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가 나던 날, 어느 동물원에서는 다른 동물들은 피신시키면서 하마는 헤엄을 칠 수 있으니까, 하고 그냥 두었다. 그 동물원의 하마는 다 물에 빠져 죽었다. 하마는 물속에서 땅길을 찾지, 물길을 찾지는 않는다. 땅길을 찾지 못한 하마는 죽는다."

연희동 작가집필실에 있을 때, 그곳 도서관에서 시인 허수경의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을 읽었다. 그녀가 독일의 뮌스터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며 지냈던 일상을 담담히 기록한 에세이였다. 지하에 있어 늘 어두운 서가를 돌아다니다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우연히 펼친 책장 속의 이 문장 때문이었다. 나는 하마가 헤엄을 치지 못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하마가 헤엄을 치지 못해 물속에 빠져 익사했단 얘기는 더더욱 금시초문이었다. 이 기막힌 아이러니에 나는 단박에 이 책에 매혹당했다.

뮌스터 시민들의 낙서를 통해 도시의 이야기가 빼곡히 기록되는 아아(Aasee)호수의‘자이언트 당구공’. 허수경씨는 뮌스터가 가지고 있는 아픔을 기민한 시인의 더듬이로 포착해낸다 
몇 달 동안 유럽을 여행하면서도 단지 밥이 먹고 싶어서 골목길 사이의 중국식당에 찾아들어 가곤 했다. 뜨거운 음식이 아니라 딱딱한 바게트를 씹다가 입천장이 쓸려나간 적이 있었다. 잠시 파리에 체류할 때의 일이었는데, 길쭉한 바게트만 봐도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외국에선 한식당이 아주 비싼 편이므로 나는 저렴한 중국식당에서 안남미로 볶은 볶음밥을 먹곤 했다. 그땐 아껴 먹느라 쌀알을 숫자를 세어가며 꼭꼭 씹었다. 밥알을 씹을 때 느껴지는 단맛은 여행에 지쳐 고단해진 혀끝을 언제나 위로해주었다. 어디에나 있는 맥도널드에 있을 햄버거를 떠올리며 안도감을 느끼는 미국인들이 있다면, 어느 골목에나 있을 법한 중국식당의 볶음밥을 떠올리며 위안받는 아시아인들도 있을 것이다. 시인 역시 몸이 아프던 어느 날 독일 골목길에 숨어 있던 중국식당에 간다.

'여행'이 '생활'이 되는 지점이 있듯 '유학생활'도 그저 '생활'이 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책에선 이것을 이렇게 얘기한다. "빌리 브란트라는 독일의 수상은 자신의 묘비에 이름만은 새겨넣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은 대충 짐작은 하지만 정확히 어디에 그가 묻혀 있는지는 그의 가족만이 알 뿐이다. 그러나 그의 묘비명만은 알려져 있다. 빌리 브란트. 나는 애썼다." '나는 애썼다'란 문장에 밑줄을 긋다가 그만 코끝이 찡해졌다. 말까지 낯선 유학생이라면 그 애씀의 너비가 얼마만큼 될지 그려졌기 때문이다.

책에는 더듬더듬 외국어를 말하고, 공부를 위해 애쓰던 시인이 타국의 기숙사 마당에서 본 토끼에게 당근을 잘라 주는 장면이 있다. 많은 토끼와 구분하기 위해 그녀는 토끼에게 푸른색 리본을 매달아 준다. 그러나 자신이 매어준 푸른 리본 때문에 그녀는 우연히 그 토끼가 차에 치여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 리본 따위 매어주지 않았더라면 그저 수많은 토끼 중의 하나였을 토끼에 표지를 달아준 순간 '의미'가 생겼고,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책임감까지 생겨난 것이다. 내 것이라고 표시하기. 시인은 누군가 사랑할 때 마치 그것이 내 것이라고 표시되기를 바랐던 덧없는 욕심을 통탄한다.

건물 사이 길모퉁이마다 현대조각과 전통조각이 어우러져 있는 뮌스터의 거리. 

나는 결혼기념일이 2월 29일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결혼기념일을 맞이하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쓰다가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는 3년의 '부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심 중이었다. 그들 부부가 만나는 장소로 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중세도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화니와 알렉산더'에서 나왔던 웁살라 대학의 중심가를 떠올리다가 이 책에 나왔던 '뮌스터'의 쓸쓸한 마을을 생각해냈다.

뮌스터는 '교회, 성당'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이 도시의 호흡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성당의 종소리와 맞닿아 있고, 이곳의 공기는 교회의 기도소리와 맥을 함께한다. 종교전쟁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던 학살의 기억을 담고 있는 이 아픈 도시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젊은 시절 공부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 뮌스터는 조금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통점을 기민한 시인의 더듬이는 세심히 포착해낸다. 어느 도시에나 아픔이 있으며 상처가 아물며 생긴 딱지가 있다는 것, 그것을 지긋이 관조하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면 그녀의 문장들 사이에서 아픔을 마주하고 나서야 생기는 진정한 치유를 느낄 것이다.

우리가 여행자가 되어 어느 도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그저 패키지 상품을 바쁘게 쫓는 관광객이 아닌 '그 도시의 호흡에 몸을 맡겨 내면의 나와 마주치려면' 때때로 사유의 흐름을 좇는 이런 책들은 그 길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든, 칸트처럼 시간에 맞추어 마을을 산책하든, 도시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손과 발과 귀와 눈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고, 눈으로 책 속의 문장을 읽고, 입으로 그 문장을 한번 소리 내어 말해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뜨거웠는가.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그리고 가난한 여행자의 주머니를 채워줄 어느 귀퉁이 중국식당을 가만히 찾아보는 것이다.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시인 허수경이 지구의 반대편 유럽에서 보내온 편지글. 

낯선 외국어로 시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고고학이란 학문을 전공하는 시인의 일상이 담겨 있다.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한국의 지인들과 이야기 나누듯 쓴 글은 '이름 없는 나날'이란 제목이 붙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길 모퉁이 카페
국내도서
저자 : 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 / 권지현역
출판 : 소담 201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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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국내도서
저자 : 허수경
출판 : 문학동네 2003.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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