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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레분섬 - 꽃으로 핀 그대의 손을 잡고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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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한 번쯤은 찾아왔으리라. 간절히 부른 이름이 내게로 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 막 첫꽃 피던 순간의 팽팽함으로, 그 숫마음의 떨림으로 너와 함께 걷고 싶은 길. 꽃들의 수런거림에, 하늘거리는 네 발걸음에 세상 따위는 하얗게 지워지는 길. 끝내, 가던 길 멈추고 서서 꽃잎 같은 너의 입술에 바람으로 내려앉고 싶어지는 길.

늦은 봄, 초원이 옷을 갈아 입다

홋카이도의 최북단 왓카나이에서 파도를 가르며 두 시간을 달리면 섬 하나가 출렁인다. 동서로 8km, 남북으로 29km에 불과한 작은 섬. 가늘고 긴 집게 모양 혹은 뒷다리가 나온 올챙이의 모습 같기도 하다. 해발고도 490m의 레분산을 정점으로 동쪽으로는 완만한 해변이, 서쪽으로는 해식 절벽이 늘어선 레분섬(禮文島)이다. 겨울의 강한 계절풍이 만들어낸 해식 절벽 위로는 눈조차 쌓이지 않는다. 눈이 비껴간 절벽 위 사면은 초원으로 남았다. 애타게 기다려온 늦은 봄이 찾아오면 초원은 기다렸다는 듯 빛깔 고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봄을 알리는 전령사 앉은부채복수초를 시작으로 바람꽃, 설앵초, 개불알꽃이 다투듯 피어난다. 햇살이 뜨거워지는 6월 중순이 되면 금매화와 솜다리, 매발톱꽃과 원추리, 흰털쥐손이풀들이 경쟁하듯 섬을 뒤덮는다. 그래서 섬의 애칭은 ‘꽃의 부도(浮島)’. 길고 혹독한 겨울 내내 고요한 잠에 빠져 있던 섬이 생기를 되찾고 깨어나는 시기다. 때맞춰 일본 열도 곳곳에서는 배낭 꾸리고 신발끈 묶는 소리가 요란하다. 다른 섬에서는 이미 끝나버린 봄을 다시 맞기 위해, 져 버린 꽃향기에 한 번 더 취하기 위해 달려오는 욕심 많은 상춘객들이다.

레분섬의 대표적인 꽃길 4시간 코스의 초입

오롯한 길 옆으로는 찰랑거리는 꽃물결

레분섬은 한랭한 기후 조건에서 섬이 생겨난 이후 지리적 고립성으로 인해 난지 식물의 침입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한지 식물이 고스란히 살아남았고, 해발 0미터부터 고산식물이 출현한다. 300여 종의 고산 식물들이 다투듯 꽃을 피우는 6월이 오면 섬 곳곳은 꽃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부산스럽다. 개불알꽃의 변종인 레분아츠모리소의 군락지로 유명한 ‘4시간 코스’는 그 꽃이 피어나는 6월이 가장 붐빈다. 개불알꽃이 진 7월 초의 레분은 그리 붐비지도, 텅 비지도 않아 걷기에 넉넉하다.

레분 섬을 대표하는 꽃길의 이름은 건조하다. ‘4시간 코스’와 ‘8시간 코스’. 이름 그대로 걸어서 4시간, 8시간이 걸리는 두 개의 길이다. 두 길의 출발점은 오호츠크해를 바라보는 섬 최북단의 수코톤 곶. 빈약한 상상력의 이름과 달리 길은 초입부터 몽롱하도록 자극적이다. 안개가 몰고 오는 가는 빗줄기 사이로 바다가 숨바꼭질하듯 드러난다. 가늘고 좁은 흙길은 등줄기를 곧추 폈다 굽혔다 주저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다양한 변주를 펼친다. 여린 비에 젖은 흙길은 촉감도, 내음도 사뭇 관능적이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 마리의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에 기댄 덕분에 걸음은 사뿐하다. 오롯한 길옆으로는 꽃물결이 찰랑거린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각시원추리와 나리꽃, 금매화, 신부의 볼연지 같은 해당화, 바위틈 사이의 솜다리, 연분홍 붓솔 같은 범꼬리, 보라색 매발톱꽃, 그리고 아직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 수많은 꽃들.


빨간 등대와 초록 융단과 푸른 물빛의 대비

풍경에 취해 걸음은 절로 느려진다

나지막이 엎드린 집들의 어깨선이 정겨운 마을길과 수직 낙하의 유혹이 아찔한 절벽길 사이로 꽃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수코톤 곶에서 시작한 길은 고로타 곶을 지나 해변의 작은 마을 고로타로 향한다. 고향을 떠나지 못한 늙은 아버지의 그물이 말라가는 마을 너머 게으르게 늘어진 바다가 몸을 뒤척인다. 오호츠크해의 푸른 물결 너머 붉은 등대가 바닷길을 밝히고, 뭍의 길은 다시 언덕을 넘어 수카이 곶으로 이어진다. 구멍가게와 공중 화장실이 있는 작은 마을 니시-우에도마리에서 길은 갈라진다.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져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레분섬의 꽃길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잘 가꾸어진 길

도로를 따라 걸어나가면 4시간 코스가 끝나는 하마나카 버스 정거장. 차가 다닐 수 없는 흙길을 따라가면 8시간 코스.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어 8시간 코스로 들어선다. 이곳부터는 하이랜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완만한 구릉이 펼쳐진다. 멀리 바다가 흘깃 얼굴을 드러낸다. 풍경에 취해 걸음은 절로 느려진다. 메시쿠니, 아나마, 우엔나이를 거쳐 카후카 항 근처에서 길이 끝났다.

8시간 코스를 다 걸었다 해도 아직 남은 길이 많다. 섬 남쪽 카푸카 항구 근처의 모모이와 코스와 레분산 등산로가 기다리고 있으니. 이 작은 섬에서 2박 3일은 짧기만 하다.

카후카 항구 근처의 에델바이스 군락지로 향하는 길

코스 소개
레분섬은 일본의 최북단 유인도로 바다 건너편은 러시아. 맑은 날이면 사할린이 건너다보인다. 레분섬은 섬 전체가 리시리·레분·사로베츠 국립공원의 일부다. 면적은 81㎢에 인구 3,100명 남짓.


섬을 대표하는 트레킹 코스는 4시간 코스, 8시간 코스가 있다. 이 외에도 레분산 등반코스, 카푸카 항구 근처의 세 시간짜리 코스 등 다양한 트레킹 코스가 있다. 길은 완만하고, 길목마다 이정표가 잘 표시되어 있어 누구나 걷기 쉽다. 카후카 항구에서 시작되는 모모이와 코스는 시간이 부족한 여행자들을 위한 최고의 선택. 비교적 짧은 시간(2~3시간)에 복숭아를 닮은 바위 모모이와, 고양이 뒷모습을 꼭 닮은 바위 네코이와를 비롯한 진기한 바위 구경과 꽃 구경, 바다 구경이 동시에 가능하다. 모모이와 바위에서 시작해 시레토코만의 등대에서 끝이 난다. 왕복 4시간이 소요되는 레분산(490m)도 추천코스.

찾아가는 법
서울에서 직항편으로 삿뽀로나 아사히카와로 날아가 기차로 왓카나이까지 간다. 왓카나이에서 레분섬까지는 약 60km. 쾌속선으로 두 시간 남짓 걸린다.

여행하기 좋은 때
봄이 시작되는 6월부터 8월까지가 꽃길 걷기에 가장 좋다. 개불알꽃이 피어나는 6월 중순이 피크시즌이다. 6월부터 8월까지 숙소 예약은 필수다.

여행 Tip
레분섬은 변덕스런 날씨로 악명 높다. 일기 예보를 경청하고 방수잠바와 따뜻한 옷을 여벌로 준비하자. ‘우니’라 불리는 성게와 다시마는 이 섬의 특산품이다. 싱싱한 성게덮밥을 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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