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는 시인들이 언어로 기술하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투쟁은 곧 축제라는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보르헤스 같은 남미의 대문호야 탱고를 시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사실 탱고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무용(無用)한 시도에 가깝다. 단조이면서 빠르고, 음울하면서도 격정적인 몸짓과 선율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기나 할까. 탱고를 알고 싶다면, 역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는 수밖에 없다.

부둣가 마을 보카의 건물들은 색색의 레고 블록을 쌓아 만든 것 같다. 이 발랄한 동네에선 탱고 댄서들이 춤추자며 먼저 손을 내민다.

◇우아하고도 애틋한 '밀롱가' 탱고

우선 탱고의 탄생지로 알려진 '보카'에 갔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와 스페인 이민자들이 몰려 살던 부둣가다. 삶의 애환을 달래려던 이민자들 사이에서 탱고가 유래했다는 설(說)이 있는데, 보르헤스에 따르면 이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가던 사창가에서 나왔다고 한다. 탱고에 깃든 관능과 슬픔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듯하다.

이민자들이 가난과 향수에 몸부림쳤던 보카는 지금도 여전히 빈민가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몇 개 골목을 정해주곤 "다른 곳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했다. 큰길에는 관광버스가 여러 대 서 있었고, 골목마다 카메라를 든 관광객과 호객꾼이 몰려들었다.

보카의 중심가인 엘 카미니토에선 공연을 펼치던 탱고 댄서들이 함께 탱고 포즈를 취하며 같이 사진을 찍어주기도 한다. 탱고가 유래한 동네라곤 하지만, 전형적인 관광지가 된 탓에 정작 탱고의 정취를 느끼긴 어려웠다. 대신 빨강·초록·노랑 등 색색으로 칠해진 원색의 건물들을 구경하며 길거리에서 파는 액세서리나 그림 등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날 밤 탱고 쇼를 볼 수 있는 극장 '카를로스 가르델'에 갔다.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이며 2시간 넘게 이어지는 제대로 된 탱고쇼를 볼 수 있는 곳(1인당 AR$420)이다. 탱고 작곡가이자 가수인 가르델(1887~1935)은 '탱고 칸시온'(가사가 있는 탱고 음악)을 개척한 '탱고의 황제'로, 영화 '여인의 향기'로 유명해진 '포루 우나 카베사'를 작곡했다. 20대부터 60대로 보이는 10여 커플이 차례로 나와 다양한 곡에 맞춰 춤을 선보인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곡예에 가까운 춤을 추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탄성이 절로 나오지만, '쇼는 쇼'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다음 날 오후 밀롱가(탱고를 즐기는 장소)를 찾았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밀롱가 '콘피테리아 아이디얼'은 1912년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밀롱가로 유명하다. 탱고 교습도 해준다고 한다. 보통 밀롱가는 밤 12시부터 제대로 시작한다는데, 해지기 전 오후부터 여러 쌍이 춤을 추고 있었다. 대부분 40대 이상 중·장년이었고, 양복 주머니에 손수건을 꽂고 머리를 가지런히 정돈한 '멋쟁이' 할아버지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이들의 춤은 기교가 전혀 없이 소박한 편이었지만, 우아하고도 애틋했다.

탱고의 라틴어 어원인 '탕게레'(Tangere)는 '만지다' '가까이 다가서다' '마음을 움직이다'라는 뜻이다. 탱고를 추는 남녀는 상대방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가슴을 밀착한다. 아니, 서로에게 기댄다. 정해진 스텝은 없고 남자가 이끌면 여자가 반의반 박자 정도 늦게 따라간다. 남자는 여자의 등을 손으로 안고서 신호를 준다고도 하지만, 심장 고동 소리만으로도 서로 의중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리콜레타 공동묘지’에 가면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 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만 같아 설레기까지 한다. 발소리를 죽이고 걸으면 벽 안에서 사람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올 것만 같다.

◇시간이 멈춘 듯한 '망자(亡者)들의 마을'

탱고가 현세(現世)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다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부촌(富村) 리콜레타에 있는 '리콜레타 공동묘지'는 내세(來世)에 대한 열망이 서려 있다. 잘 알려진 장소지만 묘지라는 이유 때문에 여행자들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오전 11시 영어 투어 가이드를 무료 제공한다.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삼나무가 보이고 큰길 양쪽으로 다시 작은 골목들이 나 있다. 얼핏 보기엔 유럽의 퇴색한 작은 마을 비슷하다. 무덤 하나하나가 작은 집이나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망자들의 마을'인 셈이다. 아르데코, 아르누보, 바로크, 네오 고딕 등 다양한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석재나 철문 중에는 밀라노에서 직접 공수해온 것도 있다.

무덤은 5000개에 이르는데, 한 가문의 무덤에 여러 구의 시신이 있기 때문에 몇 사람이 묻혔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한평생 호사스럽게 살아도 리콜레타에 묻히는 것보단 돈이 덜 든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하고 부유한 가문 출신만 이곳에 묻힌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골목 사이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도 전해 온다. 한 무덤에는 서로 등을 지고 있는 남녀 두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들은 생전에 부부였다고 한다. 사치를 일삼는 아내에게 남편이 돈을 주지 않자, 아내가 "죽어서도 당신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란다.

공동묘지라곤 하지만 몇 시간을 돌아다녀도 질리지 않는다. 사람이 없는 골목이 많아 무덤가에서 뛰노는 고양이들을 벗 삼아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에선 찾기 어려운, 시간이 멈춘 듯한 곳이다.

아르헨티나 페리토 모레노 빙하…높이 60~80m 길이 35㎞
온난화·강설에 2m씩 이동하며 빌딩 크기 얼음덩어리 붕괴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탱고를 보고 있자면 한증막에라도 들어간 듯 숨이 턱턱 막힌다. 몸과 몸 사이에 한 치도 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가슴을 밀착시킨 남녀가 사지의 근육을 팽팽하게 내뻗은 채 몇 바퀴고 돌고 또 돈다. 10분 정도 지나면 마룻바닥에서는 아지랑이가 이는 것 같다. 저렇게 쉬이 정염에 휩싸이는 이들이 학교나 사무실에선 어떻게 온화하다 못해 무심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아르헨티나에서 탱고뿐만 아니라 페리토 모레노 빙하도 본다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877년 프란시스코 파스카시오 모레노가 발견한 페리토 모레노 빙하. 굉음과 물보라를 만들어내며 무너지는 빙하에서 얼음의 시퍼런 열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1877년 프란시스코 파스카시오 모레노가 발견한 페리토 모레노 빙하. 굉음과 물보라를 만들어내며 무너지는 빙하에서 얼음의 시퍼런 열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빙하 트레킹을 마치면 빙하 얼음을 넣은 ‘위스키 온 더 락’을 마신다. 가슴에도 불덩이 하나를 품는 것이다. /롯데관광 제공

◇한없이 투명하고 눈부시게 푸른 장관, 페리토 모레노 빙하

남극과 가까운 아르헨티나 남쪽의 산타크루스 주. 칠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타고니아 대륙에는 빙하 국립공원(Parque Nacional Los Glaciares)이 있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파타고니아 빙원의 가장 남쪽에 있다. 폭이 5km에 높이가 60~80m이며 길이는 35km나 된다. 안데스 산속 칠레 국경까지 뻗어 있다. 빙하 국립공원에 있는 360여 빙하 중 가장 아름답고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빙하이다. 하지만 이 빙하가 특별한 건 비단 크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빙하는 지구온난화와 많은 강설량 때문에 하루에 중앙부 2m, 양쪽 끝은 40cm 정도 전진하고 있다. 그렇게 움직이다가 때로 천둥 같은 굉음을 내며 빌딩 한 채 크기의 얼음 덩어리를 붕괴시킨다. 사람들은 이 한없이 투명하고 눈부시게 푸른 붕락을 목격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전망대에서 빙하를 관람한 후, 아이젠을 차고 직접 빙하 위를 걸어 보는 트레킹 코스가 인기다.

◇'남미의 스위스' 바릴로체

부에노스아이레스 토박이들에게선 묘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남미의 파리'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 그리고 다른 남미 대도시 주민들보다 세련됐다는 것을 은근히 풍기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미는 작은 유럽 같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서쪽으로 1720㎞, 칠레 국경과 가까운 바릴로체는 '남미의 스위스'라고 한다. 고요하게 너울거리는 파란 호수와 사방으로 둘러싼 빙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최초의 국립공원 나우엘 우아피 호수에 둘러싸인 바릴로체는 해발 700m 에 위치한 삼림 휴양 도시이다. 바릴로체 근처 빅토리아 섬에서 페리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아라야네스 숲은 밤비의 숲으로 유명하다. 숲 가득 메운 은매화 나무 따라 가는 트레킹 코스를 즐길 수 있다. 월트디즈니의 고전 만화 '밤비'의 배경이 된 곳답게 주변의 울창한 숲에서 커다란 눈을 반짝거리며 아기 사슴이 뛰어나올 것만 같다.

19세기 스위스 사람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바릴로체는 밀크초콜릿 최대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중심가인 모레노 거리를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다양한 수제 초콜릿 상점이 즐비하다.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캄파나리오 언덕 1050m 지점까지 2인용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 호반 도시의 전경을 관람할 수 있다. 나우엘 우아피 호수, 페리토모레노 강, 바릴로체 최고급 호텔인 샤오샤오 호텔이 주변 빙하와 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여행수첩 

페리토 모레노 빙하 위치도

롯데관광은 기존 '수박 겉핥기'식 중남미 여행을 벗어나 남미 지역, 특히 아르헨티나(바릴로체와 갈파테 빙하)를 집중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상품을 단독 출시했다. 대한항공 휴스턴 노선을 활용하여 단독 출시하였다. 남미 여행할 때 장거리 항공 이동이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대한항공 휴스턴과 상파울루 단일 노선을 활용하면 더 편안한 남미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보르헤스가 말하다. 탱고는 플라타 강의 아이다.

아르헨티나의 정신, 소설가 보르헤스는 말했다. “탱고는 플라타 강(Rio de la Plata)에 속해 있다. 아버지는 우루과이의 밀롱가, 할아버지는 쿠바의 하바네라다.” 플라타는 대서양이 남아메리카 대륙의 아랫도리를 찢고 들어오는 형상을 한 거대한 강이다. 음악이자 춤인 탱고는 이 흙탕물투성이의 강에서 태어났다. 탱고가 플라타 강의 아이라는 말의 다른 의미는 오직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이 녀석을 만들어낸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강의 건너편,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는 또 다른 탱고의 거점이며, 완고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받아들이지 못한 실험적 탱고의 산실이기도 했다.

파스텔 색의 거리에서 걸음마하다 - 보카의 카미니토

탱고의 탄생은 동시다발적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의 보카(La Boca)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옛 항구였던 이 지역은 유럽의 이민자들,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들이 향수에 젖어 시름하고 그것을 노래와 춤으로 풀어내던 동네였다.


보카의 카미니토(Caminito) 거리는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탈리아계 항구 노동자들이 알루미늄 벽에 칠해놓은 파스텔 조의 건물들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다. 거친 환락가에서 태어난 탱고가 우아한 격식을 갖춘 예술로 변모했듯이, 카미니토도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탱고의 황금기에는 자유분방한 연주자들의 터전이 되었고, 군사 독재의 시기에는 어둡게 침잠했고, 지금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는 거의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찾는 번잡한 관광지가 되었다. 그럼에도 길거리 연주자와 댄서, 오래된 밀롱가와 카페 등 탱고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매혹시킬 보석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탱고는 아름다운 카미니토의 밤거리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었다.

탱고의 왕 가르델, 체 게바라의 아버지에게 일격을 당하다 - 글라스 궁

가르델은 영화 [여인의 향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포르 우나 카베사
(Por una cabeza)'의 작곡자이기도 한다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 이 달콤한 바리톤 가수는 루돌프 발렌티노와 더불어 세계의 여성들은 탱고의 마수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세계 투어를 통해 항구의 밑바닥 문화에 불과했던 탱고를 아르헨티나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보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카리브 해로 떠나던 도중 비행기 사고로 죽고 만다. 최전성기에 사라진 존재이니, 그로 인해 불멸의 삶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말한다. "가르델은 지금도 날마다 점점 더 노래를 잘한다." 당연하게도 이 도시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바스토(Abasto) 시장에는 동상이 서 있고, 곳곳의 벽화에서 중절모를 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또한 흥미로운 장소는 글라스 궁(Palais de Glace). 원래 아이스하키 경기장으로 개장했다가 연주장 겸 댄스홀로 바뀐 곳인데, 가르델은 이 곳에서 일어난 난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부상을 입힌 장본인은 체 게바라의 아버지라고 한다.

코르토 말테제, 밀롱가의 마초들을 응징하다 - 콘피테리아 이데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오랫동안 '남반구의 파리'로 불려왔다. 영감을 찾아 북반구에서 날아온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그중에는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만화가 휴고 플라트(Hugo Platt)도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와 유럽을 유랑해온 이 청년은 1940년대 이 도시로 건너와 만화가로서 눈을 떴고, 유럽으로 돌아간 뒤 방랑의 영웅 [코르토 말테제(Corto Maltese)]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중 하나인 [탱고]는 이 음악이 태어나던 시대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특히 이 도시의 여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또렷하게 보여준다. 1923년 6월, 코르토는 아름다운 여인 루이제를 찾아 보카의 항구로 들어온다. 그는 사창가의 범죄 조직 바르사비아의 뒤를 캐더니 친구의 복수를 위해 부패한 경찰을 쏘아 죽이고 이 도시를 떠난다. 그 시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여자라고는 거의 없는 극심한 남초(男超)의 도시였고, 탱고는 마초(macho)들의 춤이었다.


코르토가 탱고를 춘 밀롱가를 지금은 찾지 못할 것 같다.그 정취와 가장 가까운
곳이라면 1912년에 문을 연'콘피테리아 이데일(Confiteria Ideal)'이 아닐까?

고된 일을 마친 부두의 하급 노동자들은 사창가로 향했고,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여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춤을 연마해 겨루었다. 길거리의 여자들을 춤추는 척 껴안기 위해 거칠고 빠르지만 또한 유연한 동작을 익혔고, 이는 탱고 특유의 악센트를 만들어냈다.

아스토르 피아졸라, 이 도시와 멱살잡이하다

피아졸라는 남쪽 바닷가에서 상어 낚시를 즐겼다.명곡'상어(Escualo)'의
서스펜스도 거기서 만들어졌다.


"나는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자라났고 파리에서 내 길을 찾았다. 그러나 내가 무대에 오를 때, 사람들은 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음악을 연주하리라는 걸." 우리가 '탱고'라면 가장 먼저 떠올릴 이름. 가장 유명한 작곡자이며 탁월한 반도네온 주자,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olla).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는 만날 때마다 멱살잡이를 하는 애증의 관계였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남쪽 바닷가의 도시 마르 델 플라타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기에서 처음 '반도네온'을 손에 잡았고, 카를로스 가르델의 꼬마 통역 겸 반주자가 되어 그를 쫓아다니기도 했다. (가르델이 카리브 해 순회에 그를 데려가려던 걸 아버지가 막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피아졸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반도네온 연주자로 크게 주목받지만, 새로운 탱고 음악을 만들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번번히 거부당했다. 축구팀 보카 주니어스의 팬클럽을 위한 카니발에 자신의 편곡을 선보였다가 "여기가 콜론 극장이냐"며 끌려 내려오기도 했다. 낙담한 그는 탱고를 떠나 클래식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나디아 블랑제의 가르침을 받다, 자신의 진짜 음악은 클럽에서 반도네온으로 연주하던 그 '탱고'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탄생시킨 새로운 탱고(Nuevo Tango)는 이 음악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은 여전히 반발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모든 것이 바뀌게 마련이다. 탱고를 빼놓고." 그는 맞섰다. “내 음악이 탱고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아르헨티나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에는 그의 이름을 딴 극장식 식당 겸 갤러리가 있다(Piazolla Tango). 그가 클래식 음악에 빠져들었던 콜론 극장에도 그 숨결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홈베이스였다 사라진 클럽 '676' 근처를 배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피아졸라는 부유하는 존재였고, 하나의 장소로 그를 기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쩌면 그의 고향, 마르 델 플라타로 날아가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거기에 아스토르 피아졸라 국제공항이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 카페의 할아버지들 - 콜론 극장

'남반구의 파리'는 일 년에 몇 달씩 실제로 '북반구의 파리'를 대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 연주자들의 겨울 휴양지 역할을 해왔고, 덕분에 이 도시엔 고급스러운 공연 예술이 넘쳐흘렀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콜론 극장이다. 피아졸라는 일이 없는 낮 시간에 콜론 극장에서 연주되는 바르토크나 스트라빈스키에 매료되었고, 이는 탱고 음악을 변모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어 변신한 탱고는 콜론 극장의 당당한 주역이 되었다.


2007년, 이 극장에 백발과 주름을 훈장처럼 단 연주자와 가수들이 모여들었다.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 탱고카페(Café de los Maestros)]로 기록된 역사적인 공연을 위해서였다. [브로크백 마운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영화음악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는 1940~50년대 황금기의 탱고를 재현하기 위해 그 시절의 스타들을 불러모았고, 호라시오 살간, 레오폴도 페데리코 등의 마에스트로들이 열정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탱고의 마에스트로들이 남반구 공연 예술의 메카,콜론 극장에 모이다.

군사 독재를 이겨낸 스트리트 탱고 - 산 텔모

에드문도 리베로가 문을 연 '엘 비에요 알마센'은 탱고 르네상스의 산실이었다.


페론과 에비타의 시절은 탱고의 시대였다. 그러나 1955년 군사 쿠데타와 더불어 탱고의 황금기는 처절하게 끝난다. 30년간 이어진 군사 독재는 3명 이상의 모임조차 금지시켰고, 페론의 민족주의가 육성시킨 탱고는 더욱 엄격히 탄압되었다. 1983년 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탱고 르네상스'가 피어났다. 그러나 그 싹은 이미 자라나고 있었는데,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된 동네 산 텔모(San Telmo)에서였다. 이 동네는 그 어두운 시절에도 독특한 보헤미안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문을 연 현대 미술관(Buenos Aires Museum of Modern Art)을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탱고 뮤지션들과 댄서들도 거점을 마련했다. 1969년 탱고 가수 에드문도 리베로는 식민지 시절의 식료품점을 개조한 뮤직홀 '엘 비에요 알마센(El Viejo Almacén)'을 열어 이 지역 탱고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지금 산 텔모는 보카, 플로리다 스트리트와 더불어 길거리 탱고 댄서들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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