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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빙기의 항구 - 여행의 발견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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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탐험대원과 열여섯 마리의 썰매개들이 북극권의 빙원을 행군하고 있을 시각, 나는 일루리사트의 항구를 걷고 있었다. 주로 새우나 넙치를 잡으며 살아가는 일루리사트 사람들은 이 항구에서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정보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5월의 일루리사트 항구. 얼음에 묶인 배들이 여름을 기다리고 있다.

얼음대륙의 섬마을

항구는 배가 드나드는 곳이고 배는 물이 있어야 뜰 수 있지만, 그린란드의 5월 말 아직도 꽁꽁 언 일루리사트 항구는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멈춰’있었다. 얼어붙은 부둣가의 빙판 위에는 고기잡이배들이 얼음에 반쯤 먹힌 채 여기저기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빙판과 바다가 만나는 접경에 이르러서야 몇몇 배들이 조심스럽게 얼음을 헤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좀 있으면 요란해질 게야.” 오래 전부터 일루리사트에서 제일 큰 어구상을 운영해오고 있는 니콜라이 할아버지가 항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구상에는 그물이며 로프, 옷, 장화, 장갑 낚싯대…… 없는 게 없다. 여기서 나는 처음으로 물건 값을 깎아보고 덤으로 장갑을 받기까지 했다. 그동안 탐험대의 물품을 준비하느라 이 어구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었던 곰 같은 ‘한국 이누이트’를 귀엽게 봐주신 모양이다. 니콜라이는 다시 턱짓으로 항구를 가리키며 환갑이란 나이답지 않게 ‘예쁜’ 영어로 말했다.

“일루리사트는 항구 때문에 숨을 쉴 수 있지. 갈수록 항구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

겨울잠을 자던 배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고 있다.

항구가 중요한 까닭은 그린란드의 다른 도시들처럼 일루리사트도 사실상 ‘섬’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오랜 옛날 이누이트들은 물을 구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배를 띄울 수 있는 곳을 찾아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을들 대부분이 해안을 따라 형성된 탓에 바다 쪽은 빙산에 둘러막히고 내륙 쪽은 만년 빙하로 뒤덮여 있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도로라고는 애초부터 생겨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서 개썰매는 더없이 유용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륙빙하가 녹아내리면서 개썰매 운행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반면에 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그만큼 항구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이다.


“항구가 지금은 저렇게 얼어있지만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되면 영 딴판으로 바뀔 걸세.” 니콜라이의 말은 6월이 되어서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겨울잠을 끝낸 항구

5월, 얼음이 녹기 전의 항구 풍경

6월, 얼음이 녹은 후의 항구 풍경

6월, 생애 처음으로 북극에서 맞는 여름이다. 일루리사트의 여름은 요란한 크레인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이른 아침부터 옆집에 커다란 크레인 트럭이 나타나 우르릉거리며 배를 실어 올리는 것이었다. .

“뭐 하는 거죠?” 나는 큰소리로 주인에게 물었다.


“바다에 배를 띄워야죠. 여름이니까.” 그러는 사이 배를 다 실은 크레인 트럭은 눈 녹은 길을 달려 항구 쪽으로 사라졌다.

그린란드에서는 배들도 겨울잠을 잔다. 겨울이 되어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크레인 트럭을 불러 바다에 떠있던 배들을 육지로 끌어올린다. 그때부터 배들은 눈 속에 파묻힌 채 긴 휴식에 들어간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다시 크레인 트럭이 내륙과 항구를 분주히 오가며 배들을 하나둘씩 바다에 띄운다. 배를 한 번 싣고 내리는 데는 300~500크로네(6~10만원)정도라는데 일루리사트를 통틀어 크레인 트럭은 딱 3대밖에 없다. 그래서 크레인 기사들은 여름과 겨울이 겹치는 시기, 즉 얼음이 녹고 다시 어는 6월과 11월이 대목인 셈이다. 나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여름을 맞은 항구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마침 1박 2일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부를 만났다. 함께 배로 가봤더니 북극넙치가 한 가득이다. 생긴 게 광어는 광언데 엄청 크다. 이 녀석을 잡으려면 도마가 아니라 회의용 테이블이 필요할 것 같다. 얼씨구나, 나는 두 마리를 골랐다. 횟감으로 쓰려고 내장을 다 빼냈는데도 여전히 살아서 팔딱거린다. 남아있는 썰매개들에게도 만찬을 베풀고 싶어 열 마리를 더 골랐더니 전체 무게가 20kg를 넘는다.

“다 얼마죠?”

어부는 이런 경우가 처음인지 아주 난감해 한다. 그러더니 턱짓으로 ‘그쪽이 먼저 값을 말해보시구려.’한다. 표정이 여간 순박한 게 아니다. 내가 괜찮다고, 그냥 값을 말하시라고 몸짓으로 말했더니 약간 미안한 듯 280크로네라고 한다. 우리 돈으로 5만 6천원쯤이다. 정말 싸다! 얼른 300크로네를 주고 큰 넙치 한 마리를 더 얹어달라고 하자 그저 웃으며 그러라고 한다. 자연산 대형 광어 20kg을 6만원 돈으로 사다니, 대박이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일루리사트의 항구는 매일 매일 떨어져 내리는 빙산으로 인해 시시각각 풍경이 변하고 있지만, 어부들의 인정은 웬만해선 안 변하는 것 같다. (넙치 값도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

조심스럽게 첫 조업에 나선 넙치잡이 어부

갓 잡아 올린 북극넙치

계절이 바뀌자 니콜라이의 말처럼 항구는 펄펄 살아나기 시작했다. 넙치잡이의 계절답게 항구는 조업 준비를 하는 어부들로 활기가 넘쳤다. 니콜라이 할아버지가 옆에서 미소를 띠며 ‘거봐’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음이 예전만큼 많이 얼지 않는 게 오히려 어부들한테는 더 낫겠네요. 저렇게 배를 띄울 수 있으니까요.” “겉보기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배에서 잡은 고기는 너무 잘아.”

원래는 개썰매를 타고 피오르드로 가서 얼음낚시로 잡는 것이 전통적인 넙치잡이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잡은 넙치는 연안에서 잡는 것보다 크기도 훨씬 컸다고 한다. (어른 허리까지 오는 것들도 꽤 됐단다.)

“헌데 이젠 얼음이 녹아서 갈 수가 없다네. 아무래도 그때가 좋았어. 추워서 얼음이 꽁꽁 얼던 때가…….”

일루리사트의 어부들이 기온 상승을 달가워하지 않는 까닭은 또 있다. 빙산 때문이다. 여름은 얼음이 녹아 배들이 운항할 수 있는 계절이면서 동시에 빙산이 떼 지어 떠다니는 계절이기도 하다. 내륙에서 빙하가 빠르게 이동하면서 크고 작은 빙산들이 뚝뚝 떨어져 바다로 흩어지고, 바람에 떠밀린 빙산들이 병풍처럼 해안을 가로막으면 어부들은 고기잡이를 떠날 수 없게 된다. 그런 날이면 어부들은 항구에 모여앉아 푹푹 한숨을 쉬며 객쩍은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빙산의 바다를 뚫고 항구로 들어오는 정기화물선

빙하가 실어온 새로운 선물

그래도 여름은 여름이다. 항구가 깨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얼음이 녹은 바다 위에는 배들이 가득하고, 마치 낚시터의 좌대처럼 물 위에 떠있는 해상 주유소도 바빠진다. 겨울 동안 얼음에 묻혀 있던 부둣가의 여러 구조물들도 하나둘씩 제 모습을 되찾으면서 항구는 쿵쿵, 일루리사트의 심장 역할을 시작한다. 여름이 되면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는 헬기 운항도 대부분 중지된다. 누구나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비싼 항공기를 이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점심 무렵, 일루리사트의 항구로 작은 배 한 척이 들어오더니 한 가족이 내린다. 오카추트에서 오는 길이란다. 여기서 북쪽으로 3, 40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그동안 항구가 얼어서 오가지 못하다가 날이 풀리자마자 배를 띄워 쇼핑을 온 것이다. 잠시 후 커다란 정기여객선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리더니 마중 나온 사람들과 서로 끌어안고 흥겹게 인사를 나눈다. 2010년부터 누크와 일루리사트 사이를 오가는 정기 항로가 열리면서 항구는 더욱 분주해졌다고 한다. 겨울의 긴 휴식을 끝낸 정기여객선과 화물선들로 인해 일주일에 한 번씩 일루리사트의 항구는 떠들썩해진다.

겨우내 눈 속에 파묻혀 있던 배들을 다시 바다에 띄워 그리운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계절, 일루리사트의 항구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신이 난다. 조업을 준비하는 어부들, 이웃을 마중 나오거나 배웅하러 온 사람들, 아이들을 태우고 소풍가는 사람들, 묵은 쇼핑을 끝내고 우유며 화장지며 온갖 생필품을 가득 싣고 떠나는 사람들, 관광객들을 태우고 빙산 투어를 떠나는 유람선들……,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꽁꽁 얼어있던 일루리사트의 항구는 기온이 상승해가면서 그 역할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개썰매와 고기잡이배들이 출발하던 항구였지만 이제 개썰매는 사라지고 관광객들을 실은 여객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여름철 내륙빙하에서 떨어져 내리는 빙산의 양 만큼 관광객들의 숫자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날은 대형 크루즈 유람선에서 일루리사트 전체 인구수 5천 명보다 더 많은 관광객들이 내려 마을을 점령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외지인들을 맞는 주민들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유람선과 고기잡이배가 함께 떠있는 일루리사트 바다

오랫동안 섬의 운명으로 살아온 일루리사트, 단지 원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서식처였던 이곳이 자연의 변화와 더불어 이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호수처럼 잔잔한 백야의 바다와 신비로운 모양의 빙산들, 그리고 강인한 그린란드 썰매개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 머지않아 일루리사트는 북극의 관광대국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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