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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로테르담 : "내 머릿속은 벌써 지구 반대편… 그곳으로 '훌쩍' 떠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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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은 벌써 지구 반대편… 그곳으로 '훌쩍' 떠나고 있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풍경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이 문득 정지해 있고, 멈춰진 세상 속에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나만의 음악이 흐르는 것. 그때 들리는 음악이 기타나 피아노곡이면 좋겠다. 

네덜란드 로테르담 부근 킨더다이크 풍차마을의 얼어붙은 운하에서 시민들이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다. 유럽 건축의 새로운 실험장이 되고 있는 로테르담엔 새로 짓는 건물이 늘면서 옛것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 조선일보DB

눈을 감고, 지구의 절반을 돌아, 내가 있는 도시와 전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고 싶을 때가 있다. 다른 종류의 다양한 동전을 쓰고, 평소와 다른 쪽 자동차 문을 열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과 오전 11시의 햇살을 닮은 금발머리의 나른한 몸체를 바라보는 것 말이다. 그런 식의 여행이 가능한 건, 아마도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일일 것이다.

영화 '조금만 더 가까이'의 프롤로그에서 폴란드인인 그루지엑은 자신의 약혼녀 안나를 그리워하다가 그녀의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로 무작정 전화를 건다. 서울에 있는 효서가 우연히 이 전화를 받게 되고, 상처받은 목소리의 이 남자가 말하는 도시 로테르담이 그때부터 음악과 함께 흐르기 시작한다. 비스듬히, 늘 떠나길 갈망했던 보들레르의 시구처럼, 외로움의 각도만큼.

로테르담은… 바람이 많이 불고, 구름이 많고, 구름은 대부분 빨리 움직인다. 약간은 기분 좋은 날씨. 시끄러운 횡단보도의 신호등에는 거대한 시계 초침 소리 같은 게 들리는데, 신호에 따라 '띠똑띠똑' 다른 소리를 낸다. 거리는 점잖은 편이지만 공사하는 곳이 많다. 로테르담 여기저기에 옛날의 것들이 사라지는 중이다. 이곳에는 중국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줄곧 자전거를 탄다. 오늘 나는 상점에서 북극곰을 파는 곳을 봤다.

그루지엑이 말하는 로테르담의 거리 풍경들을 보면서 나는 상상 속의 여행을 떠났다. 유명한 관광지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저 상상 속에서 가능한 여행 말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에는 기존 영화들과는 다른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모두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연결된 단편의 모음인 특이한 이음매 때문이다. 고장 난 사랑에 대한 다섯 개의 이야기 속에는 서로 다른 얼굴들이 들어 있다. 세연의 새로운 사랑은 게이다. 비 내리는 저녁, 스토커처럼 집착하며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은희 앞에서 현오는 결국 울어버린다. 헤어졌지만 끝내 헤어지지 못해 자신을 괴롭히는 이 여자,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이 생겨버렸다는 영수의 고백을 듣는 운철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지도 모른단 두려움 때문에 폭발한다. 친구이며 음악 동료인 주영과 혜영은 사랑에 대해 이런저런 얘길 하는데, 결론은 한결같다. 사랑, 너무 힘들다!

다섯 개의 이야기, 다섯 커플의 이야기 속엔, 반짝거리는 청춘의 그림자가 녹아 있다. "너 때문에 나 연애불구야!" 라는 핏기 어린 저주와 "서로에게 겁도 없이 마음 주는 거, 쟤네들 너덜너덜해질 거야!"라는 축축한 말들이 청춘이기에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어쨌거나 청춘이란 그런 것이기에, 그것은 불완전하고 비논리적이며 지극히 충동적이고 모순적이다.

한국에서 단편소설만 쓰며 살아가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몇 년째 단편 영화만 만드는 감독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쩜 희귀한 일이다. 아니, 단편영화는 어쩌면 단편소설이 아닌 '시'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자발적인 가난의 세계에선 그러므로 아픔과 상처에 능통한 대가가 될 수 있다. '청춘'이란 단어 하나로 바느질하듯 아름다운 시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같은 인상적인 단편들을 발표했던 김종관 감독의 이야기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단편의 대가(大家)가 비로소 장편을 썼을 때, 범할 수 있는 범주의 실수들을 이 영화가 모두 다 보여준다고.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이어붙인 것도 온전한 장편의 리듬을 가지지 못한 불구의 몸처럼 보일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짧은 호흡으로 이어붙인 매듭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리듬이 생겼고 그것에는 그것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파리 신드롬'이라는 것이 있다. 파리의 낭만을 기대했던 사람이 파리 시내의 지독한 교통정체와 길가에 널린 개똥, 낡은 지하철의 거지들과 지린내에 실망해 결국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증상이다. 이렇듯 여행은 뜻하지 않는 부작용을 주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프롤로그에서 본 로테르담을 생각했다. 그리고 먼 옛날, 네덜란드를 여행하다가 여행을 포기한 채, 방 안에 앉아 여행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된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별장에 살면서 여행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물건들로 자신의 방을 꾸몄다. 선박 회사의 항해 일정표와 세계지도, 색다른 향신료가 담긴 작은 단지와 여행사 사무실의 책상 같은 것들을. 그가 깨달은 것은 상상력이 실제적인 경험보다 낫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영화와 상상만으로 훨씬 더 나은 로테르담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선 내내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다. 북극곰을 살 수 있는 작은 상점과 상처받은 연인들의 뒷모습이. 


●조금만 더 가까이: '폴라로이드 작동법', '연인들', '낙원' 등 꾸준히 단편 작업을 해온 김종관 감독의 첫 번째 장편 데뷔작. 정유미, 윤계상, 요조, 윤희석 등 다섯 커플의 고장 난 사랑에 대한 시적이고 중얼거리는듯한 영상으로 펼쳐지는 옴니버스식 영화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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