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줄기가 문화의 경계가 되는 설정은 다소 흥미롭다. 한강을 기준으로 강남과 강북 사람을 나누고, 뉴욕 맨해튼 강을 경계 삼아 뼛속 깊숙한 뉴요커와 브룩클린 사람들을 비교하는 설정 말이다. 동유럽의 한 도시에서도 이런 구분은 유효하다. 하지만 현실의 가벼운 세태와 견주면 오히려 역사적인 측면이 강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역은 실제로는 다른 터전이다. 유유히 흐르는 도나우 강을 기준으로 언덕 위 부다와 낮은 지대의 페스트는 기반이 다른 별개의 도시였다.

도나우 강변의 야경은 프라하의 야경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도나우강을 채색한 세계유산

2세기경 로마의 군 주둔지였다던 부다는 14세기에는 홀로 헝가리의 수도 역할을 했다. 페스트와 한 도시로 합병 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오랜 기간 페스트가 서민들의 삶터였던데 반해 부다는 귀족과 부호들의 영역이었다. 언덕 위, 요새 같은 공간에서는 지켜야 할 것도 많았고 외부인들의 가벼운 접근도 꺼렸다. 부다페스트를 상징하는 오랜 유물들이 부다 지구에 밀집돼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왕궁, 어부의 요새, 마챠시 교회 등 도나우 강변을 수놓는 언덕 위 명물들은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부다페스트가 ‘도나우강의 진주’라는 별칭을 얻게 된 데는 부다 지구의 유적들이 큰 몫을 했다.

부다 지구를 감상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왕궁의 언덕으로 불리는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 부다의 깊숙한 속살을 들여다 보는 것이 그 첫 번째. 도나우강을 따라 유람선을 타거나 강변을 따라 달리는 트램에 올라도 좋다. 사자 동상으로 유명한 시체니 다리를 건너며 ‘줌 인’(zoom in)되는 장면을 즐겨도 되고, 해질 무렵 도나우강과 함께 펼쳐지는 야경을 감상해도 훌륭하다. 동유럽하면 프라하 프라하성과 카를교의 야경이 떠오르지만 부다 지구를 배경으로 한 도나우강변의 야경도 결코 뒤지지는 않는다.

부다 지구에서 가장 이색적인 명물은 어부의 요새다. 동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고깔 모양의 흰 탑들이 7개나 늘어서 있다. 웅장한 고성이나 성당에 주눅든 모습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욱 친근하다. 어부의 요새로 명명된 데는 여러 설이 있다. 어부들이 이곳에 요새를 짓고 적과 싸웠다는 설부터 이곳 요새에 어시장이 들어섰다는 설까지. 어부들과 연계된 건축물이지만 섬세한 감각은 돋보인다.

고깔 탑은 헝가리 마자르 7개 부족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도나우강과 페스트 지역의 풍광은 유독 빼어나다. 요새를 잇는 성벽에 걸터앉은 채 감동에 취해 사랑을 표현하는 연인들의 모습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마챠시 교회의 내부. 화려한 제단과 이슬람식 장식이 남아 있다.

부다 지구 최고의 명물로 손꼽히는 어부의 요새.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어부의 요새, 마챠시 교회

요새 안으로 들어서면 마챠시 교회가 화려하게 솟아 있다.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교회는 카톨릭과 이슬람 사원이 혼재된 모습이다. 부다 지역이 16세기 터키에 점령당했을 때 건물은 이슬람 사원으로 쓰였다. 고딕, 바로크. 이슬람 양식이 뒤섞여 있는데 교회 지붕의 모자이크 타일이나 내부의 제단이 현란하다. 내부 인테리어에는 이슬람의 잔재가 짙게 남아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에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공존했듯 마챠시 교회 역시 역사와 종교의 지난한 단면을 엿볼 수 있어 애착이 간다.

13세기에 세워진 왕궁은 부다 지구의 상징이자 시련의 흔적이다. 왕궁은 한때 몽골,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의해 파괴됐고 1,2차 세계대전 때 큰 상처를 입었다. 50년대 재건된 왕궁으로 올라서는 길목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자 동상이 인상적인 세체니 다리. 부다지구와 페스트
지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부다 지구 입구. 요새 처럼 된 언덕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부다왕궁 앞의 세체니 다리는 부다지구와 페스트 지역을 잇는 소통로의 역할을 한다. 실제로 양 도시가 하나로 발전하게 된 것도 이 다리가 놓인 뒤부터다. 사자 동상이 입구를 지키는 다리는 도나우 강에서 가장 수려한 다리로 손꼽힌다. 그 아래로는 유람선이 유유자적 지난다. 다리와 강은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 [글루미 선데이]에서 그 아름다움울 선보이기도 했다. 다리를 건너면 보행자 천국인 바치거리, 세체니 온천 등 페스트 지역의 명물들과 조우하게 된다.

강변을 따라 달리는 노란색 트램에 오르면 부다지구의 유적들은 구식 슬라이드를 넘기듯 차곡차곡 모습을 달리한다. 덜컹거리는 트램의 속도처럼 도나우강에 비친 오랜 동유럽의 도시는 강의 파문과 함께 흐른다.



가는길

오스트리아 비엔나 등을 경유해 열차로 이동하는 게 일반적이다. 비엔나에서 부다페스트까지는 3시간 소요. 체코 프라하 등에서도 이동이 가능하다. 부다페스트의 국제선 열차역이 3곳이니 혼동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부다페스트는 유럽 대륙내에서 가장 첫 번째로 지하철이 개통된 곳으로 메트로 교통이 발달돼 있는 편이다. 붉은 색 M2 노선이 부다 지구까지 운행된다.

 

마자르 문화를 현재로 불러오다, 공예미술관

스페인에서 안토니오 가우디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부다페스트에는 레히네르 외된이 있었다. 천재 건축가로 일컬어지는 그는 아르누보 전성시대에 활동했는데, 그의 건물들은 다른나라에는 없는 독창성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헝가리의 뿌리인 마자르 문화로 돌아가기”를 염원했기 때문이다. 헝가리 전통자수에서도 드러나는 산뜻한 색과 섬세하고 독특한 문양은 그의 건축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레흐네르 외된은 금속, 유리 등을 자유롭게 쓰며 마자르 전통문양을 건물에도 도입했는데, 그 문양을 그리기 위해 졸너이 타일을 즐겨 썼다. 온도 차에 강한 이 타일은 건축자재로도 인기가 높았는데, 빈의 슈테판 대성당을 비롯한 중부 유럽의 건축물에서도 이 타일을 볼 수 있다. 초록색과 황금색이 빛나는 레히네르 외된 스타일의 지붕은 공예미술관 뿐 아니라 헝가리 중앙은행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지질학 박물관, 시각장애인협회 사무소등 그의 작품들이 많이 있지만 현재 내부관람이 가능한 것은 공예미술관뿐이다.  

 

 

지금의 극장에서 과거의 극장을 생각한다, 국립극장

처음 국립극장이 문을 연 것은 1837년이었으나, 여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전쟁을 비롯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장소를 옮기기도 하고 여러 곳에 분산되기도 하면서 제대로 된 상징적인 의미를 갖추지 못했던 것.


결국 1965년에 ‘국민의 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건물이 부서지게 되면서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새로운 건물을 짓는 공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여러 정치적 상황 속에서 좌절을 겪다가, 결국 2000년 9월에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오픈은 2002년 3월 15일. 기록적인 속도였다.


다뉴브 강변에 자리잡은 이곳에서는 헝가리의 연극이나 영화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물들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옛 국립극장 기념물. 건물의 파사드 부분을 떼어와 물에 비스듬하게 잠긴 상태로 눕혀놓았다. 이 눕혀진 기념물 위로는 영원을 상징하는 횃불이 타고 있다.


옛국립극장의 파사드를 통째로 떼어와 기념물로 만들었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카페 뉴욕

카페 뉴욕의 열쇠를 다뉴브강에 집어던진 작가 페렌츠 몰나르.


카페 뉴욕의 역사는 지난하고 장구하다. 1894년에 처음 문을 연 이곳은 왕궁에 비유될 만큼 아름다운 실내장식으로 유명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에 기초해 대리석, 청동, 실크, 벨벳을 사용하여 인테리어했는데,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라는 찬사가 무색하지 않았다.


카페 뉴욕이 이름을 떨친 것은 실내장식만이 아니라 그 실내를 채운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곳은 20세기 초반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예술가와 지식인의 집합지였다. 이곳에서 풍성한 생각과 논의가 벌어졌다. 또한 문학 잡지의 편집 회의실 역할도 맡았다. 여러모로, 이곳에 신세진 예술가들이 많았다.


저명한 작가인 페렌츠 몰나르와 그의 친구들은 카페가 문을 여는 날 “이 카페는 예술가들에게 24시간 개방되어야 한다”며 열쇠를 다뉴브 강에 던졌다고. 영화 [카사블랑카]의 감독인 마이클 커티즈는 부다페스트 출신이었는데, 이곳 카페에서 예술가 수업을 시작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1912년 국립극장에서 연극연출 및 배우로 데뷔했다. 

 

카페 뉴욕의 여정은 화려한 만큼 지난했다. 사회주의 시절 국영화되었던 이곳은 한때 창고로 사용되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창고”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는데, 2006년 이탈리아 보스콜로(Boscolo) 그룹에 의해 다시 재탄생했다. 그들이 과거를 다루는 방법답게, 그들은 카페 뉴욕을 이름만 가져온 현대적 카페로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옛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장식을 충실히 재현함에 덧붙여 현대적인 디자인을 도입하여 새로운, 그러나 여전한 ‘카페 뉴욕’으로 재탄생했다.

 

 

과거의 차를 타고 현재를 돈다, 지하철

부다페스트에 세계에서 두 번째, 유럽대륙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된 것은 1896년. 건국 천년을 기념해서였다. 이 지하철의 정식 이름은 황제의 이름을 따서 ‘지하철 페렌츠 요제프(Ferenc József)’였으나, “밀레니엄 언더그라운드”라 부르기도 하며, 그보다는 더 즐겨 ‘1호선’이라고 부른다.


부다페스트의 자랑 ‘1호선’을 타는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각별한 느낌을 준다. 건설 당시의 모습을 간직함과 동시에 현대의 도시 교통시스템으로도 원활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의 지하철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람들을 편리하게 운반하는 단순한 기계상자도 아니다.


에스켈레이터도 없는 층계를 걸어 내려가면 조그만 차량을 탈 수 있으며, 도착할 때의 흥겨운 음악도 예전과 같다. 현재 지하철 터널의 일부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에 가면 예전에 사용되었던 차량들을 볼 수 있다.


영화 [언더월드]에도 나오는 이곳의 지하철은 어쩐지 낯익은데, 그것은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된 뉴욕시 지하철 입구가 바로 이곳의 지하철 입구를 모델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1호선은 언드라시 대로를 따라 건설되었다.

 

 

탑의 높이로 역사를 기억하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성당은 가장 높은 탑의 높이를 자랑한다.


 

성 이슈트반은 헝가리의 초대 국왕이다. 그는 기독교를 헝가리에 전파하여 기독교의 성인이 되었다. 이 성당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은 그의 오른손 미라가 안치되어있기 때문인 걸까? 성당의 정문에서도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부다페스트 최대의 성당인 이곳은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 지어졌다. 네오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짓는 데 무려 50년이 걸렸다고 한다. 특징적인 것은 탑의 높이.


중심에 있는 중앙 돔까지 건물 내부에서는 86m, 돔 외부의 십자가까지는 96m이다. 이는 헝가리 건국의 해 896년을 의미한다. 건국천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탑의 높이를 정한 것이다. 다뉴브 강변의 모든 다른 건축물들은 도시미관을 이유로 이보다 더 높이 지을 수 없게 규제된다고 한다.   

 

 

탑의 숫자로 선조를 기억하다, 어부의 요새

“헝가리 애국정신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어부의 요새 또한 헝가리 건국 1000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1896년에 착공에 들어가 완성된 것은 1902년. 이곳의 이름이 ‘어부의 요새’가 된 것은 옛날 이곳에 어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범한 설명부터 19세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려했을 때 어부들이 다뉴브강으로 기습하는 적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극적인 설까지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이곳이 중세시절 다뉴브강에서 어시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는 것.


네오로마네스크와 네오고딕양식이 혼재되어있는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일곱 개의 탑이다. 고깔모양을 한 이 탑이 상징하는 것은 건국당시 마자르족 일곱부족이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 탑의 높이로 건국의 해를 기념했다면, 이곳은 일곱 개의 탑으로 건국의 주체를 오늘의 기억 속에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어부의 요새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인상적이다.

 

 

가끔은 과거를 잊을 필요가 있다, '글루미 선데이'

1930년대 헝가리 작곡가 레조 세레즈가 작곡한 이 곡은 악명높다. 이 곡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여 “자살 찬가” 혹은 “자살의 송가”라는 기괴한 칭호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리 홀리데이, 루이 암스트롱, 레이 찰스, 톰 존스 등 여러 유명한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영화화되기도 한 이 음악은 지금은 예전만큼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는 못하다. 아무래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 사실 자살이 많았다는 것 자체가 루머라는 냉소도 존재한다.

 

'글루미 선데이'의 작곡가 레조 세레즈.


 

처음 음악이 전파를 탄 날 다섯 명의 청년이 자살하고, 전파를 탄지 8주만에 187명의 자살자가 생겨났다는 구체적인 숫자와 BBC를 비롯한 여러 방송국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은 이 루머를 그럴듯하게 만들어준다. <뉴욕타임즈>는 “수백 명을 자살하게 한 노래”라며 특집기사를 수록하기도 했고, 프로이드는 이 음악에 대한 정신분석학 이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케팅에도 소문은 활용되었다. 코코샤넬은 이 음악을 모티프로 ‘피치 블랙-죽음의 화장품’을 출시하였고, 해골모양의 피아노를 만들어 ‘글루미 선데이’라는 이름을 붙인 예술가도 있었다.


‘자살의 송가’라는 명성에 확신의 마침표를 찍어준 것은 1968년 1월 7일, 작곡가 레조 세레즈의 자살이었다. 그가 자살한 원인은 분분하나, 글루미 선데이의 성공 이후 두 번째 히트곡을 만들 수 없었던 괴로움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죽을 당시, 손가락이 굳어 있어 두 손가락밖에는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연주하던 카페의 이름은 ‘키스피파 벤데글로’. 작은 파이프 스토브라는 의미다. 평생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살았던 그는 그의 음악이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으로 가 로열티를 받으며 호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이 너무 강한 나머지 부다페스트를 떠나지 않았다 한다. 결국 그의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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