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 불교를 보호하다, 티베트하우스(Tibet House)

‘티베트하우스’는 티베트에 관한 작은 박물관이다. 이곳에 전시된 물건들의 중심은 티베트의 정치적인 지도자이자 종교적인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Dalai Lama)가 인도로 망명 올 때 가지고 왔던 의식용 물품이다. 1974년 티베트하우스의 새 빌딩을 지을 때 달라이라마가 주춧돌을 직접 올리는 등, 달라이라마와 이곳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1959년 이후 정치적인 문제로 티베트에서 험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온 종교적으로 중요한 책과 물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티베트의 탱화라 할 수 있는 “탕카(Thangka)”가 200여 점. 각종 조각상 100여 개 등등. 그리고 3천 권 이상의 책이 모여 도서관을 이룬다. 티베트 승려의 학문적인 깊이와 티베트 문학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곳은 단순히 자료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의 역할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티베트 불교에 대한 강의를 개최하여 티베트의 문화를 알리고, 티베트의 음악을 알리기 위한 경연대회도 열고 있다. 티베트 특유의 향 등 티베트 물품들을 파는 매장도 그러한 문화 전파에 한몫 한다.


티베트인들에게 티베트 불교는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불교에서는 스승, 즉 라마를 중시한다. 그 때문에 라마교라 불리기도 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인도에서 직접 들어온 것으로, 티베트어 경전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사원,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

델리에는 인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슬람 사원이 있다. 이 건물을 건축한 이는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Shah Jahan) 황제. 그가 마지막으로 세운 건축물인 이 사원에서는 2만여 명이 동시에 알라신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를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인도와 이슬람 양식이 융합된 무굴 건축의 걸작인 이 사원은 1644년에 착공하여 15년 뒤인 1658년에 완공되었는데, 붉은 사암과 하얀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40m의 뾰족탑이 특히 볼 만하다. 두 개의 탑 중 일반인에게 공개된 남쪽의 탑에 올라서면 델리의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너비 60m, 길이 36m의 거대한 모스크, 흰 대리석 돔을 보면 인도에서 가장 큰 이슬람사원이라는 것이 실감난다.


무슬림이 인도에 들어와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부터이지만, 인도의 지배적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사이는 오랫동안 좋지 않았고 여전히 좋지 않다.


1852년에 그려진 자미 마스지드.

근본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사상과 문화를 가진 이들은 심각한 유혈사태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19세기말 인도를 식민지 삼았던 영국이 분리통치정책의 일환으로 힌두-무슬림의 종파적 갈등을 이용하는 바람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으로 치달으며 충돌하여 백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인도에 거주하는 무슬림은 약 1억 2천만. 소수집단인 이들은 정부의 무슬림 포용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도 내에서 종파갈등을 겪고 있다.



새의 병원, 디감바 자인교 사원(Digambar Jain Temple)

자인교는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찬드니 촉 거리의 초입에는 자인교(Jainism)의 작은 사원이 서 있다. 1656년에 지어진 이곳의 이름은 ‘디감바 자인교 사원’이지만, 별칭은 “새의 병원(Bird Hospital)”이다. 먹이를 찾아 날아오는 새들을 돌봐서인지, 이곳에는 다친 새들이 스스로 찾아온다고. 사원의 위층에 새의 병원이 마련되어 있는데, 사원에 들어가려면 가죽신, 가죽옷 등 몸에 지닌 가죽제품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생명을 중시하기 때문에 시체의 일부인 가죽 또한 금지하는 것이다.


자인교는 BC 6~5세기 무렵. 부처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마하비라(Mahavira)가 주창한 종교이다. 자인교의 목표는 영혼을 완전히 정화하여 삶의 비참한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을 그들은 ‘승리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승리자, 혹은 정복자를 의미하는 ‘지나’에서 ‘자인교’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자인교란 “지나의 가르침”을 뜻한다.


자인교의 특징 중 하나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인교 수행자들은 극단적인 무소유인 나체수행을 지향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불살생과 비폭력을 추구하는 것. 동식물은 물론이거니와, 땅[地(지)]·물[水(수)]·불[火(화)]·공기[대기(大氣)]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수많은 여러 생물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주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평등의 이름, 구루드와라 방글라 사힙(Gurdwara Bangla Sahib)

시크교도들의 성전 ‘구루드와라 방글라 사힙’은 8대 시크교 구루인 하르 크리샨이 1664년 왕의 초대로 델리를 방문했을 때 머문 곳에 지어졌다. 당시 인도 왕인 라자 자이 싱의 소유였던 이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황금 돔이다. 모든 순례자에게 아침 3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열려 있는 이 예배당의 동쪽에는 무료로 매일 식사를 제공하는 채식식당이 있다.


이곳을 방문하던 당시 구루 하르 크리샨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다섯 살 때 손수건 하나로 나병환자를 낫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그는 천연두와 콜레라가 돌던 델리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빈민가를 방문하여 새 옷을 주고 치유력이 있는 성수라 알려진 방글라 사힙의 우물물을 나누어 주었다. 현재에도 이곳의 물은 치료에 효과가 있는 성수로 여겨진다. 결국 하르 크리샨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던 중 그들에게 옮은 천연두 때문에 일곱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곳을 방문했던 구루 하르 크리샨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합친 종교로, 16세기 초반에 구루인 나나크 데브(1469∼1539)가 주창했다. 시크교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신과 여신간에도 차이가 없고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 자, 종교, 인종 모두 평등하다. 시크교는 카스트 제도를 거부한다. 어떤 동물도 죽이지 않는다. 시크교에 따르면, 인간은 신에 대한 사랑과 현세의 선행으로만 구제된다. 대부분의 남자신도들은 머리털과 수염을 절대 깎지 않아 외모만 보더라도 시크교도임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신들의 둥지, 락슈미 나라얀 사원(Lakshmi Narayan Temple)

이곳은 여러 신의 조각들로 가득 차 있다.


비슈누와 그의 아내 락슈미를 모신 힌두교 사원인 ‘락슈미 나라얀 사원’의 다른 이름은 ‘비를라 만디르(Birla Mandir)’이다. 인도 굴지의 재벌 중 하나인 비를라 가문의 발데브 다스 비를라가 세운 사원이기 때문이다. 비슈누와 락슈미를 같이 묘사한 것을 보통 락슈미-나라야나(Lakshmi-Narayana)라 하는데, 사원의 이름도 이것에서 왔다. 하지만 수많은 신을 모시는 인도답게 이곳 또한 두 신만을 모시지는 않는다. 별관에는 시바와 그의 아내 두르가가 모셔져 있고, 한쪽에는 불교사원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불교순례자는 누구나 사원의 숙박소를 별도의 요금 없이 이용할 수 있다.


1938년에 세워진 이 사원은 현대적 감각을 자랑한다. 사원 전체는 힌두 신화에 나오는 여러 장면들로 조각되어 있다. 이 작업에는 백 명 이상의 조각가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 조각들 속에서 부처도 힌두교 신의 하나로 대우받는다. 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비를라 가문은 인도 전역에 수많은 사원과 천문관들을 세웠는데. 이 사원을 공개할 때는 간디를 초청하여 이곳이 종교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열린 신전임을 내세웠다고 한다.


락슈미 여신은 어머니의 신으로 다산을 상징하였지만, 이후에 아름다움과 행운, 행복, 부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여겨졌다. 주로 비슈누의 아내로 그려지고 있다.



모든 종교를 아우르다, 바하이 사원(Bahai House of Worship)

그토록 종교가 많은 인도. 모든 종교를 한꺼번에 아우르는 종교는 없을까? 있다. 19세기 초에 바하 올라(1817~1892)에 의해 중동에서 시작되어 1844년 인도로 들어온 ‘바하이’는 모든 종교들은 넓은 가슴으로 품는다. 이슬람교의 한 분파로 시작한 신흥종교인 바하이는 이슬람교의 ‘성전’을 거부하고 평화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긴다. 부처, 예수 등은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한 화신이라고 여긴다. “전 세계는 하나의 나라이고 인류는 그 나라의 시민들이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 전 인류는 형제라 여기고 모든 국가는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또 가르친다. “자기 조국을 사랑하는 자신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사랑하는 자신을 자랑해야 한다. 지구는 한 나라요, 인류는 그 백성이다”라고.


미국, 독일, 호주, 파나마 등 세계 곳곳에 사원이 있지만, 특히 델리에 있는 바하이 사원은 그 아름다움으로 눈길을 끈다.


바하이교는 아름다운 사원으로 더욱 알려졌다.

1980년에서 86년에 걸쳐 지어진 이 사원은 연꽃의 모양이다. 이란의 건축가 파리부르즈 사바(Fariburz Sahba)가 설계한 이 사원은 아홉 개의 연꽃잎이 삼층으로 겹쳐져, 총 27개의 연꽃잎이 정갈하게 모여 있다. 사원 주위의 아홉 개의 연못은 연꽃을 둘러싼 푸른 잎이다. 아홉이라는 숫자가 반복되는 이유는 바하이에서 9가 통합을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


지름 70m, 높이 34.27m의 바하이 사원의 실내에서는 1300명이 함께 앉아 집회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신전과도 다른 특징은 신을 묘사하는 조각, 그림, 글씨는 물론이거니와 제단도 없다는 것이다. 방문자들이 제각각의 신에게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의자만 비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신분, 종교와 상관없이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하고 명상할 수 있다.



철학자의 신격화, 간디 슴리티(Gandhi Smriti)

간디는 인도인들 사이에서는 신에 가까운 존경을 받고 있다.


간디는 인도의 철학자이자 정치적 지도자로, 인도인들에게는 거의 신격화에 가까운 사랑을 받고 있다. 간디에게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의 ‘마하트마’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이다. 그는 “참된 사랑이 인도문 어귀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이 활짝 열렸다. 모든 망설임은 사라졌다. 진리는 진리를 불러일으켰다. 진리의 힘을 눈에 보이게 한 마하트마를 찬양하라!”고 그를 우러렀다.


1948년 1월 30일, 저녁기도를 하기 위해 정원을 가로지르던 간디는 한 힌두 광신도가 쏜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때 간디의 나이 79세였다. 그가 죽기 직전 144일간 머물렀던 그의 후원자 비를라의 저택 뜰에는 그가 죽기 전에 걸어갔던 마지막 발자국이 시멘트 모형으로 남아 있다. 그 저택은 현재 ‘간디 슴리티’라는 이름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간디의 침대, 그의 둥근 안경과 지팡이, 그가 늘 곁에 두었던 물레와 신던 샌들, 책 몇 권을 볼 수 있다. 그에 관한 영화도 상영한다.


그는 살생을 하지 않는 아힘사의 계율을 지키는 한편, 비폭력을 주장했다. 그는 억압받는 이에게 증오와 이기심을 누르고 정의, 사랑, 자기희생의 정신을 갖기를 요구했는데, 그의 비폭력 정신은 억압자들에게도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인도 각지에 남아있는 간디의 흔적은 그가 아직도 인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 보여준다.

ⓒ 손수원

인도는 영적인 여행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인도는 휴식을 위한 곳이 아닌, 무언가 얻기 위해 떠난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떠났던 것은 아니다. 나의 인도 여행 3개월의 첫 시작은 ‘가깝고 싸니까’였다. 당연히 나의 무계획 인도 여행은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인디라간디국제공항. 자정이 지나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고온다습한 공기에 적응할 틈도 없이 공항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인도에 대한 가이드북에서는 늦은 밤에 공항 밖으로 나오는 것은 위험하니 아예 공항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오는 게 낫다고 적어놨을 정도니 인도가 처음인 여행객에게는 진땀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는 그냥 포기하고 공항의 딱딱한 의자에 몸을 맡기거나 용기를 내 바깥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객기로 밖으로 나가면 후회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때는 프리페이드(pre-paid)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공항 내에 있는 부스에서 미리 택시비를 내고 지정된 택시를 타는 것인데, 이것 또한 사기를 당할 확률이 있지만 그래도 맨몸으로 나가 택시를 잡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최근에는 공항과 뉴델리 기차역이 지하철로 연결되어 훨씬 이동하기 수월해졌다).

하지만 택시를 무사히 탔다하더라도 안심하긴 이르다. 브레이크 라이닝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오래된 택시는 차선 무시, 깜빡이 무시, 사이드 무시다. ‘제대로 된’ 운전사를 만나면 한국의 총알택시는 얼마나 얌전하게(?) 운전하는 건지를 깨닫게 될 정도다.

ⓒ 손수원

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파하르간지
델리에서 여행자들이 베이스캠프로 삼는 곳은 뉴델리 기차역 맞은편의 파하르간지(Pahar Ganj)다. 대략 시장 거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특히 델리의 파하르간지는 인도를 여행하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여행자 거리’다.
새벽에 도착해 생각지도 않은 거금 400Rs(루피)극 내고 첫 숙소를 잡고 방으로 들어간 순간,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덩그러니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는 그렇다 치고, 땀범벅이 된 몸을 씻으려 화장실 문을 여니 엄지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안녕?’ 하고 더듬이를 흔들어댄다. 수세식이라 믿었던 변기는 양동이로 직접 물을 흘려보내야 하고, 석회질이 듬뿍 함유된 수돗물은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마시면 폭풍 설사를 경험하게 될 것’ 이라고 겁을 준지라 비좁은 화장실에서 입을 앙 다문 채 큰 맥주잔만 한 양동이로 겨우 땀만 씻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과 릭샤, 소와 개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델리의 파하르간즈는 인도의 과거와 오늘, 미래까지도 공존하는 장소다. ⓒ 손수원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거리로 나오자 현지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람이 끄는 릭샤(인력거)부터 사이클릭샤와 오토릭샤, 거기에 사람과 개, 소가 뒤섞인 풍경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아침 청소 시간인지 아낙들은 연신 바닥을 쓸어내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만 날리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다. 먼지가 입에 모두 들어가도, 소가 길 한복판에 떡하고 서서 길이 막혀 꿈쩍하지 못해도 그저 ‘노 프라블럼’이다. 역시 인도인들의 무한 긍정의 힘은 대단하다. 길가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이는 인도가 낯선 외국여행객들뿐이다.

1 길에서 사모사와 과일 등을 파는 노점상인. 처음에는 먹을 엄두가 나지 않지만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2 인도의 소는 못먹는 것이 없다. 과일 껍질은 물론, 종이와 비닐까지도 아주 잘 먹는다. 3 카메라를 든 외국인은 인도 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이자 놀잇거리여서 카메라만 들이대면 알아서 재밌는 포즈를 척척 연출해준다. ⓒ 손수원
현지 식당에서 카레와 차파티(밀가루로 만든 납작한 빵)로 요기를 하는데, 향신료 냄새가 어찌나 심한지 반도 채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먹던 카레와 다를 거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마른입에 한술 떠먹으려니 이것도 고역이다. 앞으로 험난한 여행이 될 거란 예감이 든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인도인 사장은 웃으며 “Are you happy?”라고 묻는다. 나 또한 억지웃음을 지으며 “No problem”이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인도인 사장은 한사코 괜찮다는 나를 위해 카레를 리필해주었다.

무굴제국의 부귀영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올드델리의 붉은 성. 일단 규모에서부터 압도된다. ⓒ 손수원

야무나강이 흐르는 올드델리와 뉴델리
델리는 고대부터 수없이 많은 주인이 바뀌었다. 왕조의 교체는 물론,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힌두교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델리는 크게 올드델리와 뉴델리로 구분할 수 있다. 올드델리는 수천 년에 걸쳐 생긴 도시다. 무굴제국 시절 황제 샤자한은 건축에 대해 굉장한 집착을 보였는데, 올드델리 또한 그의 손을 거치면서 성벽도시로 탈바꿈했다. 반면 뉴델리는 인도를 정복했던 영국에 의해 건설되어 가지런한 시가지와 영국풍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인도에서의 첫 여정은 붉은 성으로 시작하기로 한다. 흔히 ‘랄 킬라(LalQuila. 랄은 붉은, 킬라는 성을 뜻한다)’라고 불리는 붉은 성은 델리에서 도 올드델리에 속하는 곳에 있는데,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세운 샤자한이 아그라에서 델리로 수도를 옮기면서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세운 성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성 입장료는 250Rs. 우리나라 돈으로 약 7000원 정도다. 웬만한 게스트하우스 하루치 숙박비에 맞멎는 금액이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현지인들은 단돈 10Rs란 것이다. 외국인 여행객들의 입장료가 무려 25배나 더 비싼 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랴 난‘Incredible India’에 들어와 있는 걸….

1 붉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테러사건이 종종 일어나는 인도인지라 검색이 철저하다. 2 인도에서 흰 소는 신과 같은 신성한 대접을 받는다. ⓒ 손수원

붉은 성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복은 하지 않고 침략만 당한 인도의 역사 속에서 붉은 성도 세포이 항쟁 대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비록 영국 식민지 시절에 일부 복원되었다고는 하나 너무도 성의 없이-기술의 부족함일지 모르겠지만-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거나 대충 페인트칠을 한 티가 난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붉은 성은 성 자체의 위용과 성 안의 아름다운 건축물만으로도 예술 작품 그 이상의 볼거리를 준다. 무굴의 황제들이 앉아 손님을 맞이했을 디와니카스(Diwan-i-khas)는 비싼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있었다.

샤자한은 10년에 걸쳐 이 성을 완성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 성에서 지내지 못했다. 그가 델리로 수도를 옮기기도 전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좌를 빼앗기고 아그라 포트에 감금해버렸기 때문이다. 붉은 성 안은 여느 평범한 공원과 같은 분위기가 난다. 현지인에게는 소풍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고, 델리의 무더운 날씨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 준다.

붉은 성 맞은편 언덕에 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건물은 인도 최대의 모스크인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지만 델리는 무슬림의 영향력이 큰 탓에 이렇게 이슬람 사원이 공존한다. 인도 최대의 시장 ‘찬드니촉(Chandni Chowk)’은 그야말로 사람의 바다다. 평일인데도 사람에 치여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찻길과 인도가 따로 없는데다 오토릭샤와 오토바이, 자동차는 연방 경적을 울려댄다. 우리나라에서는 욕먹을 짓이지만 인도에서는 경적을 울려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서 자동차나 오토릭샤 뒤를 보
면 으레 ‘Horn Please’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사이드미러조차도 자동차의 옵션인 인도에서는 경적이 운전의 일상인 셈이다.

1 델리의 중심을 유유히 흐르는 야무나강. 이 강은 후에 갠지스강과 합쳐서 바라나시의 타즈마할을 지난다. 2 인도 최대의 시장인 찬드니촉. 사람이 붐비면 ‘10억 인구의 나라’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3 인도에서 가장 자주 먹게 되는 비리야니. 한국이 볶음밥과 비슷하지만 쌀 자체가 달라 금방 허기가 진다. 4 영국풍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코넛 플레이스는 인도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곳이다. ⓒ 손수원

찬드니촉에서는 10억 인구란 말이 실감 난다.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만 해도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인데, 찬드니촉에서는 그런 비교조차되지 않는다. 외국인 여행객으로서 물건 하나 사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사람의 물결은 그렇다 치고 장사꾼의 호객 행위는 기가 찰 정도다. 50Rs도 안 되는 물건을 두고 300Rs부터 불러 크게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150Rs를 부른다. 이럴 때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면 그만이다. 5초도 안 되어 따라와선 “Your last price?”를 부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처음 가격보다도 싼 40Rs를 불러도 거래는 이뤄진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local price’다. 이런 흥정 과정이 처음에는 무척 짜증나고 기분 상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인도인들과 흥정하기 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을 정도다. 그런 와중에도 인도인들은 기분 상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비싸게 팔면 좋은 것이고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정신없는 올드델리와는 달리 뉴델리 쪽은 비교적 정리가 잘 된 편이다. 로터리가 여기저기 뒤섞여 신호등도 없는 도로는 여전히 눈을 핑핑 돌게 만들지만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나 인디아 게이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현대를 수용한 인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맥도널드와 커피데이 등 외식 체인점은 물론, 리복, 나이키, 아디다스 매장도 곳곳에 들어와 있다. 나름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현대적인 건물들도 올드델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심지어 이곳엔 지하철역도 들어와 있고, 지하상가도 있으니 여긴 서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델리를 둘러보지 않는다. 흔히 골든 트라이앵글(델리-아그라-자이푸르)이라고 불리는 단기간 인도 여행의 시작점이자 끝이기에 남는 시간 동안 둘러보면 그만인곳이다. 더구나 3개월 정도의 장기간 여행자라면 델리는 최소 3~4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인도의 첫 여정인 델리는 이렇게 인도의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과정이다. 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No problem’의 뜻을 1/10이라도 이해한다면 더 이상 인도는 ‘충격과 공포의 나라’가 아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나라’로 여행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 손수원

인도는 영적인 여행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인도는 휴식을 위한 곳이 아닌, 무언가 얻기 위해 떠난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떠났던 것은 아니다. 나의 인도 여행 3개월의 첫 시작은 ‘가깝고 싸니까’였다. 당연히 나의 무계획 인도 여행은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인디라간디국제공항. 자정이 지나 비행기에서 내린 나는 고온다습한 공기에 적응할 틈도 없이 공항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인도에 대한 가이드북에서는 늦은 밤에 공항 밖으로 나오는 것은 위험하니 아예 공항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나오는 게 낫다고 적어놨을 정도니 인도가 처음인 여행객에게는 진땀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는 그냥 포기하고 공항의 딱딱한 의자에 몸을 맡기거나 용기를 내 바깥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객기로 밖으로 나가면 후회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때는 프리페이드(pre-paid)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공항 내에 있는 부스에서 미리 택시비를 내고 지정된 택시를 타는 것인데, 이것 또한 사기를 당할 확률이 있지만 그래도 맨몸으로 나가 택시를 잡는 것보다는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최근에는 공항과 뉴델리 기차역이 지하철로 연결되어 훨씬 이동하기 수월해졌다).

하지만 택시를 무사히 탔다하더라도 안심하긴 이르다. 브레이크 라이닝 타는 냄새가 진동하는 오래된 택시는 차선 무시, 깜빡이 무시, 사이드 무시다. ‘제대로 된’ 운전사를 만나면 한국의 총알택시는 얼마나 얌전하게(?) 운전하는 건지를 깨닫게 될 정도다.

ⓒ 손수원

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파하르간지
델리에서 여행자들이 베이스캠프로 삼는 곳은 뉴델리 기차역 맞은편의 파하르간지(Pahar Ganj)다. 대략 시장 거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특히 델리의 파하르간지는 인도를 여행하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여행자 거리’다.
새벽에 도착해 생각지도 않은 거금 400Rs(루피)극 내고 첫 숙소를 잡고 방으로 들어간 순간,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덩그러니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는 그렇다 치고, 땀범벅이 된 몸을 씻으려 화장실 문을 여니 엄지 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안녕?’ 하고 더듬이를 흔들어댄다. 수세식이라 믿었던 변기는 양동이로 직접 물을 흘려보내야 하고, 석회질이 듬뿍 함유된 수돗물은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마시면 폭풍 설사를 경험하게 될 것’ 이라고 겁을 준지라 비좁은 화장실에서 입을 앙 다문 채 큰 맥주잔만 한 양동이로 겨우 땀만 씻어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과 릭샤, 소와 개가 한 공간에서 공존하는 델리의 파하르간즈는 인도의 과거와 오늘, 미래까지도 공존하는 장소다. ⓒ 손수원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거리로 나오자 현지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람이 끄는 릭샤(인력거)부터 사이클릭샤와 오토릭샤, 거기에 사람과 개, 소가 뒤섞인 풍경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아침 청소 시간인지 아낙들은 연신 바닥을 쓸어내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만 날리게 만들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노 프라블럼(No problem)’이다. 먼지가 입에 모두 들어가도, 소가 길 한복판에 떡하고 서서 길이 막혀 꿈쩍하지 못해도 그저 ‘노 프라블럼’이다. 역시 인도인들의 무한 긍정의 힘은 대단하다. 길가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이는 인도가 낯선 외국여행객들뿐이다.

1 길에서 사모사와 과일 등을 파는 노점상인. 처음에는 먹을 엄두가 나지 않지만 한번 맛들이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맛있다. 2 인도의 소는 못먹는 것이 없다. 과일 껍질은 물론, 종이와 비닐까지도 아주 잘 먹는다. 3 카메라를 든 외국인은 인도 아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구경거리이자 놀잇거리여서 카메라만 들이대면 알아서 재밌는 포즈를 척척 연출해준다. ⓒ 손수원
현지 식당에서 카레와 차파티(밀가루로 만든 납작한 빵)로 요기를 하는데, 향신료 냄새가 어찌나 심한지 반도 채 먹지 못했다. 한국에서 먹던 카레와 다를 거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마른입에 한술 떠먹으려니 이것도 고역이다. 앞으로 험난한 여행이 될 거란 예감이 든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인도인 사장은 웃으며 “Are you happy?”라고 묻는다. 나 또한 억지웃음을 지으며 “No problem”이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인도인 사장은 한사코 괜찮다는 나를 위해 카레를 리필해주었다.

무굴제국의 부귀영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올드델리의 붉은 성. 일단 규모에서부터 압도된다. ⓒ 손수원

야무나강이 흐르는 올드델리와 뉴델리
델리는 고대부터 수없이 많은 주인이 바뀌었다. 왕조의 교체는 물론,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힌두교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델리는 크게 올드델리와 뉴델리로 구분할 수 있다. 올드델리는 수천 년에 걸쳐 생긴 도시다. 무굴제국 시절 황제 샤자한은 건축에 대해 굉장한 집착을 보였는데, 올드델리 또한 그의 손을 거치면서 성벽도시로 탈바꿈했다. 반면 뉴델리는 인도를 정복했던 영국에 의해 건설되어 가지런한 시가지와 영국풍의 건물이 인상적이다.

인도에서의 첫 여정은 붉은 성으로 시작하기로 한다. 흔히 ‘랄 킬라(LalQuila. 랄은 붉은, 킬라는 성을 뜻한다)’라고 불리는 붉은 성은 델리에서 도 올드델리에 속하는 곳에 있는데,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세운 샤자한이 아그라에서 델리로 수도를 옮기면서 지은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세운 성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성 입장료는 250Rs. 우리나라 돈으로 약 7000원 정도다. 웬만한 게스트하우스 하루치 숙박비에 맞멎는 금액이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현지인들은 단돈 10Rs란 것이다. 외국인 여행객들의 입장료가 무려 25배나 더 비싼 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랴 난‘Incredible India’에 들어와 있는 걸….

1 붉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테러사건이 종종 일어나는 인도인지라 검색이 철저하다. 2 인도에서 흰 소는 신과 같은 신성한 대접을 받는다. ⓒ 손수원

붉은 성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복은 하지 않고 침략만 당한 인도의 역사 속에서 붉은 성도 세포이 항쟁 대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훼손되었다. 비록 영국 식민지 시절에 일부 복원되었다고는 하나 너무도 성의 없이-기술의 부족함일지 모르겠지만-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놓거나 대충 페인트칠을 한 티가 난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붉은 성은 성 자체의 위용과 성 안의 아름다운 건축물만으로도 예술 작품 그 이상의 볼거리를 준다. 무굴의 황제들이 앉아 손님을 맞이했을 디와니카스(Diwan-i-khas)는 비싼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있었다.

샤자한은 10년에 걸쳐 이 성을 완성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 성에서 지내지 못했다. 그가 델리로 수도를 옮기기도 전에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좌를 빼앗기고 아그라 포트에 감금해버렸기 때문이다. 붉은 성 안은 여느 평범한 공원과 같은 분위기가 난다. 현지인에게는 소풍을 즐길 수 있는 장소이고, 델리의 무더운 날씨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 준다.

붉은 성 맞은편 언덕에 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는 건물은 인도 최대의 모스크인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다.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지만 델리는 무슬림의 영향력이 큰 탓에 이렇게 이슬람 사원이 공존한다. 인도 최대의 시장 ‘찬드니촉(Chandni Chowk)’은 그야말로 사람의 바다다. 평일인데도 사람에 치여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뒤로 밀려나기 일쑤다. 찻길과 인도가 따로 없는데다 오토릭샤와 오토바이, 자동차는 연방 경적을 울려댄다. 우리나라에서는 욕먹을 짓이지만 인도에서는 경적을 울려주는 것이 예의다. 그래서 자동차나 오토릭샤 뒤를 보
면 으레 ‘Horn Please’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사이드미러조차도 자동차의 옵션인 인도에서는 경적이 운전의 일상인 셈이다.

1 델리의 중심을 유유히 흐르는 야무나강. 이 강은 후에 갠지스강과 합쳐서 바라나시의 타즈마할을 지난다. 2 인도 최대의 시장인 찬드니촉. 사람이 붐비면 ‘10억 인구의 나라’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3 인도에서 가장 자주 먹게 되는 비리야니. 한국이 볶음밥과 비슷하지만 쌀 자체가 달라 금방 허기가 진다. 4 영국풍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코넛 플레이스는 인도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곳이다. ⓒ 손수원

찬드니촉에서는 10억 인구란 말이 실감 난다. 남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만 해도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인데, 찬드니촉에서는 그런 비교조차되지 않는다. 외국인 여행객으로서 물건 하나 사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게 느껴질 정도다. 사람의 물결은 그렇다 치고 장사꾼의 호객 행위는 기가 찰 정도다. 50Rs도 안 되는 물건을 두고 300Rs부터 불러 크게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150Rs를 부른다. 이럴 때는 미련 없이 뒤돌아서면 그만이다. 5초도 안 되어 따라와선 “Your last price?”를 부르기 때문이다. 당연히 처음 가격보다도 싼 40Rs를 불러도 거래는 이뤄진다. 이것이 바로 인도의 ‘local price’다. 이런 흥정 과정이 처음에는 무척 짜증나고 기분 상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인도인들과 흥정하기 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을 정도다. 그런 와중에도 인도인들은 기분 상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비싸게 팔면 좋은 것이고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그것은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정신없는 올드델리와는 달리 뉴델리 쪽은 비교적 정리가 잘 된 편이다. 로터리가 여기저기 뒤섞여 신호등도 없는 도로는 여전히 눈을 핑핑 돌게 만들지만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나 인디아 게이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현대를 수용한 인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맥도널드와 커피데이 등 외식 체인점은 물론, 리복, 나이키, 아디다스 매장도 곳곳에 들어와 있다. 나름 스카이라인을 형성한 현대적인 건물들도 올드델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심지어 이곳엔 지하철역도 들어와 있고, 지하상가도 있으니 여긴 서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델리를 둘러보지 않는다. 흔히 골든 트라이앵글(델리-아그라-자이푸르)이라고 불리는 단기간 인도 여행의 시작점이자 끝이기에 남는 시간 동안 둘러보면 그만인곳이다. 더구나 3개월 정도의 장기간 여행자라면 델리는 최소 3~4번은 들러야 하는 곳이다.

인도의 첫 여정인 델리는 이렇게 인도의 사람들에게 적응하는 과정이다. 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No problem’의 뜻을 1/10이라도 이해한다면 더 이상 인도는 ‘충격과 공포의 나라’가 아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나라’로 여행자의 마음속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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