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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차르와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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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이 되고 싶었던 차르, 도시를 창작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 피터의 도시. 그 이름은 도시의 수호자인 성 베드로(Peter)에서 따왔다지만, 동시에 이 도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바이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표트르 1세(피터대제, Peter I the Great)는 러시아를 유럽의 제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도읍을 정한 곳이 발틱 해를 향해 있는 연안의 늪지대. 네바 강 하구의 음침한 섬들 위에 도시를 건설하자고 했을 때 사람들은 조소했다. 그러나 대제는 거침이 없었다. 스스로 오두막에 기거하며 관리들과 노동자들을 독려했다. 전 러시아에 석조 건축을 금지시키고, 모든 자재를 네바 강 하구로 실어오게 했다. 그리하여 100개의 섬이 365개의 다리로 이어진 북쪽의 베니스가 탄생했다.


도시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 수십 년간 레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이제 다시 피터의 것으로 돌아갔다. 이곳의 가장 유명한 상징물인 '청동 기마상(Bronze Horseman)'은 대제의 위엄을 기린 조각상이다. 말을 탄 대제가 서 있는 돌은 전설의 '번개 맞은 돌(Thunder Stone)'로 무려 1500톤에 이르는데, 이것을 오직 인력만으로 6Km나 끌어 핀란드 만에 가져온 뒤 배에 실어 지금의 위치에 옮겨놓았다.

백조, 죽어가면서 태어나다.

1890년의 어느 날, 비쩍 마른 소녀 하나가 엄마의 손을 잡고 회청록색의 마린스키 극장(Mariinsky Theatre)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그때는 알렉산드로 골로빈이 만든 황금의 커튼 장식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프티파(마리우스 페티파)의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그녀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소녀는 엄마를 보채 바로 그 극장에 있는 제국 발레학교(현재의 바가노바 아카데미)를 찾아갔다. 처음엔 너무 어리고 아파 보인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나 11살이 되어서는 기필코 입학 허가를 얻어냈고, 혹독한 훈련을 거친 소녀는 러시아의 백조가 되었다.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Pavlova)는 남성 무용수 바츨라프 니진스키와 더불어 러시아 발레의 전설을 만들어낸 대표적 인물이다. 특히 1905년, 마린스키 발레단의 정식 단원이 된 직후 발표한 소품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는 그녀의 이니셜 같은 작품이 되었다. 밝고 경쾌한 백조가 아니라 죽음 직전에 가냘픈 몸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백조의 모습은 이전의 발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먼 나라를 떠돌아다녀야 했지만, 파블로바는 고향의 백조들을 잊지 않았다. 1923년 러시아에 극심한 기근이 닥쳐오자 그녀는 기꺼이 구호물품을 보냈고, 마린스키 극장 앞에는 물품을 받으려는 무용수들이 긴 줄을 지었다고 한다.


'빈사의 백조' - 안나 파블로바는 죽는 순간까지 백조 의상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벌떼 같은 작곡자들

콘서바토리의 중흥을 이끈 림스키-코르사코프.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콥스키(차이코프스키), 프로코피예프,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러시아와 세계를 대표하는 작곡자들,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음악인들, 그리고 바로 마린스키 극장 건너편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the Rimsky-Korsakov St. Petersburg state conservatory)에서 음악을 배운 사람들이다.


콘서바토리는 1862년 안톤 루빈스타인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오늘날의 영광을 이야기할 때 1871년부터 1906년까지 이 학교에 몸담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첫 강의를 맡았을 당시 그는 27살의 해군 장교였는데, 발라키예프, 무소르그스키 등과 함께 소위 '5인조(the Five)'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부 유럽 음악의 모방이 아닌 '러시아의 음악'을 하기 위해 애썼는데,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던 것이 새로운 음악을 위한 활력소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상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자,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자신의 음악적 기초가 너무나 취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미 콘서바토리를 통해 충실히 공부해온 차이콥스키에 상담을 요청했고, 러시아의 독자적인 음악을 위해서도 유럽 음악의 기초를 충실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앞서 더 큰 공부를 자청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후 후진 양성에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열정이 콘서바토리를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로 만들어낸 것이다.

극작가 체호프, 사상 최악의 야유를 받다

189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Alexandrinsky Theatre)에서 [갈매기]가 초연된 후, 극작가 안톤 체호프(체홉)는 스태프들과 가족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극을 쓰지 않겠다." 그만큼 연극은 엉망이었다. 고독과 몽환의 이야기는 스타 연기자들을 동원해 지나치게 화려하게 만들어졌고, 멜로드라마를 거부한 실험적인 극은 관객들은 물론 제작진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상태였다. 2막이 시작되자 야유는 넘쳐났고, 주연 여배우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후에 모스크바에서 새롭게 상연되어 호평을 얻기는 했지만, 체호프는 그 공연도 만족하지 못했다.


이렇게 체호프에게 연극사에 길이 남을 좌절을 가져다준 극장이지만, 알렉산드린스키는 러시아 공연 예술의 메카로 오늘날까지 그 영광을 이어오고 있다. 이 도시 곳곳을 빛내온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카를로 로시(Carlo Rossi)가 디자인한 건물로, 안팎으로 19세기의 우아함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극장 앞의 작은 광장은 크리스마스 즈음에 열리는 축제로 많은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체호프를 좌절시킨 제국 시대의 극장, 알렉산드린스키.

도스토옙스키의 다락방에 숨어들다

도스토옙스키,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람들에게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심장이다. 그런데 그 심장은 살짝 얼어 있다. 마치 북쪽 바다처럼 말이다. 이 도시는 톨스토이, 고골리, 고리키 등 러시아 문학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도스토옙스키만큼 이 도시의 정신을 반영한 작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제국의 영광은 영광이지만, 19세기 러시아인의 삶은 곤궁하기 그지없었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검은 빵 한 조각을 먹지 못한 채 이상을 향해 버둥거리는 청춘들이 넘실거렸다. 도스토옙스키(도스토예프스키)는 1860년대 이 도시의 작은 쪽방에 기거하며 거의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인간 군상들을 바라보며 소설을 써나갔다. 서유럽의 합리주의를 쫓지만 러시아의 종교적 영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 정신의 풍요를 자랑스러워하면서도 물질적 빈곤으로 고통 받는 인간들….


이 도시에는 도스토옙스키가 기거하며 글을 썼던 두 장소가 남아 있다. 센나야(Kaznacheyskaya ul 7, Sennaya)의 좁은 골목에서 그는 세 개의 방을 옮겨 다녔는데, 바로 [죄와 벌]을 썼고 그 무대가 되는 곳이다. 블라디미르스카야(Vladimirskaya) 지하철 역 근처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이 박물관(Dostoevsky Museum)의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썼다고 한다.

일리야 레핀의 리스트를 훔쳐보다

19세기부터 혁명 이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살았던 예술가들의 리스트는 정말로 화려하다. 문학, 음악, 연극, 발레 등 수많은 분야에서 교과서 레벨의 이름들이 줄을 잇고 있다. 21세기의 우리가 그 사람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조악한 기술로 찍은 흐릿한 흑백 사진은 젖혀 두자. 그들에게는 국민 초상화가가 있었다. 바로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차르와 톨스토이멘델레예프까지, 그의 리스트에 들지 않았다면 러시아의 유명인이라고 할 수 없다.


레핀은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초기에는 고국에 있는 코사크 족의 호쾌한 일상과 풍습을 그려냈다. 이어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과 같은 작품을 통해 방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시선으로 민초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그려내면서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시대를 만들어간다. 완숙기에 접어들어서는 러시아 여러 국민 영웅들의 초상, 국가적 행사들을 기록하는 데 집중해 역사적 기록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도 했다. 러시안 뮤지엄(Russian Museum)은 '사드코(Sadko)' 등 그의 걸작들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러시아 사실주의 대가, 레핀의 '사드코'.

‘21세기의 푸시킨들’을 만나자

비주얼 아티스트 바비 바다로프는 푸슈킨스카야-10의 시인 콘테스트에서 수상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정말로 많은 예술가들의 리스트를 읊었지만, 그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 하나를 뽑으라면 그 답은 명료하다. 시인 푸슈킨(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유진 오네진) 등 러시아 문학의 원형이 되는 위대한 작품들을 줄줄이 낳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내를 유혹한 남자와의 결투 끝에 죽었다는 로맨틱한 최후가 더욱 큰 애정을 불러일으켜 왔다.


우리는 이 도시 곳곳에서 푸슈킨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푸슈킨스카야-10(Pushkinskaya-10) 아트센터'는 21세기의 푸슈킨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1989년에 문을 연 이곳은 "박물관이 아닌 박물관"을 지향하는 갤러리, 스튜디오, 공연장, 그리고 가게들의 집합체다. 온갖 아방가르드한 예술 행위들이 벌어지는 장소이며, 독특한 나이트클럽 피시 패브릭(Fish Fabrique)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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