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01(카파도키아 명물인 기구투어. 중력의 힘을 가뿐하게 이겨내어 새가 되어 날아보자. 열기구의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이 크다.)

[MOUNTAIN=김지영] 최근 들어 TV나 블로그 등의 홍보로 터키 여행은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꼬마들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여행 필수코스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자고 먹고 반복해도 제자리의 시계바늘처럼 쉽게 줄어들지 않는 12시간의 비행시간을 비웃듯이 가볍게 비행기에 올랐다. 저녁에 출발해, 도착하니 다시 저녁이다.

중력을 이겨내는 어마어마한 힘을 얻다
터키 아타투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행은 이제 시작. 영어와 터키어로 복잡하게 뒤얽힌 국내선으로 한 번 더 갈아타고, 총 14시간의 비행시간 후에 도착한 곳은 카파도키아 지역의 괴레메 마을이다.

↑ 0002(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바위 안에 파인 수도원으로 들어가, 박해받은 그리스인들이 되어보자.)

카파도키아는 비잔틴(로마)시대에 기독교인에 설립 된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시대의 지역 명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 시기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시대의 탄압을 피해 이곳에 자리매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세계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 왕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것도 카파도키아였다. 또한 비잔틴 시대에 정치권력과 손을 잡은 타락한 기독교인들을 비판하는 수도승들이 함께 모여 살며 개혁 운동을 시행하던 곳에서 의미가 깊다. 로마시대의 일상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새롭고 신기할 뿐이다. 기독교 박해로 수천, 수만 세월 동안 자연의 풍화 작용으로 만들어진 희귀한 바위 속에 동굴을 만들어 숨어 살던 그들의 일상은 현 시대의 우리에게는 소중한 역사 속의 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 0003(그리스도인들이 카파도키아에서 교회를 세우고, 예수, 성모 마리아 등의 그림들을 그리고,숭배했다.)

카파도키아는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층이 굳어 긴 시간동안 자연적으로 생겨난 모습이다. 이 곳의 지역에 있는 바위들이 비슷하고, 똑같이 생겼더라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모습이 아니라, 자연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희귀한 광경이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카파도키아에서는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 같은 황량함을 느낀다.

↑ 0004()

↑ 0005(수 만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기괴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제미벨리의 바위 속에 파뭍혀 길을 걸어보자.)

이틀간의 카파도키아 여행은 첫날 기구투어, 그린투어에 합류해 진행하고, 둘째 날에는 카파도키아를 내 몸으로 느끼기 위해 다양한 지역 주민에게 물어물어 잘 나오지 않은 지도를 보고 협곡 트레킹을 떠났다.
한국에서 카파도키아는 기구투어를 하는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새벽 일출과 함께 카파도키아의 다양한 모양의 바위 위를 날고 있노라면, 한가로이 하늘 위에 둥둥 떠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된다. 나를 누르는 중력은 어디 갔는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 기구에 비춰지는 카파도키아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를 하며, 서로의 여행 계획을 묻는다. 그리고 여행에서 있었던 재밌는 사건 사고들을 말하며 서로 공감하고 좋아한다. 터키여행의 시작이 좋다.
기구는 엄청난 열기와 공기로 힘껏 어깨 필 준비만으로도 충분한 위엄을 자랑하며 우리를 압도 시킨다. 누워만 있던 열기구가 이제 기운을 차린다. 조금씩 일어난다. 아무리 열과 공기를 불어넣어도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던 열기구가 벌떡 일어선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고 열기구에 올랐다. 열기구에서 내려 보는 카파도키아는 우주에서 자전을 멈춘 지구를 보는 듯하다. 나를 누르는 중력을 내가 손 하나 까딱 해 밀어내고 있다. 하늘 위에서 내일의 트레킹 코스도 함께 가늠해본다.


↑ 0006(황폐할 것만 같은 카파도키아에 흐르는 생명력 넘치는 으흘랄라 계곡. 그린투어를 이용하여 반드시 방문해보자.)

황량한 카파도키아에서 생명을 찾다
그린투어는 카파도키아 괴레메에서 약 1시간가량 차로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으흘라라 계곡을 가기 위해 신청했다. 입구에서 내려다보는 계곡과 양쪽으로 높이 뻗은 바위들은 다시 한 번 환호성을 지르게 한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높은 이 바위틈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기독교인들의 보금자리가 있다. 이러한 놀라움에 바위를 따라 내려가 길의 바닥에는 흐르는 계곡 물이 있다. 황량했던 카파도키아에서 계곡을 보다니.
으흘랄라 계곡 트레킹은 처음 약 10분간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계곡에 이르러 평평한 오솔길로 이어져 있다. 이 오솔길을 약 1시간 30분에서 2시간 가량 걷다보면 출구가 나온다. 버스를 이용해도 되지만, 그린투어에 참가하면 먼 곳까지 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 0012(카파도키아에 방문하면 동굴호텔에서 분위기를 흠뻑 느껴보자.)

그린투어에는 이 밖에도 유네스코에 등록된 데린쿠유 지하도시도 함께 방문 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땅 아래에 굴을 파고 조성한 도시인데, 카파도키아 전체 30개가 넘는 지하도시가 있다고 한다. 뜨거운 햇볕을 뒤로 하고, 지하 8층 깊이의 이곳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시원하고, 아늑해 좋다. 하지만 아직 지하 일층. 가이드의 인솔아래, 한 층 한 층 계속 내려간다. 내려갈수록 내 한번 굽혀진 허리는 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왠지 산소도 부족해서 숨도 더 차는 듯 한 느낌이다.
이 지하도시는 과학적으로 만들어져서 환풍구도 있고, 지하 8층까지 식수나, 물건들을 나를 수 있는 통로도 있다. 이러한 좁은 곳에서 박해를 받아도시를 형성하고, 살아갔다는 비잔틴 시대의 사람들을 생각하니, 재미있게 구경하러 온 나의 마음이 숙연해졌다.

스타워즈 주인공처럼 희귀한 바위들 사이를 누벼보자
오늘은 어떤 투어에도 참여하지 않고, 내 두발로, 내 눈으로 길을 찾고 걸어 다닐 예정이다. 물론 내 보물인 지도를 들고 총 네 곳의 협곡을 트레킹했다. 유명하지만 일반적으로 투어가 연결되지 않아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는 제미벨리를 비롯하여 로즈벨리와 레드벨리까지 계획했다. 약 6~7시간에 걸친 벨리 트레킹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대중교통 없이도 쉽게 걸어가면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인적이 드물지만, 넓은 벨리 속에서 그들만의 트레킹 길 표시가 수많은 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는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준다. 길이 다양하게 있을 때는 주위를 둘러보고 방향표시를 찾자.


↑ 0014(인적이 드물지만, 길을 잃을 위험은 없다. 주위를 둘러보고 표지판만 잘 따라가면 된다.)

제미벨리는 괴레메 마을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벨리의 초입은 우뚝 솟은 바위들 사이로 길이 나있다. 사실 이 계곡은 여행책자에 따르면 4~5km 정도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계곡 끝부분은 길이 보수가 되어있지 않고, 잃을 위험이 크다. 시작점에서 출발해, 약 한 시간가량 표시가 잘 되어있는 길을 따라 둘러보고 나오는 것이 좋다.


↑ 0013(레드벨리와 로즈벨리는 미국의 그랜드 캐년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일몰을 바라볼 수 있다.)

제미벨리를 걷고 있으면 멀리 마치 미국의 그랜드 캐년과 같은 풍광을 자랑하는 레드벨리와 로즈벨리를 함께 볼 수 있다. 제미벨리를 따라 걷다보면 유네스코에 등록된 교회를 볼 수 있다. 이 교회에서 일하고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의 가던 길을 붙잡고 차 한 잔주시며 교회를 소개시켜주신다. 처음엔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현지인이 처음이라 거리감을 두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교회를 몇십 년 동안 지키시면서 세계 각국의사람들에게 괴레메 마을의 자랑거리와 구경거리를 소개해 주시고, 한숨쉬고 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주셨다. 그의 친절함에 낮선 길을 걷는 나의 긴장감을 따뜻한 홍차 한 잔으로 사르르 녹여주었다.

↑ 0011(갈라타 탑에서 바라본 이스탄불 전경.)

레드벨리와 로즈벨리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꼬리를 살랑 거리는 레드벨리와 로즈벨리는 같이 이어져 있어서 한 번 가면 일석이조로 트레킹을 할 수있다. 보통은 로즈벨리 투어에 있어서 약 만 원 정도만 여행사에 지불하면 트레킹 시작하는 입구에 데려다 주고, 아크테페라는 일몰 전망대에서 일몰을 보고 데려와 준다. 몇 몇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여행객들을 위해 기구투어, 그린투어를 하면 서비스로 함께 신청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직접 제미벨리를 지나 레드벨리 향했다.
이곳은 투어로는 보지 못할 길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바위 사이도 지나가고, 스타워즈 영화에 나오는 외계의 행성에 와 있는 느낌도 준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하다 길이 없으면 주위를 살피라. 또 길 표시가 있다.
한참을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면 레드벨리가 나온다. 약 2km를 가면 입구가 나오고 이제 전망대에 오르면 된다. 레드벨리와 로즈벨리는 미국의 그랜드 캐년의 축소판이다. 광활한 붉은 바위들로 장관을 만드는 협곡들 사이로 메마르지만 장엄한 바위들이 솟아나 있다. 이렇게 트레킹을 마치고 내려오면 괴레메 마을과 차우신 마을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온다. 각자의 목적지에 따라 길을 선택을 하면 된다.

기운이 넘치는 자연의 힘을 보고, 듣고, 느껴보자
페티예 시내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고불고불한 산길을 가다보면 눈앞에 펼쳐진 사클라켄트를 발견한다. 사클라켄트는 페티예 남동쪽 약 55km에 자리한 협곡으로 여름에는 계곡 트레킹이 명성을 날린다. 계곡 입구 마을부터 이미 적벽대전에서 승리하고도 남을 엄청난 기운을 느낀다. 표를 끊고 200 미터 가량은 안전하게 계곡 트레킹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충분히 기운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여름이나, 오전 중엔 가이드와 함께 안전하게 계곡에서 두발로 걸어보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계곡 물 속에서 내 두발은 왠지 모를 신선노름이다.

↑ 0007(욜루데니즈 해변의 사람들 틈에 낚시하는 노인.)

페티예의 이튿날은 고대하던 욜루데니즈 블루라군 트레킹이다. 시작은 페티예의 카야쾨이, 그리스인들이 거주하였다가 지금은 다 빠져나가버린 유령도시이다. 이곳에서 도착해 한걸음씩 올라가면 송글송글 맺히는 내 이마의 땀. 더워서인지, 아무도 살지 않는 카야쾨이의 적막함으로 등골이 오싹해져서 인지 알 수 없다.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페티예에서 올라가는 길은 노란색과 빨간색 선으로 돌이나, 기둥 등에 표시가 되어 있다. 또한, 카야쾨이 마을 위에만 올라가면 평탄한 길로 블루라군 뿐만 아니라, 봄이면 나비가 가득한 버터플라이 계곡까지 보면서 내려올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오면 길을 찾기 어렵고 오르막길이 계속되며, 무엇보다 블루라군에게 당신의 뒷모습만 보여준다. 그러니 선택은 자유.

↑ 0008(파묵칼레. 따뜻한 온천수 속에 발을 담가 여행의 피로를 풀어보자.)

약 두 시간의 트레킹을 마치면 바로 욜류데니즈의 해변에 도착한다. 트레킹을 하면서 쌓인 땀들을 씻어 내기에 이 해변의 해수욕은 보너스. 게다가 머리 위에서는 세계 3대 패러글라이딩 장소의 명성에 걸맞게 2700m 가량의 높이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들을 보며 해수욕을 하노라면, 내 마음도 몸도 절로 두근거린다.
아침이면 더욱 빛나는 욜루데니즈 블루라군 바라보며 바람과 함께 생활의 스트레스도 함께 날려보는 것도 재미있는 추억이 된다.

↑ 0015(히에나 폴리스. 파묵칼레 뒤편에는 아름다운 그리스 신화 속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다.)



터키 이스탄불 이스티크랄 거리에 있는 어시장 '치체크 파스즈'의 노천 레스토랑. 일요일 밤 11시쯤인데도 빈 테이블이 거의 없다. / 변희원 기자
해외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과 문화, 음식을 만나는 것이다. 이런 이국 정서를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이미 널리 알려진 도심이나 유명관광지가 아니라, 여행가이드북에도 잘 나와 있지 않고 여행사의 패키지 여행코스에도 들어가지 않는 낯선 골목인 경우가 많다. 런던이스탄불 거리에서 숨겨진 보석을 발견했다.

시끌벅적 소리를 따라가면… 밤문화 정수를 볼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 제라르 드 네르발은 터키 이스탄불에 갔다가 옷가게, 보석가게, 사탕가게부터 카페와 호텔, 대사관이 즐비한 베이올루의 이스티크랄거리를 보고 "파리의 거리와 닮았다"고 했다. 그의 수사는 지금도 유효하다. 서울로 치자면 이스티크랄거리는 명동거리와도 같은 곳이다.

버거킹과 스타벅스 따위가 즐비한 이스티크랄거리는 화장 한 꺼풀을 벗겨야 비로소 광채가 나는 민낯이 나온다. 그리고 이 민낯은 밤에 가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해가 질 무렵, 탁심광장을 등지고 서서 이스티크랄 거리를 걸을 때 대로변은 그냥 지나쳐도 된다. 대신 고개를 계속 좌우로 돌려가며 탁자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골목들은 샅샅이 살펴야 한다. 골목마다 노천카페나 식당을 차려놔서 마음에 드는 곳을 못 찾을 리는 없다. 조금 수상쩍고 위험해 보이더라도 음식 냄새나 음악소리가 나면 따라 들어가는 게 좋다.

이스티크랄거리 가운데쯤 있는 어(魚)시장 '치체크 파스즈'에 먼저 들어섰다. 인내심을 갖고 비린내가 나는 이 골목을 끝까지 들어가니 노천과 옥상을 개방한 식당과 술집들이 보였다. 이곳에선 가게마다 전통음악 연주자들이 탁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음악을 연주한다.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한 노인이 음악 소리에 따라 노래를 시작하자 그의 뒷자리에 앉은 청년이 따라 불렀다. 한 곡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손님 대부분이 노래를 같이 부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던 셀레비는 "터키에선 젊은 사람들도 전통음악을 즐긴다"고 했다.

치체크 파스즈를 나와서 탁심 광장을 등지고 계속 걷다 보면 이스티크랄거리의 끝에 다다른다.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려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는 골목으로 들어가면 이스탄불 밤문화의 정수(精髓)를 볼 수 있다. 거미줄처럼 엮인 작은 골목 안에 메이하네(Meyhane·술과 밥을 함께 파는 식당)와 노천 식당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오후 대여섯시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해 오후 8시부터 12시까지는 앉을 자리도 찾기가 힘들다. 6명 이상의 단체 손님들이 많았고, 이들은 '터키의 소주'라고 불릴 만한 라크나 맥주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다. 흥겨워도 퇴폐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이곳치고는 분위기도 얌전하고 전통음식으로 유명한 '소피얄리9'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넓은 쟁반에 십여 가지의 음식을 담아서 내왔다. 지중해식 전채인 '메제'다. 이 중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서 먹으면 된다. 무엇을 먹을지 모르겠다면 일단 치즈나 가지가 들어 있는 것을 고르면 '안전하다'고 한다. 메뉴에는 없지만 말린 고등어를 절인 것도 내오는데 생선살이 탄탄하면서 짜지 않고 참나무향이 났다. 메제의 기원에 관한 여러 설(說) 가운데는 술탄이 먹는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부하가 먼저 음식을 맛보는 데서 비롯됐다는 얘기도 있다.

두세 개의 전채를 골라 먹고 나자 주요리로 시킨 치킨 케밥이 나왔다. 이스티크랄거리를 헤매던 길고양이 한두 마리가 벌써 발치에 와있었다. 불쌍하다고, 귀엽다고, 음식을 함부로 주면 안 된다. 케밥의 고기 한 점 떼줬다가 이 동네 고양이들이 다 몰려드는 바람에 꽤나 고생했다.

오스만 문명·건축가 시난·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돔……………… 터키의 황금시대로 떠나본 시간여행

이미지 크게보기
셀리미예 1574년. 터키에서 단 하나의 완벽한 돔을 가진 모스크를 꼽으라면 이곳, 셀리미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보듬어 안는 직경 31.22m의 거대한 돔. 하늘을 찌를 듯 솟은 4개의 첨탑. 밤의 셀리미예는 아름다워 성스럽다.

동양과 서양의 다리, 비잔틴 문명과 오스만 문명의 심장. 오랫동안 터키 이스탄불을 수식할 때 사용되어 온 비유들이다. 1700년 전 짓기 시작한 하기아 소피아(360년), 보스포루스 해협을 내려다보는 톱카프 궁전(1453년), 그리고 내부를 파란 타일로 가득 채운 블루모스크(1609년)….

이스탄불을 처음 찾는 사람이라면 필견(必見)의 유적으로 꼽히지만, 동시에 지치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세일 기간 백화점을 방불케 하는 번잡함, 맥락과 계통 없이 섞인 건축까지.

터키를 조금 더 미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경험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말하자면 이 글은 '터키여행 심화학습'에 해당한다. 키워드는 세 가지. 오스만 문명과 미마르 시난,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돔(Dome).

이미지 크게보기
(왼쪽사진부터) 미흐리마 1570년. 술레이만 대제의 외동딸 이름을 딴 모스크. 돔의 3층 창문이 특징. / 뤼스템 파샤 1562년. 미흐리마 공주 남편, 총리의 이름을 딴 모스크. 화려한 내부 장식을 자랑한다. / 쉴레이마니예 1558년. 술레이만 대제의 모스크. 이스탄불 최대 규모다.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이 이스탄불로 바뀐 것은 1453년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승리. 16세기에 이르러 술레이만 대제 휘하의 오스만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의 아름다움이 정점에 이른 것도 그때였다. 미마르 시난(1489? ~1588)이 활약했던 시기도 그때다. 터키어로 건축가라는 뜻의 미마르는 시난에게 이르러 고유명사가 됐다. 서양에서는 '오스만의 미켈란젤로'로 불리지만, 정작 이 땅에는 코웃음이다. 모스크부터 수로교(水路橋), 하맘(터키 목욕탕), 미드라사(신학교), 투르베(사당) 등 400여 건축물을 지은 그를 어찌 성베드로 성당 돔 하나 지은 건축가와 비교하느냐는 것.

예술가로서 그의 욕망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단 하나의 돔을 완성하는 것. 많은 종교전통에서도 그러하듯, 원이나 구(球)는 하늘이며 신(神)의 상징이다. 인간의 사랑과 신의 사랑, 세속의 권력과 예술적 욕망이 '돔'에서 교차하던 16세기의 오스만. 이 글은 터키의 황금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사랑을 찾아… 미흐리마 공주

사랑을 찾아… 미흐리마 공주
내 이름은 미흐리마(1522~1578).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를 지배한 영웅, 술레이만 대제의 외동딸이죠. 내 아름다운 모스크를 봐요. 아버지는 나를 위해 이 모스크를 지었어요. 내 이름을 딴 미흐리마 자미(1570).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터키어로는 '자미'라고 부른답니다.

내 남동생 셀림 2세가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죠. 하지만 동생은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질투했어요. 자기 모스크에는 4개의 첨탑(미나레트)을 하늘로 세워 올렸지만, 내게는 단 하나의 첨탑만을 허락했죠. 모스크는 신을 위한 사원이지만, 첨탑은 결국 인간의 욕망. 부질없지만 첨탑이 몇 개 있느냐가 바로 권세(權勢)랍니다. 셀림은 물론 그런 말을 인정한 적이 없죠. 하지만 난 알아요.

시난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내 모스크를 지어 준 사람. 그는 최고였어요. 인간의 권력은 당대로 끝나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죠. 시난은 3대에 걸쳐 궁정 건축가였어요. 아버지 술레이만, 남동생 셀림 2세, 그리고 그다음 차례였던 무라트 3세까지.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아버지는 내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죠. 내 배필은 예술가가 아니라 전사(戰士)여야 한다면서요. 아버지는 뤼스템 파샤와의 결혼을 강요했죠. 저 멀리 발칸의 크로아티아를 정복한 뒤 데리고 돌아왔던 사내. 그는 야망의 사내였죠. 그래서 더욱 아버지 팔 안에 묶어두고 싶었는지도. 하지만 나는 그가 싫었어요. 세상에 그렇게 못생긴 사내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는.

시난은 말없이 내 모스크를 지었어요. 다른 사내와 결혼한 자신의 사랑을 보는 기분이 어땠을까요.

이미지 크게보기
①에디르네의 밤을 밝히는 셀리미예 모스크. ②직경 31.22m, 높이 43.28m의 셀리미예 돔. ③특유의 기하학적 문양을 지닌 터키 도자기. ④터키 특산 디저트로 이름난 로쿰. 당도가 전 세계 으뜸을 다툰다.
시난은 묵묵히 기둥을 세우고 돔을 올렸죠. 첨탑은 명령대로 한 개만. 내 돔의 지름은 20.25m, 높이는 37m에 달해요. 작지 않죠. 하지만 더 큰 최고의 돔을 짓기에는 아직이었나봐요. 사원 내부에 걸리적거리는 네 개의 거대한 기둥을 세워야 했고, 주변의 하프 돔(half dome), 쿼터 돔(quarter dome)이 건축학적으로 이 중앙의 중심 돔을 지탱해야 했거든요. 하지만 시난은 나를 위해 특유의 3층 창문을 돔의 둘레에 만들어줬어요. 돔에만 24개, 전체 다 합치면 모두 76개의 창문이죠.

내 사원 옆의 성벽이 보이나요. 미흐리마 자미는 16세기 이스탄불의 경계이자 표지였어요. 특히 유럽의 이방인들이 우리 제국의 국경을 넘을 때, 처음 만나는 모스크였죠. 이스탄불에는 모두 7개의 유명한 언덕이 있어요. 그중 7번째 언덕에 내 자미가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보고 경탄해야 했기 때문에, 내 모스크는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웠죠. 하지만 그런들 무슨 의미가 있나요. 좋아하는 남자와 살 수 없었던 여자에 불과한 것을.

악마의 총리… 뤼스템 파샤

악마의 총리… 뤼스템 파샤
내 이름은 뤼스템 파샤(1500~1561). 파샤는 터키어로 장군이란 뜻이오. 원래부터 내가 파샤였던 것은 아니라오. 나는 원래 크로아티아 출신. 술레이만 대제가 우리 땅을 식민지로 만들었을 때, 나는 어린 소년이었소. 황제는 나를 이스탄불로 끌고 갔소. 그가 제국을 운영하는 방식이었지. 식민지를 건설하고, 식민지의 아들들은 황제의 나라로 끌려가고. 물론 인정할 건 인정하겠소. 대제는 공정했고, 식민지의 아들이라도 야망과 재능을 동시에 갖추었다면, 마음먹고 키워줬으니까. 나는 총리대신까지 올랐고,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총리를 했지.

나를 ‘악마의 총리대신’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오. 시인들이 특히 나를 그렇게 불렀다지. 내게는 야망이 있었다오. 서방의 끝에서 볼모로 끌려온 처지라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니겠소.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 법. 나는 내 권력을 즐겼다오.

꺼림칙하지만 이 말도 해야겠소. 내가 나병 환자라는 소문 말이오. 미흐리마 공주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못난 자들의 비열한 수작이었지.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시오? 모두가 듣도록 큰 소리로 의사를 불렀지. 그리고는 홀딱 벗고 이가 버글거리는 내 몸을 보여줬소. 의사가 깜짝 놀래더군. 이렇게 이 많은 남자는 처음 본다며. 당신도 알겠지만, 나병 환자는 이가 없소. 그 무섭고 독한 나병은 이까지 다 죽인다고 알려져 있는 시절이었지. 의사가 오기 전에 내가 이를 내 몸에 투척했는지는 말하지 않겠소.

시난과 미흐리마의 사랑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소. 그는 예술적 재능은 좀 있는지 모르지만, 그건 사내의 야망은 아니지. 남자라면 모름지기 전장에서 적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 아니겠소.

내 자미(1562) 역시 시난이 지었소. 연적(戀敵)의 모스크를 지어야 했던 사내의 마음은 알고 싶지 않소. 단지 그렇게 요구했지. 신의 사원이 아니라 속세의 사원을 지으라고. 화려하게. 더 화려하게. 내 모스크 내부에 장식과 문양의 타일이 이리도 많은 이유요. 이즈니크 타일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소. 오스만 제국 최고 품질의 도자기이자, 파랑·빨강·초록을 정교하게 결합한 타일이지. 나는 이즈니크 지역 군주에게 명령했소. 만들 수 있는 모든 타일을 다 가져오라고. 뤼스템 파샤 자미의 돔이 이렇게 작은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소. 높이는 22.80m, 지름은 15.20m.

내가 죽었을 때, 나는 1700명의 노예, 2900마리의 말, 1106마리의 낙타를 유산으로 남겼소. 남는 건 마음이 아니라 물질이고 재산이오. 내 신념을 아는 걸까. 이 땅의 모스크로는 거의 유일하게, 뤼스템 파샤 모스크의 1층은 지금 시장과 상점으로 들어차 있지. 하늘에서 내려다보더라도 뿌듯하오.

오스만의 영웅… 술레이만 大帝

오스만의 영웅… 술레이만 大帝
서양사람들은 내 이름 앞에 The Magnificent를 붙이지. 그냥 황제가 아니라 대제(大帝). 내 이름은 술레이만(1494~1566). 전성기 내 영토가 어디까지 뻗었는지 알려주리다. 흑해 일대 유럽과 발칸 전체,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역, 아랍 전역, 그리고 동쪽으로는 아나톨리아의 러시아까지. 내가 한번 마음먹고 군대를 보내면 유럽 전체가 발칵 뒤집혔지. 내 재임기간, 오스만의 영토는 지구의 절반이었소. 우리 군대는 최고였지.

같은 시절 프랑스 국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에게 난 이런 편지를 보냈다오. “나는 술탄들의 술탄이자 군왕들의 군왕. 짐은 지상의 군주들에게 왕관을 나누어주는 자이자, 이 땅 위 신의 그림자이니, 짐의 고귀한 조상들과 저명한 선조들이 무력으로써 정복하고 존엄한 황제인 짐 또한 불꽃 같은 양날검과 승리의 군도로 정복한 백해와 흑해, 루멜리아와 아나톨리아, 카라마니아, 로마 지역, 둘카디르, 디야르바키르, 쿠르디스탄, 아제르바이젠, 페르시아, 다마스쿠스, 알레포, 카이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아랍 전 지역, 예멘 등지를 관장하는 술탄이며 황제이다.”

1299년 튀르크를 이어받아 건국한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 무슬림에게 10은 완벽의 숫자라오. 알고 있겠지만, 술레이만은 동방에서 가장 추앙받던 왕 솔로몬의 터키식 발음이라오. 신이 다윗에게 그랬던 것처럼, 솔로몬에게도 학식과 영감을 주셨지.

이미지 크게보기
①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보스포루스 해협. ②모스크에 들어가려면 손과 발을 씻어야 한다. ③푸른색 타일이 화려한 뤼스템 파샤 모스크의 내부. ④ 에디르네의 자랑인 오일 레슬링.
나는 평생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뒀소. 첫째가 젊어서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가슴이 미어졌지. 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소. 나는 그냥 황제도 아니고 대제니까. 어찌 필부처럼 마음을 드러내겠소. 그 대신 딸에게는 잘해주고 싶었지. 그 녀석의 이름을 딴 자미를 짓게 한 것도 그래서였소.

사위와 딸의 자미를 완성한 뒤, 내 모스크를 지었지. 그게 바로 쉴레이마니예 자미(1558)라오. 높이 53m, 지름 27.5m의 폭포 모양 돔, 그리고 뾰족한 얇은 첨탑. 역시 시난에게 지시했소. 이 모스크의 발코니는 모두 10개요. 내가 10대 술탄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모스크 옆에는 네 개의 메드레세와 의과대학, 말과 낙타, 그리고 마부의 숙소, 하맘, 숙소 등도 함께 짓게 했소. 이스탄불에서는 가장 크다오. 나는 대제니까.

예술을 찾아… 건축가 시난

예술을 찾아… 건축가 시난
내 이름은 시난. 미흐리마 공주와 뤼스템 파샤를 위해,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 술레이만 대제의 자미를 지은 자요. 술레이만 대제의 아들 셀림 2세를 위한 모스크를 건설한 자이기도 하지. 고백하겠소. 나는 셀림 2세가 아니라 나를 위해 이 모스크를 지었소. 내 평생의 사랑은 미흐리마였지만, 내 필생의 자랑은 셀리미예 모스크라오.

에디르네였소. 내가 셀리미예 모스크(1574)를 지은 땅은. 새로운 황제는 이스탄불보다 에디르네를 사랑했소. 이스탄불에는 더 이상 모스크를 지을 만한 땅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였소. 나는 깨달았소. 모스크와 함께 평생을 함께했던 내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이제는 좀 욕심을 부려도 그분께서 허락해주실 것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단 하나뿐인 돔. 이 안에 들어오는 모두를 차별하지 않고 감싸 안을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돔. 그러면서도 볼썽사나운 기둥을 가운데 쓰지 않고, 그 자체의 균형과 비례를 갖춘 돔. 내 평생의 꿈. 나는 감히 말하겠소. 셀리미예 모스크에서 그 꿈은 실현됐다고. 걸작(masterpiece)이오.

돔의 지름은 31.22m, 높이는 43.28m. 가장 큰 직경의 돔이오. 나는 셀리미예가 자랑스럽소. 8개의 기둥이 있지만, 잘 보이지 않을 거요. 내부가 아니라 외부 벽면 쪽으로 최대한 물러서게 지었으니까. 이스탄불은 지진이 많은 곳이라오. 거의 모든 모스크가 한 번씩은 무너져서 후세가 다시 지어야 했지만, 셀리미예 돔은 지금까지 무너진 적이 없소.

내가 말했나요. 돔은 하늘을, 신을 상징한다고. 이 돔 아래에서, 우리는 하나요. 황제 술레이만도, 농부도, 장사꾼도, 황제의 아들도, 남자도 여자도. 비록 내 사랑은 실패했지만, 나는 신에게, 그리고 예술에 떳떳하오. 터키에 오거든, 부디 내 분신을 잊지 마시길. 세상은 승리 만큼이나 아름다움도 소중하니까.

[그래픽] 터키의 황금시대로 떠나본 시간여행

이슬람사원 뜻하는 '모스크'… '퀼리에'는 사원·신학교 포함한 종합단지

터키는 모스크의 나라다. 자선(慈善)을 으뜸 가치로 삼았던 오스만의 왕족과 고위 관료들은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사원을 지었고, 신학교와 무료 식당도 함께 지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종교인 탓에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 많다.

모스크는 이슬람 사원, 퀼리에는 모스크와 부속 건물로 이뤄진 복합 단지다. 부속 건물은 이슬람 교육을 위한 신학교 메드레세, 정화(淨化)를 위한 세정 시설 사디르반, 수도자를 위한 숙소 탑하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식당 이마레트, 말과 마부를 위한 숙소 카라반사리, 죽은 사람을 모시는 투르베, 공중 목욕탕 하맘 등으로 구성된다. 자비를 베푼 자의 능력과 의지에 따라, 이들 중 일부만 짓는 경우도 많다.

'오스만의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미마르 시난은 평생 모스크만 80여 개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미흐르마 모스크나 뤼스템 파샤 모스크 시절만 해도 '과정'에 있었지만,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거쳐 셀리미예 모스크에 이르러 '완벽한 돔'을 실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모스크 안에는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가 태어난 메카 방향을 가리키는 벽감(壁龕)인 미흐랍이 있고, 사제인 이맘이 설교를 하는 계단인 민바르가 있으며, 모스크 밖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첨탑 미나레트가 있다. 마이크나 스피커 등이 없던 시절, 사람이 직접 올라 큰 목소리로 기도 시간을 알렸던 장소다.

■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는 이스탄불. 이번 건축 기행에 등장하는 미흐리마·뤼스템 파샤·쉴레이마니예 모스크는 모두 유럽 지구에 있다. 신시가지가 아니라 구시가지 쪽이다. 뤼스템 파샤와 쉴레이마니예는 서로 걸어서 5분 거리. 미흐리마 모스크는 여기서 차로 15분 거리다.

시난 건축의 최고봉인 셀리미예 모스크는 이스탄불에서 유럽 방향으로 240㎞ 떨어져 있다. 출퇴근 시간을 피할 것. 안 막히면 2시간 30분 거리지만, 이스탄불 외곽은 교통 체증으로 악명 높다. 에디르네시(市)는 불가리아 국경과 불과 12㎞. 당시 오스만 제국 제2의 수도이자, 발칸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 이스탄불의 식당으로는 3곳을 추천한다. 우선 호텔 아카디아블루 9층의 ‘파인 다인 이스탄불’. 전망이 최고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푸른 바다와 소피아대성당, 블루모스크가 통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온다.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을 전면에 내세울 만큼 멋진 정찬(正餐)인데도, 맥주 8터키리라, 메인 요리 역시 40터키리라 안팎이다. 1터키리라≒400원. finedineistanbul.com +90 0212 516 96 96.

다음은 명소 갈라타 다리 앞의 ‘함디(Hamdi) 레스토랑’. 유럽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갈라타 다리 앞에 위치한, 역시 전망 좋은 식당이다. 양, 소고기, 닭고기 등을 꼬챙이에 꿴 케밥이 훌륭하다. 메인 요리는 35터키리라 수준. hamdi.com.tr +90 212 528 0390

에디르네에서는 툰자 강을 내려다보는 수변 식당 랄레자르 레스토랑을 소개한다. 강물을 내려다보며 야외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고, 가격대 역시 합리적이다. 특산 요리는 간 튀김. 30터키리라 수준. lalezaredirne.com +90 284 223 0600.

■ 유적을 제외하면 전 세계 대도시와 동기화(同期化)된 이스탄불과 달리, 에디르네는 아직 시간의 흐름이 거꾸로 가는 곳이 많다. ㎡당 역사 문화유산 비율이 터키 1위, 전 세계 2위. 에디르네 시청 건물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핑크빛 건물을 그대로 빼닮았고, 새로 복원한 유대인 예배당 시나고그도 매혹적이다.

■ 터키 항공(turkishairlines.com)은 인천-이스탄불을 주 11회 운항한다. 1800-8400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