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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 크리스마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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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학교(Universite)는 12월 중순이면 크리스마스 방학이 있고 1월 초에 시험이 끝나면 한 학기가 끝나게 된다. 이맘때면 다들 '크리스마스, 방학 때 뭐할 거야?'라는 질문이 꼭 오가는데, 프랑스 친구들은 99퍼센트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으로 교환학생 온 유럽 친구들조차 다들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 자기나라로 돌아간다. 심지어 어학원에서 만난 미국친구도 2주 동안의 짧다면 짧은 방학 동안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한국에서 교환학생 친구들과 지낼 때를 다시 생각해봐도 유럽, 미주 친구들은, 1년 동안 한국에서 지내는 친구들조차, 크리스마스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내심 그런 친구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비행기 삯을 주고 집으로 돌아갈 바엔 그 돈으로 인접 지역의 문화를 탐험하는 여행을 하는 게 낫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유럽에 와보니 크리스마스가 유럽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 물론 종교적인 의미도 크겠지만 크리스마스는 1년에 한 번 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선물을 주고받고, 같이 식사하면서 그동안 못 나눴던 이야기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족행사였다. 유럽에서는 10월 말부터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캐럴이 들리는 것은 물론 상점마다 트리, 조명으로 한껏 멋을 낸다. 11월 말부터는 도시 곳곳에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는데 크리스마스 장식구들은 물론 다양한 음식과 옷, 액세서리들까지 판다.

한국행 대신 택한 '동유럽 여행'... "여자 혼자도 안전해요"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할 입장인 나는 이번 방학동안 동유럽 여행을 하기로 했다. 첫 번째 행선지는 슬로베니아. 말만 들어도 낯선 나라이고, 항상 슬로바키아랑 헷갈리던 나라이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슬로베니아가 유로화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 보니 슬로베니아는 구 유고슬라비아 나라로서 최초로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을 하고 2007년부터 유로화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슬로베니아에 도착하고, 여기가 수도에 있는 국제공항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조그마한 공항에서 나왔다. 수도인 류블랴나(Ljubljana) 시내로 가는 버스를 찾다가 파리에서 온 같은 비행기를 탔던 커플을 만났다. 그들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첫눈에도 내가 길 잃은 양 같아 보였는지 먼저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다. 같은 시간에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리에 일주일정도 휴가로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라며 남자분이 먼저 얘기를 꺼낸다. 그 분은 파리에서는 너무 다양한 인종이 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자기는 슬로베니아에서 흑인을 한 달에 한 번꼴로 볼까말까 한단다. 인구의 89%가 슬로베니아인인 슬로베니아에서 유색인종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여자분은 파리에서 날씨가 너무 좋았다면서 그렇지 않느냐고 나에게 되묻는다. 사실 요새 갑자기 추워진 파리 날씨에 어깨를 한껏 움츠리고 다녔던 나로서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여자분이 이렇게 물었던 이유는 류블랴나의 기온이 파리보다 5도에서 10도까지 더 낮기 때문이다. 나에게 추워 떨리던 파리 날씨는 슬로베니아의 그 분에게는 '포근한' 날씨였던 것이다. 류블랴나에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시내 중심에 늘어져 있기 때문에 보려하지 않아도 보게 될 거라고 얘기해준다. 마침 버스가 왔고 그 커플은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류블랴나는 여자 혼자 다녀도 안전한 곳이에요. 여행 잘 하세요."

겨울의 진미, 류블랴나에서 맛 본 '따듯한 와인'





공항에서 시내로가는 로변의 풍경은 평화롭고 신비롭다


공항에서 시내로 오는 길의 풍경은 비행기 타기 전까지 파리에서의 온갖 사념들(짐싸기 귀찮다, 거기는 엄청 춥다는데 어떡해, 내일 일찍 일어나야 되는데 큰일 났다 등등)을 싹 날려주었다. 길게 뻗은 늘씬한 나무들이 파란 평야에 줄지어 있고, 저 멀리에는 그림 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잔뜩 낀 구름이 신비한 느낌까지 더해주었다. 한 시간여를 달려서 시내에 도착했다. 시내에 도착하니 높은 빌딩에 맥도날드까지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니 모두들 영어를 쓰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아주머니 아저씨까지도 오른쪽, 왼쪽 손으로 가리키며 잘 알려주신다. 숙소에 도착하기 무섭게 갑자기 비가 내리고 천둥번개까지 친다. 그래도 짐을 풀고 밖에 나서니 크리스마스 시장이 있는 시내 중심은 사람이 가득하다.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파는 것은 바로 따듯한 와인. 이 따듯한 와인 뱅쇼(프랑스어: vin chaud, 슬로베니아어: kuhano vino)는 슬로베니아는 물론,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동을 데워 마시는 것처럼 와인에 오렌지와 레몬 같은 과일을 넣고 끓여서 만든 따듯한 와인 한잔을 마시면 '겨울이 왔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구나'를 새삼 깨 닳게 된다. 프랑스에서 레드와인으로 만든 것만 맛봤는데 여기는 화이트 와인으로도 만들어서 판다. 비가 오는데도 시장 앞 간의 테이블에서서 옹기종기 따듯한 와인을 마시고 있다.





천둥치고 번개까지 번쩍이는 거리에서 뱅쇼를 즐기는 류블랴나 시민들


'우산이 세 번 뒤집히면 집으로 가야지'

저녁이 되니 조명장식이 가관이다. 시내 중심에 있는 큰 크리스마스 트리 조명 장식을 보고는 '우아 예쁘다'라는 생각보다는 '나무가 정말 괴롭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화려했다. 그 외에도 중심가 하늘에는 행성 모양으로 조명을 꾸며놓았다.





시내의 화려한 크리스마스 조명장식

ⓒ 이주리





행성 모양으로 공중을 장식한 크리스마스 조명


춥고, 비오고, 이 와중에도 다들 호호 따듯한 와인을 식혀가며 가족들과, 연인,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이 장면들은 부러워하면서 보고 있다. 이놈의 우산은 자꾸 뒤집어진다. '우산이 세 번 뒤집혀지면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하며 구경하고 있으니 몇 분 되지 않아 세 번이 다 채워졌다.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카페에서 나도 화이트 와인으로 만든 따듯한 와인을 맛보았다. 따듯한 와인이 그나마 나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나처럼 낯선 행성에 와 있는 듯한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따듯한 와인 한 잔은 큰 위로가 됐다.





따뜻한 화이트와인 한잔으로 류블랴나에서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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