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는 여행자들에게 로망의 종착역으로 섬겨지는 땅이다. 환상을 품고 달려왔던, 변해버린 실체가 낯설던, 뛰는 가슴은 이미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의 흔적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낯선 곳 어디에 머물러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의 잔잔한 색소폰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코히마르(Cojimar)는 헤밍웨이의 풍류가 서린 마을이다. 수도 아바나 동쪽, 한적한 어촌마을인 코히마르는 헤밍웨이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줬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해변 한쪽에는 헤밍웨이의 동상이 서 있고 그가 즐겨 찾았다는 술집도 남아 있다. 헤밍웨이를 기리는 청새치 낚시 대회도 매년 이곳에서 열린다.

어촌마을인 코히마르는 소설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된 곳이다.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된 포구

예술가에게는 제2의 고향이라는 게 있다. 그가 태어나지 않았어도 집필이나 창작의 자양분이 된 곳. 유럽의 문호들에게 지중해의 외딴 도시가 그러했듯 헤밍웨이에게는 아바나와 함께 이 낯선 어촌마을이 제2의 둥지였다. 이념도 피부색도 달랐던 공간에서, 헤밍웨이는 카리브해의 아득한 바다를 촉매 삼아 꿈을 포기하지 않은 한 늙은 어부의 삶을 그려냈다.

20년 넘는 세월을 쿠바에 머물렀던 헤밍웨이는 코히마르에서 낚시를 즐겼고, 소설 속 노인인 선장과 술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나눴다. “낚시하기 안 좋은 날이면 당장 글을 쓰겠다”고 할 정도로 낚시에 푹 빠져 살던 시절이었다. 노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그의 가족들은 어촌마을에 남아 옛 추억을 전하고 있다.


마을은 요란스럽지 않고 아담한 풍경이다. 현란한 이정표도 없고, 관광지를 떠올리게 하는 상인들이 몰려드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욱 운치 있다. 해변을 거닐다 우연히 마주치는 헤밍웨이의 흉상이 이곳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포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흉상은 한 어부가 기증한 선박의 프로펠러를 녹여 만들었다는 사연을 담고 있는데,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바다를 바라보고 외롭게 서 있다.

‘라 테레사’에서는 라이브 선율이 흘러나와 포구마을의 운치를 

더한다.

턱수염 가득한 헤밍웨이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



레스토랑 ‘라 테레사(La Terraza)’는 유일하게 이 포구마을에서 붐비는 곳이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단골 술집으로 내부에는 그의 사진들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다. 이곳에서 창밖 바다를 배경으로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그가 마셨던 모히토(Mojito) 한 잔을 기울이는 기분은 묘하다.




순박한 쿠바의 풍경을 만나다

코히마르가 가슴 깊이 박히는 것은 단지 헤밍웨이 때문만은 아니다. 아바나의 도심이 변질돼 가는 것과는 달리 이곳 어촌마을의 골목에서는 상상 속에 오래 묻어둔 순박한 쿠바인들을 만난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성긴 이를 먼저 드러내고 웃는 모습들이다. 가난 속에서도 쾌활하고 때가 묻지 않은 미소와 눈빛. 그 정경들이 알알이 새겨진다. 소설 속 감흥을 이끌어낸 헤밍웨이의 선택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외딴 코히마르의 골목에서는 박물관에서나 볼 듯한, 50년대 올드카들과 마주치는 게 오히려 낯설다. 미군정 시절, 아바나 근교는 미국 부호들의 휴양지였고 그들이 남긴 유흥의 흔적이 수십 년 세월을 지나 그대로 남아 있다. 울퉁불퉁한 올드카들은 외국의 자동차 마니아들이 눈독을 들여도 팔지 않는 쿠바의 명물이 됐다.

코히마르에서는 순박한 쿠바인들의 삶을 엿볼수 있다.


헤밍웨이는 쿠바를 사랑했고, 쿠바의 여인을 사랑했고, 쿠바의 럼을 사랑했던 소설가였다. 미국과 쿠바의 관계악화로 헤밍웨이는 쿠바를 떠나야 했지만 그의 흔적은 쿠바 곳곳에 흩어져 있다. 소설 [노인과 바다] 배경의 다른 한 축을 이뤘던 마리나 헤밍웨이는 요트가 즐비한 관광지가 됐고, 그가 실제로 거주했던 아바나 남쪽의 저택은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그의 애장품인 낚싯배도 함께 전시돼 있다. 헤밍웨이는 아바나 도심의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으며 해가 저물면 대성당 옆 ‘라 보데기타(La Bodeguita)’나 ‘라 플로리디타(El Floridita)’에 들려 럼주를 기울였다. 20세기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의 숨결은 이렇듯 쿠바의 낯선 해변, 골목과 바에 잔잔하게 녹아 있다.




가는 길
미국 LA~멕시코시티를 경유하는게 일반적인 루트다. 중미 지역에서 에어로 멕시코 항공, TACA항공, 쿠바 항공이 아바나까지 수시로 오간다. 캐나다를 경유할 수도 있다. 입국 전에 공항에서 비자를 구입할 수 있으며 출국 때 역시 별도의 공항세가 있다. 아바나에서 코히마르까지는 버스가 다닌다. 택시를 타기 전 가격 흥정은 필수. 쿠바 내에서는 달러나 유로를 쿠바 화폐로 교환이 가능한데 미국 달러는 캐나다 달러에 비해 80~90%의 환율이 적용돼, 캐나다 달러로 가져가 환전하는 게 더 유리하다.

쿠바 수도 아바나

쿠바가 개방된다. 쿠바에 변화가 온다. 쿠바인들에게는 개방이 그 무엇보다 기다려지는 변화였을지 몰라도, 쿠바를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피하고만 싶었던 단어가 아마 변화였을 것이다. 쿠바는 늘 과거에 갇혀 있었다. 조금 많이 낡았고 조금 많이 구식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 돌아가는 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하나 그게 사람들이 쿠바를 사랑한 이유였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쿠바의 모습은 사진가들을 설레게 했다. 쿠바 외에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풍경. 한 번쯤은 접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쿠바의 모습과 이별일지도 모른다. 작년 말 오바마 정부가 발표한 규제 완화 선언과 함께 그동안 꽁꽁 닫혀 있던 개방의 문이 활짝 열릴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바나는 쿠바의 수도이자 쿠바의 모든 것. 여행자들이 떠올리는 바로 그 이미지를 모두 갖춘 곳이다. 쿠바노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노는 것을 좋아한다는 소문의 진상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바나에 도착한 첫날 밤, 내 방 바로 옆 골목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밤새도록 춤을 추며 파티를 했기 때문이다. 골목골목마다 벌어지는 이런 동네 파티는 쿠바에서 쉬이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쿠바 말레콘의 석양 / 케이채 제공
미국식 클래식한 자동차가 서있는 쿠바의 뒷골목.
미국식 클래식한 자동차가 서있는 쿠바의 뒷골목.
그런 뜨거운 환영을 뒤로하고 처음 찾았던 곳은 아바나의 유명한 해안가 말레콘(Malecon). 과거 국내에서 유명했던 모 광고에 나왔던 것처럼 파도가 도로까지 거세게 몰아치지는 않았지만 쿠바에 도착했다는 현실을 실감하기에 말레콘의 석양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노랗게 마지막 빛을 뿜어내는 태양 속 파도가 내 마음을 모두 적셔버릴 만큼 오랫동안 그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으로 담고 나서야 진정 깨달았다. 내가 지금 쿠바에 있다는 그 사실을.

쿠바 하면 떠오르는 위대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헤밍웨이는 쿠바를 사랑한 남자였다. 위치적으로 쿠바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에서 자신의 보트를 타고는 아바나로 입항해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가 장기간 거주하며 글을 썼던 호텔방은 박물관이 되었고, 그가 즐겨 찾던 술집들은 아바나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 되었다.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서, 나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에서"라고 헤밍웨이가 말했다. 그리고 이는 내게도 진실이었고 또 진리였다. 쿠바에서 나의 모히토도 라 보데기타에서, 나의 다이키리도 엘 플로리디타에서 마셨다. 헤밍웨이는 나의 노인이었고, 말레콘은 나의 바다였다.

헤밍웨이보다 쿠바에서 더 유명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아니 사실 쿠바 그 자체보다도 크고 더 거대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쿠바와 전혀 상관이 없는 곳에 가도 당신은 그의 이미지를 볼 것이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그의 얼굴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바로 체 게바라. 쿠바의 혁명을 이끌었던 남자. 부와 명예가 아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던 남자.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고도 안주하지 않고 또 자신을 필요로 하는 전장으로 떠났던 그는 세계적인 영웅이자 쿠바의 영웅이다. 쿠바의 도시 곳곳에는 체 게바라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그가 남긴 말들이 쓰여 있다. 시내의 관광품 가게들에는 대부분이 체 게바라에 관련된 것들이다. 아바나의 상징적인 혁명 광장에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크게 건물의 벽을 메우고 있다. 체 게바라가 원했던 혁명의 결과가 지금 쿠바의 모습이었을까? 쿠바의 거리를 배회하며 가끔 자문하고는 했다.

쿠바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누가 뭐래도 역시 '아메리칸 클래식'이다. 1950년대를 대표하던 아름다운 미국산 자동차들 말이다. 혁명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단절되며 수출입이 막히게 되었고, 결과적으론 당시엔 최신 자동차들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정작 미국 본토에서는 볼 수 없는 클래식이 되어 쿠바 도로를 누비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생쌩하게 달리는 이 멋진 자동차들. 그리고 그 자동차들의 배경이 되어주는 옛 스페인 점령기 시절의 아름다운 건축물들. 낡고 제대로 수리가 안 되어 무너져내려 가고 있는 것도 많지만 오히려 그럼에도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신기할 노릇이다. 오래된 자동차들과 건물들이 빚어내는 조금은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화려한 색감들은 쿠바 사람들의 성향을 그대로 투영해 보여주는 듯하다.

느긋하며 너무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분명한 한 가지는 오늘 밤은 춤추고 노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일단 내일로 미루자. 미뤄놓고 생각하지 말자.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면 되니까. 그렇게 밤마다 펼쳐지는 춤과 음악의 향연에 진통제라도 맞은 듯 세상 모든 일은 평안해지고는 했다. 그래 쿠바는 그런 곳이었다. 앞으로 어디로 갈 건지보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가 더 중요한. 지금 이 순간만을 즐겨야만 하는 곳.


쿠바 수도 아바나

 ! 여행정보

쿠바 가는 법 :한국에서는 직항이 없기에 두 가지 방법으로 갈 수 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쿠바행으로 갈아타거나, 멕시코의 멕시코 시티 등 중미 도시들에서 쿠바로 향하는 비행편을 운항하고 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더아티스트매거진=이상석]

쿠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세계사 교과서에서만 보던 쿠바 사태의 쿠바가 오늘 소개할 그 쿠바다. 사회주의권에 속해 있는 만큼 우리들하고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국가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옛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쿠바에 대한 관심이 더욱더 고조되고 있다. 더 이상 중남미 여행 도중 그저 거쳐만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다는 것이다. 10년 전만해도 100명이 채 안되던 관광객이 작년 한해에만 3천명을 넘어선 것만으로도 이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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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적인 경치를 자랑하는 카리브 해

사실 쿠바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많이 없다. 굳이 떠올리자면, 익히 알고 있는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의 저자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정도?! 아름다운 글을 쓴 만큼 쿠바는 경치가 좋은 카리브 해를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나라이다. 사실, 필자는 카리브 해의 아름다움보다 더욱 호기심이 미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은 어떠할까? 어떠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 마치 한국 사람들이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을 궁금해 하듯 말이다. 그래서 쿠바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일부는 50여 년간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사회주의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떠나곤 한다.

  
▲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한국의 위상이 남다르다. 쿠바인들의 '안방'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류 드라마의 인기가 높았다. 국영TV 방송국인 카날 하바나에 따르면 2012년 '내조의 여왕'이 방영될 때 시청률은 무려 80% 이상이었다. '아가씨를 부탁해'와 '대장금', '미남시이네요' 등의 드라마도 높은 시청률을 보였으며, 오히려 기존에 쿠바 안방을 장악하고 있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드라마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쿠바인들은 한국과 일본, 중국 사람들을 제대로 식별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류 드라마 덕분에 한국 문화에 대해 알게 되고, 한국인 관광객들에 좀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다. 특히, 장근석, 현빈 등의 연예인들은 쿠바 여성들 사이에서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혹여나, 한국 남자들이 모두 이민호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오해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 한류 드라마의 열풍은 쿠바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옛 이야기를 꺼내자면, 1492년 10월 콜럼버스가 처음 쿠바에 도착했을 때 “눈으로 볼 수 있는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표현했을 정도로 쿠바는 매력적이면서도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나 이후 스페인의 침략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먼저 점령당한 식민지 국가가 되었으며, 동시에 가장 늦게 독립한 국가 역시 쿠바이다. 미국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쿠바의 모든 이권과 소유권을 독차지했다.

이후 1959년 체게바라와 카스트로 형제가 주도한 혁명으로 쿠바는 1961년 사회주의를 선언하고 공산국가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미국과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으며, 대사관은 없고 현재 미국은 쿠바 동쪽 끝에 있는 관타나모 땅에 기지를 세워두고 있다. 공산권 국가와 지속적인 교류를 이어오던 쿠바는 1989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 경제 원조가 끊기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다양한 매력을 지닌 쿠바, 아바나

쿠바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을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선언을 한 뒤로 국교가 단절된 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북한과 수교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을 대하는 쿠바인들의 태도는 한없이 친절하고 따뜻하다. 쿠바인들인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여행해도 괜찮다, 이제 쿠바의 매력을 느껴보자.


아무 것도 없어 전부가 되어 버린 - 말레콘 방파제

엘 말레콘(El Melecon)은 아바나의 북쪽 바닷가를 둘러친 8km 가량의 해안도로다. 여러 영화와 다큐멘터리들이 말레콘의 이 방파제를 아바나의 상징처럼 그리고 있는데, 거기에는 조금 역설적인 진실이 깃들어 있다. 말레콘에는 아무 것도 없다. 바다 쪽에는 한강 고수부지만도 못한 허름한 둑이 길게 이어져 있고, 길 건너편에는 과연 사람이 살고 있을까 싶은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그것이 쿠바다. 혁명의 꿈은 소비에트식 계획경제와 미국의 고립 정책으로 처참하게 좌절되었다. 아바나의 시민들은 버릴래야 버릴 게 없고, 살래야 살 것이 없는 신세를 수십 년간 겪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럼으로 인해 말레콘은 진짜 아바나가 되었다. 빈털털이의 시민들은 이 방파제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한정으로 주어지는 태양과 파도와 바람과 비가 있었다. 그들은 돈을 줘도 살 수 없는 행복의 조각들을 모아 온갖 종류의 노래와 춤을 만들어냈다.

나의 ‘체’는 돈을 받지 않는다 - 혁명 광장

모스크바, 부다페스트, 평양. 공산주의의 수도들은 아직도 구 소련이 배급한 어두컴컴한 코트를 덮어쓰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바나는 '섹시한 혁명의 도시'라는 독특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눈부신 카리브해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는 지정학적 조건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이곳이 체 게바라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체의 얼굴은 혁명 광장(Plaza de la Revolución)의 벽을 비롯해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 대부분이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아이콘 '영웅적인 게릴라(Guerrillero Heroico)'라 불리는 1950년대 체의 사진을 변형한 것이다. 사진을 찍은 알베르토 코르다(Alberto Korda)는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자신의 작품에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혁명과 자유의 아이콘이라는 경계를 넘어 상업적 이미지로 팔리는 데는 우려를 나타냈다. 급기야 스미노프가 감히 보드카 광고에 체의 얼굴을 사용하자 반대에 나섰고, 5만 달러의 로열티를 받아내 쿠바의 의료 지원제도에 기부했다.


체의 이미지는 아일랜드의 짐 프리츠패트릭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1968년 뉴욕의 지하철 광고를 시초로 쿠바의 가장 강력한 적인 미국 곳곳에 퍼져나갔다. 2003년의 <뉴욕 옵저버>는 코르다가 체를 섹시한 혁명 영웅으로 만든 패션 사진가였다고까지 말한다.


알베르토 코르다는 자신이 찍은 체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라고 했다.

시가 연기는 제 멋대로 흐른다 - 파르타가스 담배 공장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자살을 결심한 알 파치노는 자신이 데리고 다니던 청년에게 말한다. "몬테크리스토 넘버원을 사와." 쿠바 산의 이 명품 시가를 구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사이에 충분히 목숨을 끊을 수 있으리라 여긴 게다. 그런데 왜 쿠바의 담배에 '몬테크리스토'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1913년 솔트레이크 시티에서 아바나 산 시가를 배달하는 자동차


쿠바의 담배 공장에서는 장시간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소설책을 읽어주는 전통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기 때문이란다.


콜럼부스가 처음 쿠바 섬에 도착했을 때에도 이곳 원주민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쿠바 산 시가는 이 가난한 나라를 먹여 살리는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다. 캐피톨 빌딩 근처의 파르타가스(Real Fabrica de Tabacos Partagás)는 아바나에서 가장 오래된 담배 공장 중의 하나로, 쿠바 담배 산업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을 열고 있다. 1845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그 멋진 크림색 외관만으로도 많은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공 하나로 자유를 찾아 - 라티노아메리카노 스타디움

한국과 쿠바는 묘한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이 지구상에서 야구에 목숨 거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지난 WBC와 올림픽을 통해 한국팀이 세계적인 위용을 과시했지만, 과거 아마추어 야구에서 쿠바는 대마왕과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쿠바 야구는 이제 국민 스포츠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의 위치에 올라서 있다. 동네 공터에서 공을 던지고 나무 방망이를 휘두르는 소년들은 국가대표 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 가장 큰 꿈인데, 그 꿈을 이룬 순간 중대한 기로에 선다. MLB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느냐, 마느냐? 아바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갑부가 될 것인가, 혁명 쿠바를 지키는 영웅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수많은 쿠바인들이 보트에 매달려 필사의 탈출을 벌일 때, 그들은 야구공을 타고 자유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아바나의 라티노아메리카노 스타디움(Estadio Latinoamericano)은 카리브해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 경기장이다. 5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중석, 명예의 전당을 비롯한 역사적 유물, 카페와 편의 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일주일에 다섯 번 펼쳐지는 야구 경기는 쿠바인의 열정을 스타디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한다.


라틴 아메리카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뛴 에스테반 벨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마지막 흔적 - 콤파이 세군도의 집

모든 음악은 아바나를 지나야 했다. 그리고 아바나에 들어온 뒤에는 그냥 떠나지 못했다. 하바네라, 손, 맘보, 차차차, 살사, 룸바. 쿠바가 탄생시킨 음악들의 리스트는 끝이 없다.

아바나의 할아버지 할머니 뮤지션들에 의해 세계는 무장해제 당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아래위를 대표하는 아르헨티나의 탱고와 뉴욕의 재즈에서도 아바나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의 설교 속에 음악가들의 삶은 밑바닥으로 꺼져갔다.


다행인 것은 움츠려 있었지만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죽기 직전의 그들을 불러 모은 이가 있었다. 수십 년간 골방에서 졸고 있던 쿠바 음악은 1997년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프로젝트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라이 쿠더는 194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클럽의 멤버들을 다시 모아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만들고 해외 투어에 나섰다. 빔 벤더스는 그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혁명이란 바로 이런 거였다. 세계는 아바나의 선율에 무장해제 되었다.


부에나비스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마지막 불꽃을 피운 뒤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아바나에는 '부에나비스타'라는 이름을 단 연주들이 여러 호텔과 공연장에서 이어지고 있지만, 관광객들을 위한 여흥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부에나비스타의 정신적인 리더였던 콤파이 세군도가 마지막을 보낸 집(Casa Compay Segundo)은 지금 작은 박물관이 되어 그들의 마지막 영광을 기린다.

딸기냐 초콜릿이냐, 혁명이냐 아이스크림이냐? - 코펠리아

아바나로부터 날아온 음악들을 듣다 보면 가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이런 자유로운 감성의 사람들이 어떻게 카스트로의 영구 집권을 견뎌왔을까? 그런데 역시나 고뇌는 있었다. 젊은이들, 특히 소수의 감성을 지닌 이들에게 아바나는 아이러니로 뒤범벅된 도시다.


1993년의 영화 [딸기와 초콜릿]에서 두 주인공은 아바나 중심가의 아이스크림 가게 '코펠리아(Coppelia)'에서 처음 만난다. 공산당원인 대학생 다비드의 테이블에 딸기 아이스크림을 들고 온 디에고. 초콜릿이 있는데도 굳이 딸기를 시키는 남자, 쿠바에서 그것은 동성애자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 다비드는 공산당이 '반혁명 변태분자'로 낙인찍은 게이의 행동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디에고의 집을 찾아간다. 이렇게 호기심으로 시작한 관계는 점차 다비드가 갖고 있던 완고한 세계관은 흔들게 된다. 둘은 서서히 서로를 이해해가고 딸기와 초콜릿을 바꿔먹기도 하지만, 쿠바의 현실은 그들의 자유로운 만남을 용납하지 않는다.


쿠바의 여러 도시들은 즐거운 사교의 공간인 아이스크림 가게 '코펠리아'를 갖고 있다. 이들이 만난 아바나의 코펠리아는 1960년대에 지어진 건물로 마치 그 시절 SF 영화에 나왔을 법한 특이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딸기와 초콜릿] 덕분에 더욱 유명해졌고, 길 건너편에 있는 극장 시네 야라(Cine Yara)에서 이 영화가 기록적인 흥행을 했다고 한다.


초콜릿이 있는데도 굳이 딸기를 시키는 남자, 그것은 동성애자라는 뜻?


맘보와 살사, 모든 춤이 태어난 바닷가 - 미라마르

아바나는 음악과 춤을 결합한 여러 엔터테인먼트를 준비해두고 있다. 트로피카나 클럽의 캬바레 댄스 쇼.


아바나는 스페인이 지배한 카리브해 식민지들의 수도였다. 여러 식민 도시에서 긁어모은 금은보화와 신대륙의 산물들은 아바나 항에 모인 뒤, 해적들과 암초들을 피해 세비야로 향했다. 더불어 이 바닷가는 아프리카의 노예들과 유럽의 개척자들이 태양 아래 어우러져 온갖 음악과 춤을 만들어 낸 곳이기도 하다.


아바나는 언제나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춤을 만들어내고 세계로 퍼뜨려온 도시다. 1940년대 중반에는 맘보, 50년대 중반에는 차차차, 그리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쿠반 살사가 그 영광의 스텝을 이어왔다. 쿠바 전통의 음악이자 춤인 손과 룸바로부터 많은 요소를 이어받은 쿠바 스타일의 살사는 카지노(Casino)라고도 불리는데, LA 살사와 대별되는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지금도 인기가 높다. 아바나의 바닷가와 주거 지구가 만나는 미라마르(Miramar) 지역은 쿠반 살사를 비롯한 여러 쿠바 스타일 댄스의 탄생지이다. 영화 [더티 댄싱: 하바나 나이트]는 1958년의 혁명을 배경으로 아바나의 춤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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