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겐 누구나 욕망이 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여 살게 되면서 이 욕망은 단순히 생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화되었다. 즉, 욕망은 개인의 몸에서 시작하여 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적 욕망으로 나타났다.

여기에서 욕망의 단계 이론이 나온다. 20세기에 이름을 떨친 미국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가 말하는 욕망의 5단계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생리적 욕구에서, 안전에 대한 욕구로,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에서 자기존중의 욕구로, 급기야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면 사회적으로 인정받길 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예를 본능적으로 존중한다. 그것 때문에 결국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냥 눈 딱 감고 잠시 비루함을 참다 보면 곧 잊어버릴 텐데, 그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간욕망 중 위의 4단계 혹은 5단계 욕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는 사태라 할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욕망, 비석과 개선문을 낳다

그런 이유로 동서고금의 문화는 사람들이 큰 명예를 얻게 되었을 때 그것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알리려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당대에 알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자손손 후대에 이르기까지 알리고 싶어 하였다. 어떻게 하면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그 명예를 알게 할 수 있을까. 그렇다, 내구성이 강한 조형물에 그 취지를 기록하는 방법이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사회적 명예는 여러 가지 업적을 통해 얻어진다. 그중에서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대단한 명예이다. 한 사람의 위대한 장군으로 말미암아 한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는 전투에서 이겼다면 그 장군은 길이 이름을 남길 사람이다. 한 사회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거나 덕을 베푼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당대를 넘어 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칭송하길 원하는 마음으로 조형물을 만들었다.

동양에선 이를 위해 주로 비석을 세웠다. OO대첩비나 OO승전비 혹은 OOO송덕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데 비석만 설치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비석과 함께 비각을 설치하기도 했다. 열녀문의 경우는 남편이 죽었음에도 정절을 지켜가며 산 여인의 덕을 존숭하기 위해 집 주변에 지어진 것이다. 그것도 사실은 문 안에 비석을 넣고 비각을 만든 것이었다.

서양(로마)도 사회적 명예를 당대와 후대에 알리겠다는 생각에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 방법이 동양과는 다를 뿐이다. 그곳에서는 거대한 석조 개선문(triumphal arch)이 세워졌다. 이것은 원래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나 황제의 업적을 기리는 승전 기념문이었다. 그러나 개선문은 전쟁과 연결된 업적만을 기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한 경우나 한 지역에서 황제가 탄생한 경우도 세워졌다. 나아가 개선문이 순수한 송덕비 노릇을 한 경우도 있었다. 어떤 거부가 자신의 돈으로 다리를 놓거나 도로를 가설하면 그의 업적을 기리는 문이 도로에 세워졌다.

개선문은 역사적으로 로마제국이 만든 대표적 문화유산이다. 로마문명에 앞선 서양문명의 원조인 그리스에서조차 로마의 개선문과 같은 형태의 조형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선문이 오로지 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로마인들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보는 것도 정확하진 않다. 로마인들에게 기술문명을 전수시킨 에트루리아인들은 도시의 입구에 잘 조각된 아치형 문을 설치했다.

기원전 7세기 메소포타미아를 통치한 바빌로니아에는 네브카드네자르(구약 성경에 나오는 느브갓네살) 왕이 만든 이슈타르문은 바빌론 왕조의 위엄을 과시하면서 바빌론성 입구를 장식했다. 이런 주변 문화의 영향으로 로마는 언젠가부터 개선문을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의 이슈타드 문, 신바빌로니아의 왕 네브카드네자르가 만든 바빌론 성의 문이다. 이것은 그냥 문이 아니다. 왕과 왕국의 권위를 기리는 문이다.

ⓒ 박찬운

아우구스투스, 개선문에 황제의 위엄을 더하다

로마의 개선문은 공화정 시대에 이미 일반화되었다. 공화정 시절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을 세운 장군은 승리자로서 인정되어 승리를 기념하는 조각상이 들어간 아치형 조형물을 스스로 만들었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꺾어 로마를 위기에서 구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카피톨리노 언덕에 개선문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화정 시절의 개선문 흔적은 지금 찾을 수 없다.

로마제국의 개선문은 제정 이후 그 의미나 설치 절차가 크게 바뀌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스스로 개선문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오로지 황제만이 그것을 설치할 수 있는 것으로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말은 개선문이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 개인의 사적 치적물에서 국가가 관장하는 공적 기념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제정 이후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개선문을 만드는 경우라도 그것은 장군 개인 기념물이 아니라 원로원의 승인 아래 황제가 세우는 국가적 기념물이 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로마나 과거 로마제국의 주요 도시에서 보는 모든 개선문은 제정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포로 로마노, 이곳은 19세기까지만 해도 대부분 땅 속에 있었다. 오른 쪽에 티투스 개선문이 보이고 그 뒤로 콜로세움이 보인다.

ⓒ 박찬운

로마에 가면 시내 한가운데에 '포로 로마노'라는 로마유적지가 있다. 카피놀리노 언덕이나 옆의 팔라티나 언덕에 올라가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전경을 볼 수 있는데 비록 무너진 제국의 유적지이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한다면 화려했던 로마제국의 수도가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다.

거기엔 신전이 있고, 공회당이 있고, 사람들이 활보하던 거리가 있으며 시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두 개의 개선문이 눈에 들어온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붙어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맞은 편 콜로세움 쪽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포로 로마노 유적은 아니지만 티투스 개선문 너머로 콜로세움과 함께 서 있는 개선문이 있다. 바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다.

개선문의 모양은 한 가지가 아니다. 로마에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위의 3개인데, 그 중 티투스 개선문은 아치가 하나이고, 나머지 두 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아치가 3개이다. 이외에도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에 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과 같이 4면에 아치를 하나씩 배치하여 만든 사각 4면 개선문도 있다.

로마제국의 개선문은 통상 그 표면에 여러 장식을 넣어 만들었다. 전면을 보면 대리석 기둥이 아치 양쪽에 장식되어 있고, 아치 상단에는 승리자의 업적을 기리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치의 옆 표면에는 여러 가지 부조가 붙여져 있는데 주로 군대의 행진, 승리자의 역할과 업적을 묘사한 그림, 적으로부터 노획한 무기 등이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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