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럽/그리스

그리스 : 삶이 목을 조일 때 하루키처럼 모험을…

반응형

무작정 '북소리'를 따라 3년간 유럽 여행한 무라카미 하루키… 낯선 도시와 사람들을 만나다
극장을 떠도는 고양이 한 마리… 그리스인에겐 아무것도 아냐
이탈리아 사람과 일처리할 땐 아부성 선물은 효과 만점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하루키가 내 나이일 때, 그는 원고 청탁과 원고 더미에 압사 직전이었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내던 그가 이렇게 정신없이 나이를 먹다가 이렇게 정신없이 죽겠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 저지른 일은 바로 한 번도 배우지 않은 그리스어 학원에 다니는 것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전혀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작가에겐 어떤 모험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귓속을 둥둥둥 울리던 그 북소리를 따라 이후 3년간 유럽을 떠돈다. 그리고 3년의 기간 동안 장편 '노르웨이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쓰고, 꽤 많은 분량의 책들을 번역하며, 그리고 바로 이 책, 내가 본 어떤 여행기보다도 재미있고 유쾌한 '먼 북소리'를 쓴다.

지금은 체류기 형식의 여행서가 꽤 많이 나오고 있지만, 이 책이 나올 당시에만 해도 낯선 도시의 사람들과 꽤 오랜 시간 관계를 맺는 방식의 책이 많지 않았다. '먼 북소리'는 그가 머물던 그리스의 작은 섬들, 가령 '스펫체스' 섬과 같은 군도들과 로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런 식이다.

이탈리아 Italia_무라카미 하루키는 이탈리아 로마에 체류하며 느낀 이탈리아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글로 풀어냈다. 사진은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콜로세움’의 모습. / 이탈리아관광청 제공
그리스에서 사는 동안 하루키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그렇게 해서 그리스 이탈리아식의 장단점을 모조리 열거해 놓을 수 있었다), 그는 극장에 가고(그리스 극장의 슬랩스틱극 같은 소동을 그릴 수 있었다. 극장에서 고양이 한 마리쯤 어슬렁거리는 건 그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말'이나 '당나귀'도 아닌데 뭘 그리 요란을 피우남!), 자신이 사는 섬 주위를 매일 아침 조깅한다.(그리스 사람들은 도대체 왜 아침부터 길바닥을 뛰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심지어 뛰고 있는 하루키에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왜 뛰는 거요, 젊은이? 무슨 일 있소?)

그는 로마에도 잠시 체류하며 우편물을 붙이고(이탈리아의 우편체계가 얼마나 엉망인지도 그는 진술한다), 필요한 서류들을 위해 전화를 걸고 (이탈리아 전화는 통화 도중 끊기거나, 소리가 마구잡이로 바뀐다. 어떤 날은 크게, 어떤 날은 작게!), 텔레비전을 본다.(화재 진압을 하다가 카메라가 자기를 바라보자 반사적으로 카메라 보며 씨익 웃는 이탈리아 소방대원을 상상하시길.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다!)

작가인 그가 텔레비전을 통해 본 기이한 것은 물론 또 하나 있었다. 이탈리아 방송은 여유 시간이 남았을 때는 그냥 시계만 무작정 비춘다는 것이다.(한국이라면 '동물의 왕국' 편집본이라도 틀어주지 않을까? 정말 터프한 나라다!) 또한 이탈리아에선 뭔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선 아부성 선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 '아부성 선물'의 효과는 너무나 요란하게 즉각적이라, 그는 이런 모습이 이탈리아 사람들의 '귀여움'을 대변한다고 얘기한다.

조금 딴소리 같긴 하지만(어차피 삼천포는 내 특기이기도 하니까),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은 '발칙한 유럽여행'에서 "암스테르담에서는 차를 운하 주변에 아무렇게나 버려두는데, 물에 굴러 떨어지기 직전인 차들도 종종 눈에 띈다"라고 표현한다. 그는 독일이나 스위스 사람들의 정리강박증에 비해 네덜란드 사람들의 이런 칠칠치 못함이 자신의 마음에 아주 쏙 든다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언젠가 소설가 K와 터키여행 이야길 하다가, 터키인들의 진정한 귀여움은 눈에 보이는 그 빤한 거짓말에서 나온다는 얘길 한 적이 있는데 모름지기 재밌는 여행기를 쓰는 작가들의 특징은 바로 '귀여움'을 보는 능력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시 '먼 북소리' 얘기로 돌아가면 유럽을 여행하면서 하루키는 무수히 많은 북유럽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는데, 노르웨이 덴마크 사람들에 대한 그의 인상 역시 아주 재밌다. "이 사람들(대개 북유럽)은 햇빛에 관해서는 매우 진지하다. 마치 태양 전지식 전기면도기가 한곳에 모여 충전을 겸한 신앙 고백 집회라도 열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맙소사! 이 부분을 읽으며 얼마나 웃었던지. 그 이후, 배터리 충전하듯 옹기종기 모여 햇빛을 쐬고 있는 유럽 사람들을 보면 어김없이 하루키의 이 문장이 떠오르곤 했다.

때때로 삶이 고루하다고 느껴질 때, '먼 북소리'를 반복해서 읽는다. 원고 더미에 치여 머리가 폭발하기 직전인 날쯤이라고 해두자. 제일 먼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 '고등학교 지리부도'를 열어놓고 지도들을 본다. 그리고 어디로든 떠나는 상상을 한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도 좋고, 프랑스의 악상 프로방스 지역도 좋고,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섬들을 돌아보는 여행도 좋겠다. 하지만 며칠 전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다가 내가 들었던 가장 기이한 여행기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광주에 가려던 한 할머니 한 분이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고속버스에 올라탔다. 그런데 실컷 잠을 자고 난 후, 눈을 떠보니 대구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리둥절했던 할머니가 맞이하게 된 진실은 이러한 것이었다. 대구 버스 기사가 광주 버스를 대구 버스로 착각하고, 그 버스를 타고 대구까지 돌진해 온 것이었다! 기사는 '현철과 벌떼들'의 노래를 아주 구성지게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럼 대구 버스 기사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먼 북소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게다가 버스나 전철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젊은이들로 언제나 만원이다. 이 패거리들은 예의도 없거니와 행동도 난폭하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로마의 버스는 가끔 길을 잘못 들어서기도 한다!"

한국에선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니 제아무리 정확한 일본이라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10시에 자고 5시에 일어나는 하루키가 (마라톤을 즐겨 하는 하루키는 100살쯤 살 것 같다) 이 상태로 계속 글을 쓰게 된다면, 이런 운전기사를 만날 가능성은 더더욱 커진다.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늘 예상과는 다른 도착지로 유유히 흐른다.

먼 북소리―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리뷰가 재밌어서 그대로 옮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상실의 시대'에서 장면마다 왜 그렇게 비가 많이 내렸는지, 또 '댄스 댄스 댄스'에서 '나'는 왜 하와이를 찾아 떠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깃털'에 나오는 반은 야생화된 공작은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 있는 야생공작이 그 근원이었음을 알게 된다. 한마디로 재밌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