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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곳으로 달리는 열차..산악 기차 체페Chepe 타고 버리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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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 애머슨은 말했다. "인생은 여정이다, 목적지가 아니라." 그걸 증명하고 싶어 산악 기차 체페에 날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디로 데려가든, 어디에서 정거하든.

버렸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분명한 의도나 목적은 소실됐다.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기엔, 여행이 매일 해야 할 일과와 같았다. 오늘의 목적지를 미션으로 세우고, 그 미션을 달성했을 때의 쾌감이 나아가게 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그 쾌감의 날이 서서히 무뎌져 갔다. 여행이 회사에서 일에 헌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결론으로 미궁에 빠졌을 그때. 기차 여행은 생각의 빈 칸을 줄 것이고, 뭔가를 깊이 그리워하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한국을 떠난 지 2개월이 지난, 이름 모를 향수병이 한 몫 했는지도 모르겠다.

계절 없는 체페의 감투

체페(Chepe)는 바랑카 델 코브레(Barr ancas del Cobre-copper canyon)의 숨통을 잇는, 올해로 152년산 산악 열차다. 로스 모치스와 치와와 구간인 16개의 역에 정거하며, 탑승객을 마시고 내뱉는 바쁜 호흡을 한다. 해발 2400m에 달하는 산을 등반하는 이 열차의 내막은 '관광'으로 도색한 노르웨이의 플롬 스바나와(FLÅ MSBANA)는 때깔부터 다르다. 주 교통수단을 버스로 택한 멕시코의 유일하고도 마지막 승객 열차이기 때문이다. 도시와 산골을 애틋하게 중매하는 역할을 하기에, 이 기차엔 유난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반가운 마음이 덜컹거린다. 이들과 달리 체페를 택한 여행자라면, 다른 꿍꿍이가 하나 있다. 뭔가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이 북아메리카의 가장 큰 사막이자 세계에서 가장 깊은 캐년을 탈환하는 감투 아래 '숨기 좋은 아지트'가 되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당도한 기차역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사람들로 잔뜩 불안하게 했다. 예매하지 않은 넉살 좋은 여행자를 위한 티켓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매표소는 두 곳, 기차의 타입처럼 분리됐다. 이코노믹 클래스의 두 배 가격을 호가하는 프리메라 익스프레스 기차는 빠르고 편안하고 편리했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원한 건 편의성보다는 오히려 불편함에 가깝지 않던가.

잠도 채 달아나지 못한 오전 6시가 되자, 정확히 기차는 기적 소리를 울렸다. KTX에 익숙해진 몸을 30년 전으로 데려다 놓듯 진동은 거칠고 투박했다. 불이 밝혀진 기차 내부를 궁금해하듯 키 작은 검은 나무가 기웃거렸고, 잠을 청하는 현지인의 뒤척임이 이어졌다. 애석하게도 그도 오래 가진 못했다. 요람과는 다른 의자와 소음을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구식 열차에 일출이란 한 글자가 쓰여졌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인부와 아침잠 없는 꼬맹이의 작별인사를 서너 번 거쳤을까. 그때다. 리오 푸에르테(Río Fuerte)를 지나 감상에 빠지던 기차는 순식간에 변심했다. 느려 터지던 기차는 이내 산의 폐부로 성급히 뛰어 들어갔다. 기차가 어디로 데려다 줄진 모르지만, 높이 올라간다는 곡(哭)이었다.

계절을 잃은 시공간은 처음이었다. 기차와 부딪히며 새소리를 내는 푸른 잔가지는 여름이요, 울긋불긋 붉은 나염이 풀린 나무는 가을이요, 몸매를 뽐내는 헐벗은 암벽은 겨울이요, 경치에 탄복해 희희낙락하는 탑승객의 웃음은 봄이었다. 늘 경이로운 풍경 앞에선 기차는 속도를 냈다. 카메라를 들면 원하던 풍경이 이미 지나가고, 카메라에 남은 건 초현실주의 사진 뿐이다. 그도 아니면 86개의 터널이 약속한 듯 시야를 가로막았다. 산바람의 한기에 새빨간 코를 한 채 눈을, 마음을 따라가지 않는 사진의 한계를 탓하는 이들의 볼멘소리가 터졌다. 고로 사진기를 버리고 그저 눈으로 조망하는 이들도 생겼다. 우리가 바라면서도 떼어내지 못했던 '버리기'의 선인은 노부부였다. 잡고 싶지만 놓쳐버리고 마는 아련한 풍경들, 노년을 미리 학습하는 준비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10년 전 내가 이 기차를 탔는데, 똑같아. 늘 아쉽지."

두 마리 개와의 본격 서스펜스 트래킹

사람 사는 마을이 철도 곁이었고, 내려도 좋겠다는 마음의 신호가 왔다. 이전 정거장에서 기다림과 만남을 목격하면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준비된 기분이었다. 2228m의 으레 여행자의 집결지로 통하는 크릴(Creel) 이전의 대책 없는 선택이었다. 그 흔한 레스토랑도, 카페도, 병원도 이곳엔 없다. 숙소가 다중 기능을 하는, 유일한 편의 시설이다.

협곡 트래킹을 위해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 맸다. 조난의 위험은 피하고 싶어 아침부터 서둘렀다. 통나무집 숙소로부터 약 30여 분을 걸으니, 바랑카 델 코브레 국립공원(parque Barrancas del cobre)의 매표소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걷는 그 길은 어제와 같은 길이었다. 직립한 나무들이 양 옆을 호위한 비포장 길 끝이 뻥 뚫린, 천국으로 가는 하늘이었을 지라도. 좀더 진입하니,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현재에 불시착했다. 깜짝! 서스펜스 영화의 위장 기술보다 강도가 셌다. 아슬아슬한 협곡의 벼랑 끝, 그곳에서 종잡을 수 없는 협곡의 덩치와 거리가 심도 있는 공포심을 자극했다. 이곳을 직접 걸어 들어갈 셈이라고? 가이드를 권유하는 케이블 카 청년을 등진 이유는 두 마리의 안내자 덕이었다. 마을로부터 졸졸 따라오던 동네 개와 협곡 앞을 수호하던 닮은 꼴 개 한 마리.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는 자갈 길을 능숙하게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초보 등산객을 인도했다.

불투명해 잡히지 않던 경치는 트래킹이 진행되면서 투명한 빛을 띄었다. 재주 좋은 개를 따라 바위와 모래와 나뭇잎에 길을 만들어 가니, 어느새 병풍처럼 둘러싼 산의 속살이었다. 협곡의 안쪽은 두려울 정도의 무소음이다. 산조차 우리의 대화에 혼신의 힘으로 귀 기울이는 눈치였다. 그저 잿빛 그림자에 불과했던 바위가 저마다 사연 있는 듯 켜켜이 고개를 들었고, 바위 틈을 비집고 우뚝 선 선인장과 사막 식물은 위용을 과시했다.

타라우마라족과의 다른 시간들

오기는 다시 시작된 협곡의 공포심 앞에서 끝났다. 개의 궁둥이를 보며 죽기살기로 오르던 길에, 근육질의 바위가 길을 막았다. 좌로는 우리가 지나온 어마어마한 궤적이요, 우로는 다른 협곡의 매정한 시작이었다. 케이블 카 정거장이 지척인데, 안내하던 두 마리 개조차 슬슬 뒷걸음질쳤다. 진퇴양난의 순간, 바위와 바위 사이를 잇는 위태위태한 나무 사다리가 시야에 잡혔다. 손과 다리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우리와 달리, 멕시코 원주민인 타라우마라족은 이를 놀이기구 삼아 오르락 내리락 뛰고 날기도 했다. 그것도 알량한 끈 하나로 '신발'이라 이름 붙이기도 힘든 가죽 샌들을 신은 채.

정상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자 그제야 바위 위로 만발한 꽃이 보였다. 자연에서 본딴 색과 무늬 옷을 입은 인간이란 꽃 타라우마라족 상인이었다. 속세의 물건이라면 오로지 칼 뿐, 그들은 협곡에서 기생하는 만물을 물건으로 탄생시키는 재주를 선보였다. 사막 식물을 저미어 귀고리로, 보석 상자로, 모자로, 가면으로. 그들에 의해 자연은 또 하나의 생명을 얻는 셈이다.

한 노점상 앞에 섰다. 나무 그늘 아래 낮잠 자는 손자에게 선인장을 손질하며 자장가를 들려주던 한 노파 때문이었다. 상인과 손님으로 대치된 순간, 우린 세상에 없는 시간 개념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른 시간이 공존하는 기분에 도취됐다. 그도 그럴 것이 타라우마라족은 바랑카 델 코브레의 젖줄인 시에라 타라우마라(Sierra Tarahumara)에서 400년이 넘는 혈육을 이어오는 6000명의 원주민을 이른다. 협곡 안에서 으레 몇 킬로미터 떨어져 생활하기에, 그들의 생존 본능은 현대인보다 모질고 강하다. 선인장 귀고리를 집어 들자 노파는 숫기 없는 목소리로 20페소(약 1.7달러)라 했다. 뭔가를 사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가 넘는 협곡을 헤쳐 시내로 나가야 하는 힘겨운 돈이기도 했다.

왠지 서글퍼져 시선을 먼 발치로 돌렸다. 앞뒤 없이 달리던 한 소녀가 바위 끄트머리에 살포시 앉는다. 그녀를 따라 약동하는 자연에 우릴 맡기어 봤다. 명상, 사색, 그 어떤 단어를 붙여도 좋았다. 시계는 멈추고 케이블 카는 영 오지 않을 기색이었다. 뭐 오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어차피 버리기 여행을 작심한 터였다. 인생은 여정이므로, 목적지가 아니라.

How to TAKE 체페(Chepe)

체페의 본명은 Ferrocarril Chihuahua Pacífico. 오전 6시, 로스모치스에서 치와와로 가는 기차가 시동을 건다. 예매하지 않았다면 최소 1시간 전 기차역에 도착하는 것이 예의. 으리으리한 이름의 프리메라 클래스 기차는 편의성을 핑계로 타기엔 두 배 되는 가격이 아깝다. 로스모치스에서 아레포나푸치까지는 약 8시간, 그로부터 해발 2400m의 아찔한 디비사데로(Divisadero)에서 약 20분간 정거한 뒤 여행자의 아지트인 크릴(Creel)에 2시간 뒤 도착한다. 로스모치스와 크릴 구간에 협곡의 절경을 모두 쏟아내기에, 크릴에서 치와와로 이동한다면 시간 선택의 폭이 큰 버스가 정답이다. 기차가 뒤로 가는 일은 없지만 오금 저리게 다리 위에 정거하는 것은 다반사이니 편히 맘 먹을 것. 단, 이코노믹 클래스는 화, 금, 일요일에만 운행해 충동적으로 아무 역에서나 내리면 우리처럼 산에 '갇히는' 즐거움을 맛봐야 한다. www.chepe.com.mxWhere to STAY 카바냐스 디아즈(Cabañas Diaz)

아레포나푸치, 즉 포사다 역에 내리면 투숙객을 원하는, 호남형 숙소 주인이 마중 나와있다. 그 중 이성적인 가격, 바랑카 델 코브레와 역까지 걸을만한 위치, 피톤치드가 그윽한 천연 산장, 협곡별 가이드 서비스 등 여행자를 만족시키는 조건으로 가득한 이곳이다. 식당이 전멸한 이 지역에서 매끼 호텔을 이용할 심산이 아니라면, 안주인과 끼니별 가격 협상을 미리 하는 게 좋다. 아침도, 저녁도 같은 80페소(약 7.5달러)를 주장하므로. 룸 하나당 2개의 트윈 베드 400페소(약 34달러) 문의 578-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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