리고 소원을 빈다. 외부에 마련된 불당에도 참배객들이 쉴새없이 모여든다. 락 므앙만 보는 것이 심심하다면, 락 므앙 입구의 작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료 전통공연을 기다리자. ‘리께(Like)'라는 이름의 이 공연은 일종의 무용극인데, 코믹한 재미가 있다.




왕의 강, 차오프라야 강(Mae Nam Chaophraya)

태국에서는 강도 왕을 위해 흐른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가장 큰 강인 차오프라야 강은 일명 메남 강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태국어로 ‘강’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식명칭인 차오프라야는 장군, 또는 전하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왕의 강”을 의미한다.


차오프라야 강은 수상보트로 사람들을 실어보내는 대중교통수단으로도 분주하지만, 관광코스로도 톡톡히 제 몫을 한다. 왕궁 주변, 왓 라캉 등의 유적지와 로얄 오키드 쉐라톤, 오리엔탈 방콕, 페닌슐라 방콕 등 특급호텔들도 볼 수 있다. 그런 화려한 건물들 뿐 아니다. 수상시장과 일반 서민들이 사는 수상가옥을 보는 것도 보트를 타고 강을 떠돌며 느낄 수 있는 재미다. 방콕의 다채로운 풍경들은 모두 강가를 중심으로 모여있다. 차오프라야 강이 가장 아름다운 날은 매년 열한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이다. 태국의 한가위라 할 수 있는 “로이크라통(Loy Krathong) 축제” 때문이다. 일명 “빛의 축제”인 이날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차오프라야 강변의 호텔과 레스토랑은 이미 수개월전에 예약이 끝난다.



방콕의 한가운데에는 왕의 강이 흐른다.

이 날의 가장 핵심적인 행사는 “크라통”을 띄우는 것이다. 바나나 잎사귀로 두른 작은 판에 조그만 촛불과 향, 꽃들을 얹어 만든 일종의 꽃바구니다. 이 바구니에 그간에 지은 죄와 불운을 실어 물에 띄워보낸 뒤,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요즘은 수질오염문제가 대두되어, 빵으로 크라통을 만든다고 한다. 빵으로 만든 크라통은 가라앉으면서 물고기들의 식사가 된다. 행운을 빌면서 다른 생명체에게 음식을 베풀게 된 것이다. 왠지 행운이 더 기껍게 다가올 듯 하다.




왕이 행차하는 길, 랏차담넌

“랏차담넌”은 “왕이 행차한다”는 의미다. 왕이 거주하던 두 개의 건물인 왕궁과 두싯 궁전을 연결하는 8차선 도로로, 지어지던 당시인 라마 5세 때는 가장 크고 넓은 도로였다고 한다. 길의 중앙분리대에는 국왕과 왕비의 사진이 길게 전시되어있고, 왕의 생일이나 왕비의 생일 같은 왕실행사가 있을 때는 화려한 조명으로 꾸며진다. 말 그대로, 왕의 길이다.


왕이 행차하는 한가운데는 민주기념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길은 다시 세 개의 길로 나누어진다. 왕궁에서 사남 루앙까지의 길은 랏차담넌 나이, 그곳에서 민주기념탑까지는 랏차담넌 끌랑, 다시 그곳에서 두싯의 궁전까지는 랏차담넌 녹이라고 부른다. 랏차담넌을 지나가며 눈여겨볼 만한 건축물로는 민주기념탑과 라마3세 공원이 있다. 민주기념탑은 랏차담넌 끌랑과 랏차담넌 녹의 교차로에 자리하고 있다. 1932년 6월 24일에 일어난 입헌 민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탑인데,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위령탑이기도 하다. 라마3세 공원(Rama 3 Prak)은 랏차담넌 끌랑의 대로변에 위치한 공원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약 60년간, 재임기간동안 사원을 건설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그는 서자출신이었던지라 그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라마 2세의 아들이었던 라마 4세로 왕권은 돌아가게 된다. 귀빈을 맞이할 때 환영식이 열리곤 하는 뜨리묵 궁전(Trimuk Palace)과 왓 랏차낫다가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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