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대 다른 공간의 그녀들, 꿈 하나로 이어지다

가끔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지금이라면 조금 다른 답을 하겠지만, 파리의 '코르동 블루'로 요리 유학을 떠나겠다고 결심했던 그 순간, 인터넷 서점의 에디터로 2년여간 일하며 모아둔 100여 권의 요리책을 '성경'처럼 정독하던 그 시절의 나라면 별다른 의심 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불행히도 재능 없는) 요리사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그날 들어온 가장 좋은 물건을 사기 위해 마장동 우시장과 경동 시장을 쉼 없이 들락거리는 성실한 아빠를 보고 자라난 내게, 천장 끝까지 칼과 망치, 연장들로 가득 찬 한식집 주방은 전혀 낯선 곳이 아니었다. 나는 핏물을 빼기 위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고깃덩어리와 전라도와 연변 사투리가 뒤범벅된 터프한 주방의 언어에 대해서라면 꽤 잘 알고 있었다. 

칼잡이들이 응급용으로 칼을 갈기 위해 종종 소주병을 사용한다는 것과, 월급날이면 과천 경마장에서 월급의 절반을 잃고서도 술집에서 아낌없이 팁을 남발하던 모습에서 뒷골목 정서 같은 것을 보았다. 어린 눈으로 보기에 요리사들은 마치 월급이 너무나 부담스러워 그 돈을 당장 없애버리는 데 골몰하는 엉뚱한 사람들 같았다.

영화‘줄리&줄리아’는 1950년대 프랑스 파리와 2002년의 미국 퀸즈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준다. 현재 파리의 모습에서 새로운 몇 가지만 제외하면 1950년대의 파리 모습이 된다. / 블룸버그
고백하자면 나는 한때 그런 삶이 주는 울퉁불퉁한 자극들을 동경했다. 그들은 대부분 수틀리면 당장 가게를 떠나버리는 무책임한 부류들이었지만, 비교적 안온하게 자라던 내겐 경외의 대상이었다. 아마도 그런 영향 때문인지 인터넷 서점 직원이던 시절, 문학을 전공했던 내가 가장 사랑했던 분야가 '문학'이 아니라 '가정요리' 분야였는지 모른다. 그때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라는 제목으로 최고의 요리책으로 등극했던 '나물이'의 선전을 지켜보며 나는 요리를 정식으로 배우지 않아도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기만 한다면 요리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소박한 생각을 했었다.

영화 '줄리&줄리아'는 1950년대 파리에서 활동하던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와 그녀의 레시피를 재현하고자 노력하는 2002년의 미국 여성 줄리 파웰, 이 두 명의 실존인물의 이야기다.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낯선 파리에 정착한 줄리아 차일드는 자신의 열정이 요리에 있다는 걸 깨닫고 미국인들에게 친숙한 요리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전화번호부로 써도 됨직한 거대한 분량 때문에 출판사로부터 번번이 자신의 책을 거절당한다.

브루클린을 떠나 이제 막 퀸즈의 피자집 2층으로 떠밀려 온 줄리 파웰은 9·11테러 사건 직후 온갖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의 고민을 전담하는 보험사 직원으로 일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정말 원했던 건 보험사 직원이 아니었다는 자괴감에 시달린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기적처럼 떠오른 건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에 나온 524가지의 메뉴를 직접 만들어보며 그것을 1년 안에 '블로그'에 모두 올리겠다는 것. 사실 그녀는 오랫동안 작가가 되길 원했다.

줄리가 퇴근 후, 힘든 몸을 이끌고 꼬박꼬박 하루치의 요리를 하며 자신과 다른 시간대와 다른 장소에서 산 줄리아 차일드와 교감하는 장면은, 퇴근길 북적대는 버스 안에서 살만 루시디의 '정오의 아이들'을 읽거나, 늦은 밤 부엌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하루치 분량의 소설을 쓰던 지난날의 나를 떠오르게 했다. 잠이 쏟아지거나 뭉친 어깨가 망치로 두들기듯 아플 때마다, 나는 부엌 너머 창문을 통해 보이는 손톱만한 달을 바라보며 이젠 낡아 비틀어진 내 소망이 이루어지길, 아주 작은 시간에도 진심이 와 닿아 최고의 글로 숙성되길 기도했었다. 요리와 소설 쓰기는 한 치도 다르지 않아서, 물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노동집약적인 과정의 일들이었으므로 한밤까지 이어지는 이런 노동은 나를 매일 졸고, 매일 아프고, 매일 지각하게 했다.

'줄리&줄리아'를 보다가 나는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그때, 내게 닥쳤던 어마어마한 양의 고독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토록 원하던 작가가 되기엔 자신의 재능이 형편없을지도 모른다는 구체적인 공포와도 직접 관련된 것이었는데, 실제 매번 떨어지던 문학공모의 숫자와 비례해 내 외로움을 증폭시켰다. 1950년대 파리의 줄리아 차일드가 출판사로부터 자신의 요리책을 거절당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절망감이 뼛속까지 와 닿는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잊었던 요리에 대한 열정, 한때 그것이 내게 얼마나 큰 열망이었는지를 상기시켰다. 작가가 된 후, 내가 냈던 세 권의 소설 속에 요리사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 재현된 1950년대 파리는 여전히 아름답고 낭만적이다. 지금의 파리에서 얼마간의 현대적인 것들을 제거하면 만들어질 친숙함이 가득했다. 그것은 EBS를 통해 가끔 볼 수 있는 옛날 영화 속의 서울, 1960년대 전차가 다니던 서울의 아름다움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전통'이라 부를 수 있는 건물과 카페가 여전히 건재해 있었다. 1950년대식 빈티지 카와 2002년의 뉴욕 지하철이 지나다니는 퀸즈의 뒷골목 풍경이 교차하는 이 영화의 매력은 사실 도심의 풍경이 아니라, 그 도시를 살아간 두 여자의 '꿈'과 직결된 것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내 친구는 미아리 시장통, 재건축이 확정된 중국집 2층 건물에 세 들어 살았다. 그녀의 집에 가면 문을 닫아놓아도 하루 종일 양파와 춘장 볶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나는 그녀가 모아놓은 만화책 더미 속에서 그녀가 쓴 엉터리 시나리오를 읽으며 온갖 잘난 척으로 훈계를 늘어놓곤 했는데, 우리는 허기에 시달릴 때마다 전화 걸 것도 없이 대뜸 창밖으로 소릴 지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줌마! 짜장 둘!!" 그 건물에선 누구나 다 그렇게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 박력 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지금 뉴욕 윌리암스버그의 어느 건물 4층, 손만 뻗으면 옆 건물의 벽이 만져지는 곳에 세들어 있다. 잠시 꿈을 보류했던 그녀가 사표를 던졌을 때, 나는 농담처럼 "돈 되는 영화 찍어"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꿈에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프랑스 요리'가 아닌 '자장면'이 먹고 싶었던 건 그래서였다. 어떤 이의 꿈을 떠올릴 때마다 기름에 볶은 양파 냄새가 내 추억을 심하게 건드렸으므로.

●줄리&줄리아

줄리아 차일드가 알렉스 프루드옴므와 함께 쓴 자서전 '프랑스에서의 나의 삶(My Life in France)'과 2002년부터 자신의 블로그에 그녀의 요리를 올린 줄리 파웰이 2005년 출간한 '줄리 앤 줄리아:365일, 524개 레시피, 하나의 조그만 아파트 부엌(Julie & Julia: 365 Days, 524 Recipes, 1 Tiny Apartment Kitchen)'을 원작으로 한 노라 애프런 감독 작품. 메릴 스트립과 에이미 아담스가 주연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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