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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바그다드 - 계속되는 천일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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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프의 잃어버린 박물관

티그리스강이 휘감은 이 도시는 4대 고대 문명 중에서도 가장 큰 영광을 빛낸 메소포타미아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바그다드가 서기 762년 아바스 왕조의 수도가 되고나서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가 된 칼리프는 인도와 중국에까지 손을 뻗었고, 수도 바그다드는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사람과 문화가 풍성히 교류하는 거대한 시장이 되었다. 영광은 1258년 몽골의 침략에 의해 이집트로 왕조를 옮겨가기까지 이어졌다.

1926년 영국의 여행가 거트루드 벨(Gertrude Bell)이 건립한 바그다드 고고학 박물관은 후에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Iraq)으로 발전해 이 지역의 문명을 자랑하는 장소가 되었다. 바빌론, 수메르, 아시리아 등 메소포타미아 지역 문명의 가장 중요한 유산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고 양측의 교전 도중 박물관 안의 소장품들은 참담하게 약탈당했다. 수메르의 여신 이난나를 새긴 고대 화병, 아카디아의 우루크 청동상 등 5천 년 전의 고대 유산들을 비롯해 박물관의 카달로그에 적힌 17만 점 대부분이 손실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후 유네스코, FBI 등의 전문 인력이 동원되어 상당수의 유물이 회복되었지만, 우리가 마음 편히 박물관 안을 거닐며 바그다드의 영광을 떠올리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알리 바바가 40인의 도적을 죽이는 법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밤마다 페르시아의 황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만약 바그다드를 빼놓으라고 했다면, 그녀의 목숨이 1001일 동안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천일야화]를 모으기 시작한 것은 원래 6세기 사산조의 페르시아 사람들이었지만, 8세기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당시 최대의 도시였던 바그다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 많이 첨가되었다.


모험왕 신밧드는 노년에 바그다드의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짐꾼 신밧드와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가 젊은 시절 겪은 7개의 대모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룬 알 라시드를 비롯한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이 여러 차례 [천일야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칼리프 앞에서 자신의 여섯 형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바그다드의 이발사'가 대표적이다.

수많은 이야기들 중 바그다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야화는 아마도 '알리 바바와 40인의 도적'인 것 같다. '알리 바바 광장' 혹은 '카라마나 광장'이라 불리는 곳에는 그 일화를 새긴 조각상이 있어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주인공이 '열려라 참깨' 해서 벼락부자가 된 알리 바바가 아니라 그의 충직한 하녀라는 사실. 광장에는 이곳 사람들이 카라마나(Kahramana)라고 부르는 총명한 하녀가 항아리에 든 도둑들에 끓는 기름을 붓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전쟁 이후 무법천지가 되어 도적 떼가 들끓는 바그다드. 시민들이 겪고 있는 고난의 가장 큰 원인이 땅 속의 기름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알리 바바는 바그다드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절의 풍요를 보여준다.

누구를 위한 승리의 손인가?

후세인이 만든 '승리의 손' 아래를 지나가는 미군 탱크.


2008년 <에스콰이어> 잡지 영어판은 '전체주의의 7대 불가사의'를 선정해서 소개했다. 중국의 모택동 동상, 북한의 노동당 창건 기념탑과 더불어 다분히 조롱 섞인 이 리스트에 들게 된 것은 바그다드의 '승리의 손(The Hands of Victory)'. 도로 양쪽에 있는 두 손이 거대한 칼을 서로 가로지르게 해서 들고 있는 모양으로, [호랑이와 눈] [그린 존] 등 21세기의 바그다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기념물이다. '승리의 손'의 공식 명칭은 '카디시야의 검(the Swords of Qādisiyyah)'으로 일종의 개선문이다. 사담 후세인이 이란-이라크 전쟁의 승리를 기념한다며 자우라 광장으로 통하는 도로에 건립했다. 전쟁에서 죽은 이라크 병사들의 총을 녹여 칼을 만들었고, 전장에서 뺏어낸 이란 병사들의 헬멧들로 그 아래를 장식해두고 있다. 칼을 쥔 손의 모델은 사담 후세인 자신으로, 완성 후 스스로 백마를 타고 그 아래를 행진해갔다고 한다. 백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고 얻어낸 승리란 과연 무엇일까?

티그리스 강변의 베르사유 - 그린 존

바그다드의 중심부, 티그리스 강변 서쪽에 있는 10평방킬로미터의 지역은 이라크 전쟁 이후 '그린 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미군이 이 도시를 점령한 이후에도 치안은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외곽의 '레드 존'에 비해 안전이 확보된 지역이라는 의미였다. 이라크 과도 정부 하에서의 공식 명칭은 '인터내셔널 존'으로 외국 공관과 호텔들이 밀집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과격파의 테러 목표가 되어 '그린 존 카페' 등에 수차례 폭탄 테러가 행해지기도 했다.


본(Bourne) 시리즈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맷 데이먼 주연으로 만든 영화 [그린 존]은 바로 이 지역의 실상을 고발한다. 미국이 전쟁 개시의 이유로 밝힌 '대량 살상 무기'의 존재 여부를 추적하는 영화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린 존 안에서 향락을 즐기고 있는 미국 행정부 관리와 고위층들의 달콤한 생활을 보여준다. 후세인이 사용했던 공화궁(Republican Palace) 앞의 수영장에서는 마이애미비치와 같은 화려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그린 존의 핵심인 공화궁의 모습.

호랑이와 눈과 병원

전쟁 중의 바그다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한다.

"눈 오는 날 호랑이를 만나면 사랑을 고백하세요." 로맨틱한 홍보 문구와는 달리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호랑이와 눈]은 포화가 빗발치는 참담한 바그다드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베니니가 사랑하는 여인이 부상을 당해 병원에 누워 있으나 전쟁 중에 외국 민간인에게 돌아올 의료 장비나 약품은 없다. 그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바보 같은 무모함으로 스킨 스쿠버 장비를 가져와 산소 호흡을 시키고, 우스꽝스럽게 사막을 건너 약품을 가져온다.


바그다드의 환자들이 언제나 최악의 상황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곳은 한때 아랍 최고, 그러니까 세계 최고의 의학 기술이 꽃피었던 곳이다. 칼리프 하룬 시대부터 무료 공공 병원이 운영되었고, 의료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서는 의사로 활동할 수 없는 등 엄격한 의료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다. 천 년 후 바그다드의 병원은 지옥의 입구가 되었다.

그 실제 상황이 어떤지는 미국 HBO채널이 2006년에 방영한 다큐멘터리 [바그다드 응급병동(Baghdad ER)]의 DVD가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피바디상을 받은 이 프로그램은 바그다드 그린 존 안에 있는 이븐 시나 병원(Ibn Sina Hospital)의 응급 현장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병원은 1960년대 사담 가족과 친지를 위한 병원으로 건설되었는데, 근처에 비밀경찰의 고문실이 있어 부상을 당한 정치범들을 이 병원에서 되살려내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계속 고문하기 위해서다. 2003년 이라크 공습 이후 부상당한 미군 병사들을 위한 시설로 사용되다가, 2009년 10월에 이라크 정부로 이양되었다.

바빌론의 강가에서 무너진 바벨탑을 떠올리다

'바이 더 리버스 오브 바빌론~'. 올드 팝의 팬이라면 보니 엠의 전설적인 히트곡 'Rivers Of Babylon'을 기억하는 분이 많으리라. 고향을 잃은 유대인들이 울음 섞인 노래를 부르게 한, 그 성스러운 강이 바로 바그다드 남쪽에 있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천상에 이르는 탑을 짓다가 스스로 몰락한 '바벨 탑'의 주인공, 기원전 6세기에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을 건설한 놀라운 과학의 도시, '바빌론'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고대 바빌론을 재발견하려는 계획은 19세기 초반부터 있어왔다. 당시의 도시 구조를 보여주는 석조 벽들이 복원되었고, 26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바빌론의 사자 상'도 발견되었다. 걸프 전 이후 사담 후세인은 이 유적 위에 수메르의 피라미드를 본 딴 현대적인 궁전을 건설할 계획을 진행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따 '사담 힐(Sadam Hill)'이라 부른 이 프로젝트는 실행 직전인 2003년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결국 상상 속의 바벨탑이 되고 말았다.


바빌론의 공중 정원 뒤로 바벨탑이 보인다.

21세기의 신밧드 - 바그다드 르네상스 플랜

바그다드 르네상스 플랜의 레이아웃. 건축가는 도시의 자급자족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아바스 왕조 시대 동아프리카, 인도, 중국해까지 넘나들었던 바그다드의 영예는 신밧드라는 위대한 모험가의 이야기로 집약된다. 그는 세계의 바다를 넘나들며 온갖 기이한 모험을 벌인 뒤에 수많은 금은보화를 바그다드에 가지고 돌아온다. 전쟁 이후, 복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라크인들에게는 운수 좋은 알리 바바보다는 어떤 고난도 스스로 이겨낸 신밧드가 더 훌륭한 롤 모델이 될 것 같다.


건축가 히삼 아스쿠리(Hisham N. Ashkouri)는 이라크 재건의 상징으로 31층짜리 신밧드 호텔(Sindbad Hotel Complex and Conference Center)을 건설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이 건물이 바그다드의 첫 번째 마천루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꿀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티그리스강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바그다드 르네상스 플랜' 역시 이 도시가 꿈꾸고 있는 21세기의 천일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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