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흥'

그림
그림=임형남 건축가
중국의 오래된 도시, 소흥에 간 적이 있다. 전시장에서 여러 가지 유물을 구경하다가 진시황 때 승상인 이사(李斯)가 전국에 내렸다는 비석의 탁본을 봤다. 이사가 직접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최초로 중국의 공식 문자가 된 소전체로 써내려간 비석 글씨는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무척 아름답고 영롱했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지략가다. 최고 영예와 권력을 누렸던 성공한 정치인으로, 자식도 출세해 맏아들 이유는 태수(지방행정 책임자)가 됐다. 어느 날 아들이 휴가를 얻어 오자 이사는 술자리를 열었다. 온갖 관리가 찾아와 그의 대문 앞과 뜰에는 수레와 말이 수천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사는 한숨을 쉬며 "신하 된 자로서 나보다 윗자리에 있는 이가 없고 부귀도 극에 달했다고 할 만하다. 만물은 극에 이르면 쇠하거늘 내 앞날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구나" 하고 말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는 추락한다. 분서갱유에 앞장서는 등 과감하고 냉정한 정치를 펼쳤던 이사는 환관 조고와 벌인 정쟁에서 패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아들과 함께 모반죄로 처형되게 된 그는 아들에게 "내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누런 개를 이끌고 상채 동쪽 문으로 나가 토끼 사냥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겠구나" 하며 울었다.

이와 대조적인 사람이 있다.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월나라를 춘추시대의 중요한 나라 반열에 올린 이, 범려(范蠡)다. 대업을 이루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순간, 친구에게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게 된다"(토사구팽·兎死狗烹)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몸을 숨긴다. 그 뒤 유유자적하며 평생을 편안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그 어떤 호걸이나 천재도 월나라의 재상 범려처럼 현명하게 처신하고 행복하게 인생을 마감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소흥은 바로 범려가 활약했던 월나라의 수도였다. 천재 화가 서위, 중국 근대 영웅이자 문학가인 루쉰(魯迅), 현대 중국을 열었던 정치인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소흥 출신이다. 인물이 많고 역사가 깊으니 시간의 골이 깊은 곳이다. 시간의 켜가 아주 깊고도 유현한 느낌을 풍기며 차곡차곡 쌓여 있는 곳이다.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자 아주 천연덕스럽게 잘 살아있는 오래된 동네와, 태연하게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물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소흥은 물의 도시다. 물이 집 사이로 자연스럽게 흘러다니고 그 물 위에 배를 띄우고 골목을 거스르기도 한다. 소흥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중국의 문학가 루쉰이 살던 동네도 그랬다. 루쉰의 집과 그 주변은 굉장한 관광지로 사람이 가득하다. 그의 소설의 배경이 된 많은 곳도 역시 관광지가 됐다.

독특하고 폐쇄적인 가옥 구조가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고 자로 재고 앞뒤가 잘 맞는 계산처럼 집들은 질서정연하다. 큰길에서부터 보이는 루쉰의 옛 동네(魯迅故里·노신고리)라는 간판을 보면서 들어가면 모든 집과 길이 관광객을 무척 반기는 듯한 표정으로 즐비하게 들어차 있다. 약간은 표준화된 관광지 모습에 약간 지겨워질 즈음 루쉰 집 건너편에 그가 다녔던 학교인 삼미서옥(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서당)으로 향했다. 자그마한 개천을 건너야 하는데 그 개천이 길이 되고 골목이 돼, 집과 집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무척 매혹적이어서 목적을 잊은 채 무엇에 홀린 듯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니, 작은 동네가 나온다. 빠끔히 넘겨다본 집 안으로 빨래며 가재도구며 여러 살림살이가 그대로 보였고, 간혹 지나다니는 아이들과 수로로 내려가는 돌계단, 물에 떠있는 작고 뾰족한 배가 보였다. 어떤 사내가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에 눈이 매운지 한 눈을 찡긋 찡긋하며 배를 저어서 나간다.

너무나 잘 정비되어 있는 한 켜 바깥 길과는 대조적이다. 생활 그대로 드러나 있는, 마치 도시의 속살과 같은 마을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변하고 또 사람이 변하지만 도시 내부에 촘촘히 흐르는 물길은 수천 년 동안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소흥에서 받은 다층적 시간의 인상은 그런 시간을 초월한 연속성에서 나왔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더럽고 냄새 난다고 덮어버리고, 길을 넓힌다며 덮어버린 서울의 무성했던 물길이 생각났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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