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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절벽, 그 구름다리 위 쌓인 눈… 내 손은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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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

지상에서 하늘로 치솟은 돌기둥 모습의 숭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 허리를 두른 잔도와 구름다리를 지나면 절벽 위에 만들어진 선원(禪院) 싼황자이(三皇寨)로 건너갈 수 있다.
지상에서 하늘로 치솟은 돌기둥 모습의 숭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 허리를 두른 잔도와 구름다리를 지나면 절벽 위에 만들어진 선원(禪院) 싼황자이(三皇寨)로 건너갈 수 있다. / 신동흔 기자
중국 허난(河南)성 덩펑(登封)시에 있는 도교 사원 중악묘(中岳廟)에서 만난 마오리량(毛理良)씨는 자신의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 도교에 귀의한 지 25년이 되었다는 그는 "도불언수(道不言壽)"라고 했다. '도는 나이를 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른바 '기도발' 잘 먹히기로 소문난 사당이다. 향을 든 시민들이 끊이지 않았다. 앞마당엔 수령 1000년에서 1500년에 이르는 측백나무 수십 그루가 5~6m 간격으로 심겨 있다. 그 아래에는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켰던 낡은 신상(神像) 수백 기가 묻혀 있다고 한다. 홍콩 영화 '천녀유혼'에서 도사 역할을 맡았던 장국영처럼 옷을 입고 관광객을 안내하던 마오씨가 어느 순간 진짜 도사처럼 보였다.

한때 중원으로 불렸고 중악(中岳) 숭산(嵩山)이 우뚝 솟은 허난은 중국의 중심이다. 옛날 중국인들은 전설 속의 거인 반고(盤古)가 천지를 개벽했다고 믿었다. 그가 쓰러진 뒤 왼쪽 눈은 태양이 되고, 오른쪽 눈은 달이 됐다. 머리는 동악 태산(泰山), 다리는 서악 화산(華山), 왼쪽 어깨는 남악 형산(衡山), 오른쪽 어깨는 북악 항산(恒山)이 됐다. 거인의 한가운데 높이 솟은 배가 바로 중악이다. 불교 사찰 소림사(少林寺)뿐만 아니라, 도교사원 중악묘, 유교 서원 숭양(崇陽)서원이 모두 이곳에 터전을 잡은 이유다. 성도(省都) 정저우에서 뤄양(洛陽)과 시안(西安)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약 1시간 30분 정도 달리면 나온다.

하늘을 찌를 듯 쭉쭉 솟은 바위산으로 이뤄진 숭산에 올라보면 왜 이곳이 중악으로 불렸는지 이해된다. 옛 무승(武僧)들이 뛰어올라 다녔던 산을 관광객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케이블카 아래 무승들이 물을 길으러 다녔다는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소림사 경내는 우리 돈으로 1만8000원인 100위안을 내고 들어가야 한다. 관광객으로 붐비지만 출입 통제 구역에서 무술을 연습하는 까까머리 동자승들의 모습은 꽤나 진지했다.

경내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건물이 '입설정(立雪亭)'으로 불리는 데는 사연이 있다. 1400여년 전 눈 내린 어느 겨울날 이곳에서 수행하던 달마대사에게 제자로 받아주기를 청한 사내가 있었다. 달마가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면 제자로 받겠다"며 거절하자, 그는 자신의 한쪽 팔을 잘라 눈 덮인 뜰을 붉은색으로 만들었다. 그가 바로 중국 선종(禪宗)의 이조(二祖)인 혜가다. 여행안내원은 "소림 승려들이 한 손으로 합장을 하는 것은 그를 기리는 것"이라고 했다. 생각해 보니 무협 영화에 나오는 승려들은 유독 두 손이 아닌 한 손 합장을 했던 것도 같았다.

중악묘는 소림대로를 타고 덩펑시를 가로질러 달리면 나온다. 당나라 측천무후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황제가 정치적 성공을 하늘에 고하기 위해 지내는 제사를 '봉선(封禪)'이라 하는데, 진시황이 태산에서 올린 제사가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봉선이다. 덩펑이란 지명도 황제가 봉선을 위해 산을 올랐다고 붙은 이름이다. 측천무후는 뤄양의 룽먼산과 샹산 암벽을 따라 약 1.5㎞ 구간에 걸쳐 만들어진 룽먼석굴의 2300여개 불상 중 가장 큰 대불을 조성하기도 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 웬만한 황제들은 엄두도 못 낸 봉선을 감행하고, 대규모 불사(佛事)를 벌인 그의 재위 기간 백성들의 고난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래픽] 숭산
인근 숭양서원은 한때 절이었다가 도교 사원을 거쳐 송나라 때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고대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범중엄, 사마광, 주희 등 24명의 유학자가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곳 앞마당 측백나무의 수령(樹齡)은 중악묘나 소림사의 나무는 따라오지 못할 4500년. 기원전 110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숭산을 유람하다 우뚝 솟은 세 그루 나무를 보고 각각 대장군(大將軍)·이장군(二將軍)·삼장군으로 봉하기도 했다. 삼장군은 명나라 말기에 불타 사라졌고 지금은 2그루만 남아 있다. 나무는 4500년의 풍상(風霜)에 지친 듯 한쪽 굵은 가지가 옆으로 드리워 어른 몸통만 한 크기의 바위를 받쳐두고 있었다. 이달 초 찾았을 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딸아이를 데리고 와 나무 앞에 향을 피우고 가족의 무병장수를 비는 젊은 중국인 부부를 볼 수 있었다. 이 부부가 아이패드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나무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 나무는 또 무얼 더 지켜보게 될까.
변희원 문화부 기자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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