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는 저명한 희극 배우마저 감동시켰다. 찰리 채플린은 20여 년간 레만호에 머물며 ‘석양의 호수, 눈 덮인 산, 파란 잔디가 행복의 한가운데로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몽트뢰(Montreux), 모르쥬(Morges), 로잔(Lausanne), 제네바(Genève)는 스위스 레만호에 기댄 도시들이다. 마을이 뿜어내는 매력은 단아하고 신비롭다. 호수 북쪽에는 예술가들의 흔적이 담겨 있고 남쪽으로는 프랑스 에비앙의 알프스가 비껴 있다. 도시와 호수 사이로는 정감 넘치는 스위스 열차가 가로지른다.

몽트뢰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레만호 전경. 호숫가 마을은 숱한 예술혼들을 담아내고 있다.

재즈페스티벌, 시옹성을 추억하다

해질 무렵이면 몽트뢰의 언덕에 오른다. 레만호는 높은 곳에서 응시할수록 아득한 속살을 드러낸다. 온종일 잿빛 구름과 입맞추던 호수가 파스텔톤으로 변해간다. “글쎄요? 일주일만 보면 지겨울 수도 있어요.” 2년 동안 몽트뢰에 머물고 있다는 한 여인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더니 씁쓸하게 웃는다. 호수 위로 병풍처럼 빛이 내려앉는다. 지겨울 수 있다던 그녀는 꽁초가 타들어가도록 시선을 떼지 못한다. 호수는 품에 안긴 사람들의 숱한 사연과 생채기마저 담아 낸다.

레만호는 시간에 따라, 날씨에 따라 풍겨내는 분위기가 다르다.

그룹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 역시 레만호를 떠나지 못한 아티스트다. 몽트뢰의 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호수를 바라보며 세워져 있다. 그가 남긴 한 구절 글귀가 눈과 가슴에 박힌다. ‘나에게 몽트뢰는 제2의 고향이다.’

몽트뢰의 매년 7월은 재즈페스티벌로 채색된다. 67년 시작된 재즈 페스티벌은 필 콜린스, 밥 딜런, 스팅 등 유명 스타들이 스쳐 갔다. 그들의 선율이 닿았을 호숫가 산책로는 예술혼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다. 퀸, 스트라빈스키 등 음악가 외에도 루소, 바이런, 헤밍웨이 등이 이곳을 배경으로 흔적을 남겼다. 가수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의 소재가 된 카지노도 몽트뢰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레만호의 반대쪽은 프랑스 알프스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시옹성은 바이런의 ‘시옹성의 죄수’로 더욱 유명해졌다.

몽트뢰를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퀸’의 프레드 머큐리 동상

몽트뢰의 영감은 시옹성까지 닿아 있다. 바이런이 쓴 ‘시옹성의 죄수’로 유명해진 시옹성은 호숫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스위스의 대표적인 고성으로 더없는 풍광을 자랑하지만 내부는 지하 감옥 등 섬뜩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기둥 어딘가에는 바이런의 이름도 남아 있다. 사연이야 다르지만 철벽 시옹성의 죄수 역시 레만호를 떠날 수는 없었다.


숨겨진 와인산지와 프랑스풍 길목

몽트뢰에서 모르쥬로 연결되는 길은 숨겨진 와인산지다. 깎아지른 절벽에 위치한 포도밭은 호수에 반사된 햇빛까지 품에 안아 풍요롭다. 열차가 지나는 머리 위로 포도송이들은 매달려 있다. 이곳 라보(Lavaux) 지구는 계단식 포도밭, 레만호, 프렌치 알프스의 풍광이 어우러져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호수와 설산을 바라보며 포도밭 사이를 걷는 여행은 최근 인기가 높다.

모르쥬는 1년 내내 꽃을 피워 내는 아름다운 꽃의 도시다.

레만호 일대는 스위스 와인의 숨은 보고이기도 하다.

로잔 곳곳에서는 올림픽을 상징하는 동상들을 만나게 된다.

모르쥬는 ‘레만 호수의 꽃’으로 불린다. 봄이면 10만 송이 튤립 속에서 튤립축제가 열린다. 꽃축제는 아이리스, 달리아 축제로 이어져 연중 꽃을 볼 수 있다. 모르쥬 외곽의 톨로체나즈 (Tolochenaz)는 오드리 헵번이 여생을 보낸 고장으로 아침 장터는 헵번이 레만호 산책을 겸해 들린 곳이기도 하다.


모르쥬와 맞닿은 로잔은 두 가지 모습이다. 우리에겐 올림픽의 도시로 익숙하지만 스위스 사람들에게는 음악, 연극의 도시로 명성 높다. 도시는 샘이 날 정도로 깔끔하게 정제돼 있지만 스위스 젊은이들의 뜨거운 나이트라이프를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호숫가 올림픽 박물관에는 육상 스타 임춘애가 들고 달렸던 88올림픽 성화와 호돌이가 장식돼 있다. 언덕 위 로잔 노트르담대성당이 로잔의 상징. 고딕양식 성당에는 야경꾼이 소리 내어 시간을 알리는 이색 전통이 남아 있다.

제네바 시내에 들어서면 프랑스풍의 향취가 가득하다.

레만호의 남서쪽으로 내려서면 프랑스풍 향기가 배어나는 제네바다. 레만호는 제네바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중앙역에서 보행자 거리인 몽블랑 거리로 이어지는 길은 늘 이방인들로 북적인다. 레만호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에는 낯선 프랑스어와 명품상점, 커피 한잔의 여유가 가득하다. 구시가지 길목에서는 생피에르 성당 외에도 오래된 서점과 가게들이 촉촉히 젖어 있다.

레만호의 외곽으로는 아득한 전원풍경이 이어진다.

제네바에서 론강을 따라 유람선을 타고 외곽으로 나서면 녹색지대다. 스위스 제3의 와인생산량을 자랑하는 강변계곡에서는 와인메이커가 직접 만들어내는 하우스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붉은 와인을 한잔 기울이면 레만호를 사랑했고, 떠나지 못했던 숱한 사연들이 아련하게 소용돌이친다.

가는 길
레만호 여행은 열차편이 많은 제네바에서 출발하는 게 편리하다. 제네바에 도착해 몽트뢰로 이동한 뒤 제네바로 다시 거슬러 오르며 호숫가 마을을 둘러본다. 테마 열차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골든 패스 라인은 취리히루체른인터라켄∼몽트뢰∼제네바를 잇는 코스로 스위스의 호수들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열차에는 천장에 유리창이 설치된 ‘파노라믹 객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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