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여자가 남자? 터프한 남자가 여자?… 이곳에선 원칙을 논하지 말라

한때 다니엘 페낙의 '말론센' 시리즈에 열광했던 나는 그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벨빌' 같은 곳에서 살면 소설은 절로 써질 것이라 상상하곤 했다. 인생의 절반을 거대한 아파트 단지 속에서, 비슷한 억양의 한 가지 언어만 듣고 살아온 내게 유대인 이민자들과 불법 체류자들, 아랍인과 흑인, 중국인들이 다닥다닥 모여 사는 시끄러운 동네가 매력적으로 보인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가지각색으로 다른 외국의 억양이 합쳐진 소리에, 그곳의 아이들과 나무들에, 열심히 살아가는 중산층 가정에, 레즈비언 커플들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 길거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하는 헐렁한 흰 옷을 걸친 인도인 성자들에게, 그곳의 난쟁이들과 불구자들에게, 보도를 따라 굼벵이 걸음을 걷는 늙은 연금 수령자들에게, 그곳의 교회 종소리와 수천 마리 개들에게, 지하 셋방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길거리를 따라 손수레를 밀고 돌아다니며 빈병과 폐품을 찾아 뒤지는 떠돌이 넝마주이들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폴 오스터가 묘사하는 브루클린과 다니엘 페낙이 속삭이는 벨빌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비슷해서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인종과 언어를 초월한 욕망의 집결지 같다. 언젠가 '엘르'에서 폴 오스터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나는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70년대에 인구통계 조사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할렘가 담당이었죠. 아주 나이 많은 흑인 여자의 집을 방문하게 됐어요. 시력을 거의 잃은 여자였는데 나를 멀찍이 보더니 이러더라고요. 당신은 흑인이 아니군요. 백인이에요. 내 인생 통틀어 우리 집에 온 첫 번째 백인이네요."

그 첫 번째 백인의 존재는 작가라는 자기 정체성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벨빌이나 브루클린 같은 곳에 아이가 탄생한다면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주인공 '모모' 같은 존재, 아이지만 신비로운 눈망울을 가진 '어른아이'로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브루클린 풍자극'에도 어느 날, 이런 존재가 선물처럼 배달된다.

"나는 조용히 죽을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소설 '브루클린 풍자극'은 퇴직한 59세 생명보험판매원인 네이선 글래스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폐암으로 항암치료를 받던 중 회사에서 잘리고, 아내와는 일찌감치 이혼했으며,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과도 사이가 틀어지기 일보 직전인 이 위기의 남자가 어느 날, 죽을 만한 장소로 브루클린을 선택한다.

뉴욕시 브루클린의 워터프론트 공원에서 한 부부가 마천루를 뒤로 산책을 하고 있다. / APㆍ뉴시스

하지만 그는 우연히 헌책방에서 오래전 소식이 끊겼던 조카 톰을 만나게 되고, 타고난 엘리트로 영문학 교수가 될 재목이었던 톰이 어떤 사연인지 한껏 뚱뚱해진 몸으로 택시 운전을 하다가 브루클린의 헌책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톰이 변한 이유를 찾던 네이선은 주소 하나 달랑 적힌 쪽지를 들고 자신에게 찾아온 톰의 조카 루시와 살게 되고, 곧 톰과 함께 행방이 묘연한 루시의 엄마를 찾아 긴 여행을 나서게 된다.

그들의 기이하고 괴상한 여행이 주는 선물은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느냐는 폴 오스터의 오래된 질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죽음의 끝에서 삶 쪽으로 걸어 나오던 주인공 네이선이 마주친 뉴욕의 하늘은 세계무역센터의 북쪽 타워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기 딱 46분 전인 2001년 9월 11일 오전 여덟시. 그의 증언대로 "그로부터 두 시간 뒤에는 3000명을 재로 만들어 버린 연기가 브루클린 쪽으로 밀려올 것이고 그와 함께 죽음과 재가 하얀 구름으로 우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이다.

브루클린을 '브루클린으로 향하는 마지막 비상구' 같은 영화의 배경으로 기억하는 사람에게 이곳은 분명히 술에 취한 몽롱한 눈빛의 창녀 '트랄라'의 도시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가 말하는 브루클린, 특히 '에드거 앨런 포우'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비교논문으로 삼촌 네이선을 늘 기쁘게 했던 톰이 택시 운전기사로 이 도시를 누비며 이 도시를 예찬하는 장면에선, 그만 이 욕망의 집결지에 비추는 수많은 네온들이 결국 도시의 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새벽 세 시 반에 타임스 광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다 보면 모든 통행이 다 끊어져서 문득 세상 한복판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머리 위로는 사방에서 온통 네온 불빛이 쏟아져 내리고요. 아니면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이나,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택시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실제로 우주 속을 날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이토록 시적인 문장이 가능한 도시에서 처참한 테러가 자행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이고, 누구보다 터프한 저 남자가 여자라는 또 다른 역설, 이것이 브루클린이 가지고 있는 삶의 역동성은 아닐까. 인간은 죽음으로서 또한 살아가는 그런 존재는 아닐까라는 거대한 질문이 유효한 곳 말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브루클린 풍자극
국내도서
저자 : 폴 오스터(Paul Auster) / 황보석역
출판 : 열린책들 200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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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떠나는 뉴욕 공원 여행
멜로영화 단골센트럴파크의 아이스링크장
영화 '빅'에 나온 'F.A.O 슈월츠' 장난감 가게

'뉴요커(Newyorker)'가 대체 뭐길래. 시카고나 오하이오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는 특별히 없어도 뉴욕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뉴요커란 단어는 이미 고유 명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뉴욕에 사는 미국 작가 조시 킬러-퍼셀은 "나는 절대 뉴욕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뉴요커가 되는 데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이 도시에서 죽는다면 자격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뉴욕을 가보지 못한 사람들조차 '뉴욕'이란 지명에 설레고 뉴요커를 동경한다. 영화의 배경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도시도 뉴욕이다.

뉴욕의 매력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을 찬찬히 살폈다. 눈길을 끌었던 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자유의 여신상도, 브로드웨이도 아니었다. 공원이었다. 영화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원 때문에 지금까지 이토록 뉴요커가 부러웠나 보다. 

브루클린 브리지 파크(위)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포스터의 배경이 된 브루클린의 덤보.(아래)

◆브루클린 브리지 파크에서 맨해튼을 감상하고

뉴욕에서 가장 잘나가는 식당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도, 괜찮은 옷을 건질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도 대답은 하나같이 브루클린이다. 브루클린은 맨해튼의 소호나 그리니치빌리지 등에 모여 살던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비싼 집세를 견디지 못해 옮겨 간 곳이다. 이 감각 있고 활동적인 젊은이들은 브루클린을 뉴욕에서 가장 세련된 동네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브루클린의 집세도 올랐다.

브루클린의 옛 모습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브루클린 다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포스터는 브루클린의 ‘덤보(DUMBO)’에서 촬영한 것이다. ‘다운 언더 더 맨해튼 브리지 오버패스(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의 단어 앞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차마 동네 이름을 ‘멍청한(DUMB)’으로 지을 수 없어 마지막 단어를 끼워넣었다고 한다. 포스터의 배경이 된 지점은 지하철 F선을 타고 ‘요크스트리트’에서 내리면 3분 거리에 있다. 갱스터영화의 배경이 될 정도로 위험하고 삭막했던 덤보도 1970년대 아티스트들이 찾아오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은 건물마다 갤러리가 있고, 신진 디자이너들의 옷을 모아다 파는 편집 매장들도 눈에 띈다.

포스터를 찍은 곳에서 한 블록만 더 가면 브루클린 브리지 파크다. 브루클린 다리와 이스트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로 맨해튼의 전경이 펼쳐진다. 맨해튼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맨해튼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뉴욕공공도서관ㆍ브라이언트 파크(위) / 재난영화 '투모로우'는 42번가에 있는 뉴욕 공공도서관 슈워츠먼 빌딩(아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브라이언트 파크에서 여유를 즐기고

뉴욕에 도착한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찾는 장소는 브로드웨이와 42번가가 만나는 곳이다. 뮤지컬 극장과 프랜차이즈 식당이 빼곡히 들어선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건 관광객 아니면 노숙인밖에 없다. 하지만 실망을 속으로 눌러담은 채 길 하나 건너면 이 도시가 숨겨놓은 보석을 발견할 수 있다. 뉴욕공공도서관과 그 옆에 딸린 브라이언트 파크다.

뉴욕공공도서관은 뉴욕 전역에 걸쳐 여러 건물이 있지만 브라이언트공원과 함께 있는 이 건물이 가장 대표적이다. 영화 ‘투모로우’는 아예 이 도서관 안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었고, 영화 ‘섹스 앤드더 시티’에서 여자주인공 캐리가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던 장소도 여기다. 얼핏 지루할 것 같지만 사실은 맨해튼에서 가장 운치 있는 곳이다. 높은 천장과 채광이 좋은 창문에다 널찍한 나무 책상 위에 초록색 빈티지풍 램프가 놓인 풍경은 책을 읽고 싶게 만든다. 여행자들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다.

도서관에 붙어 있는 브라이언트 파크는 여행자들의 쉼터 구실을 제대로 한다. 널찍한 잔디 주위에 파라솔이 꽂힌 탁자와 의자가 넉넉히 놓여 있다. 최근에는 한 미국 항공사에서 이곳에 천막을 친 후 소파와 탁자를 여러 개 갖다 놓고 노천카페까지 만들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고, 아무것도 시키지 않은 채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어도 된다. 바비큐도 있는데 치즈버거나 핫도그가 포함된 세트메뉴가 20달러로 맨해튼 물가 기준에선 저렴한 편이다.

톰킨스 파크(위) / '위대한 유산'에서 남녀 주인공은 이스트빌리지의 톰킨스 파크에 있는 분수대에서 키스했다.(아래)

◆톰킨스파크에서 분수대 키스를

뉴욕의 공원들은 크기를 불문하고 영화에 한 번씩은 다 나왔다. 센트럴파크의 울먼 메모리얼 링크는 ‘러브스토리’, ‘세렌디피티’ 등 멜로영화에 단골로 등장했다. 겨울에는 아이스링크로, 다른 계절에는 어린이 놀이공원으로 활용된다. 센트럴파크 중간쯤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은 벤 스틸러가 주연한 ‘박물관이 살아 있다’와 우디 앨런 감독의 ‘맨해튼’에 나왔다. 의외로 남녀가 함께 가면 사랑이 절로 싹틀 정도로 로맨틱한 곳이다. 센트럴파크 입구에 있는 고급 장난감 가게 ‘F.A.O 슈월츠’는 톰 행크스가 ‘빅’에서 발로 피아노를 연주한 곳으로 잘 알려졌다. 아이들만큼이나 어른들도 좋아해서 연령대와 상관없이 선물 사기에 좋은 곳이다.

이스트 빌리지에 있는 톰킨스파크는 영화 ‘위대한 유산’에서 에단 호크와 귀네스 팰트로가 ‘분수대 키스신’을 선보인 곳이다. 나무가 많아 시원하고 산책로에는 청설모들이 뛰어다닌다. 윌 스미스가 주연한 ‘나는 전설이다’에는 그리니치빌리지의 워싱턴스퀘어파크가 등장했다. 뉴욕대 캠퍼스 근처에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고 주변에 이들이 좋아할 만한 식당과 상점이 많다. 갖은 종류의 크림치즈와 쫀득한 베이글로 유명한 ‘머레이스 베이글’에서 연어베이글샌드위치를 사다가 공원에 소풍 나갈 것을 권한다.

뉴욕의 공원은 잔디만 키우는 곳이 아니다. 영화 상영, 공연, 패션쇼 등도 자주 열린다. 저녁에 하는 영화 상영에는 샌드위치나 피자 등을 싸들고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다. 공원의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행사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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