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나스(Kaunas)는 인구 약 40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이다. 어느 나라나 그러하지만, 제2의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언제나 수도의 그늘에 가려 올바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불만이 그득하다. 카우나스 사람들은 특히 그러하다.

예수부활성당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풍경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카우나스가 정식으로 도시로 인정받게 된 것은 1408년으로, 60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도시이다. 리투아니아를 흐르는 양대 젖줄인 네무나스(Nemunas)강과 네리스(Neris)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카우나스는, 이런 입지적 조건으로 리투아니아 초기부터 사람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 주요 거점 지역으로 통하고 있어 군사적, 경제적 중요성 역시 대단했다. 15세기 당시 독일기사단이 유럽 전체로의 팽창을 위해 동방진출을 꾀했을 때는 리투아니아의 고대 수도인 트라카이빌뉴스를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리투아니아는 최초로 독립을 이루었으나 폴란드에게 수도 빌뉴스를 불법 점령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카우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가 되어서 현대사의 서곡을 알리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기도 했다.

빌뉴스 이전 트라카이가 수도였을 당시 독일기사단들의 침공으로부터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한 카우나스성. 현재는 복원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현재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거니와, 전 유럽에서 감히 최강이라 불러 마지않을 리투아니아 국가대표 농구팀 잘기리스(Žalgiris)의 거점지역으로 유명하다. 몇 년 전부터는 아일랜드의 저가항공사인 라이언에어의 동유럽 허브로 지정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관광객들을 불러들여 카우나스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지만, 그와 동시에 한때 유러피안 드림을 쫓아 유럽으로 떠났던 젊은이들이 눈물을 머금고 고국 땅을 밟게 되는 우울한 장소로 변화되기도 했다. 작지만 복잡 다난한 도시, 카우나스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구시청사 위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풍경. (일반인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자유와 혁명이 도시 카우나스

과거 소련 도시들에는 전부 하나같이 레닌대로, 스탈린대로, 가가린대로 같은 소련 영웅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곤 했다. 하지만 그런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카우나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중심거리의 이름은 바로 라이스볘스 알례야(Laisvės alėja), 우리말로 하자면 ‘자유로’였다. 한때 이 도시는 금연도로로 지정된 적이 있었지만, 현재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 미덕을 해하는 행동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없는, 거의 완벽한 자유가 보장된 거리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자유로는 언제나 거리의 악사들로 넘쳐난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에서 자유와 혁명의 분위기는 아주 유별나다. 1972년 5월 14일, 바로 이 자유로 한가운데에서 당시 20살이던 카우나스의 청년이 휘발유를 몸에 들이붓고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분신한 곳 근처에는 “나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치체제 뿐이다”라는 유서가 한 장 남아 있었고, 그 이후 이틀 동안 카우나스는 소련의 붉은 군대도 경찰들도 통제할 수 없는 혁명의 도시로 변화하였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약 20년 후 소련 전체가 붕괴되는 시발점이 되어준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전에도 소련의 지배를 반대하는 분신자살은 리투아니아의 다른 지역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그 어떠한 것도 카우나스처럼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던 장발문화와 비틀즈(비틀스), 록음악도 카우나스에서는 아무 어려움 없이 감상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전 소련 내 히피문화의 메카로 부상하기도 했을 만큼 카우나스의 자유로는 구소련 내에 불고 있는 자유화에 대한 갈망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이런 배경 덕에 리투아니아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같은 인근 국가나 중앙아시아 등과 비교했을 때 소련화가 가장 적게 진행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 군사력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박물관. 박물관 앞으로는 리투아니아 현대사를 이끌어간 위인들의 흉상들과 이름 없는 영웅들을 위해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위치한 통일광장이 위치해 있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야깃거리는 또 있다. 카우나스가 임시수도였을 당시 일본영사직을 맡아 일했던 스기하라 치우네(센포 스기하라, Chiune Sugihara)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 6천 명을 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소련이 점령하고 있는 리투아니아가 독일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것이 분명해지던 시기, 유대인들은 남미에 있는 섬들(네덜란드, 덴마크령)로 이주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이주하기 위해 통과해야하는 소련에서는 어이 없게도 일본의 통과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고, 수 천명의 유대인들은 일본 통과비자를 받기 위해 당시 스기하라가 일하던 일본 영사관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독일과 돈독한 관계에 있던 일본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대인들의 통과비자 발급을 불허했으나, 스기하라는 정부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통과비자를 발행해서 6천 명의 유대인들에게 새 생명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2차 대전 당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구한 스기하라 영사가 근무한 일본영사관 건물, 현재는 스기하라 기념관과 아시아 지역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사진: 서진석>

과거 스기하라의 행적을 기념하는 ‘희망의 문, 생명의 비자’라는 문구가 리투아니아어와 일본어로 병기되어 있다. <사진: 서진석>

현재 그가 일하던 영사관은 카우나스 최대 대학교인 비타우타스 마그누스(Vytautas Magnus)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소속의 아시아 지역연구소와 스기하라 박물관이 들어서 있고, 아시아 지역연구소에서는 몇 년 전 한국학 강의도 시작했다. 하지만 2013년경 이 건물 전체에 일본을 홍보하는 일본문화원이 들어설 계획이다.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구시가지

유럽은 일반적으로 구시가지가 그 도시의 행정중심지역인 경우가 많지만, 카우나스의 경우 자유로가 그 기능을 맡아서 하고 있고, 구시가지는 도시의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카우나스의 영원한 경쟁상대인 빌뉴스의 구시가지는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복원과 홍보에 대한 엄청난 지원을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카우나스의 구시가지는 그런 호사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수도에 비해 개발이나 보존 상태가 열악하지만 빌뉴스의 구시가지와 견주어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곳으로서 일 년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7km의 자유로를 따라 쭉 걷다 보면 바로 이어지는 빌뉴스 거리(Vilniaus gatvė)가 바로 구시가지의 시작이다. 그 거리에 들어서면 나그네를 맞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자갈길과 예스러운 모습의 공중전화가 카우나스의 역사를 실감하게 해준다.

구시가지의 입구인 빌뉴스 거리. 리투아니아의 도시들은 가장 번화한 대로를 수도의 이름을 따 ‘빌뉴스 거리’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마이로니스는 리투아니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카우나스 구시청사광장에 위치한 마이로니스 석상 주변 풍경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 구시가지의 주요 볼거리들도 역시 성당이다. 빌뉴스처럼 대부분의 성당들은 소련 시절 다른 기능으로 변환되어 학교, 강당, 심지어 운동장, 사우나로 사용되기도 했다. 카우나스에 있는 성당 중 가장 훌륭한 곳은 빌뉴스 거리와 시청광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베드로 바울 성당 (Šv. apaštalų Petro ir Povilo bažnyčia) 이다. 전쟁과 화재를 겪으면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확장 증축되어 리투아니아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가 된 이 성당의 외부 벽에는 19세기 말 바로 이 성당에서 주교로 일하며 리투아니아 민족의식 부흥에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신부이자 시인인 마이로니스(Maironis)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카우나스의 대표적인 성당인 베드로 바울 대성당의 모습.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시청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구시청사(Rotušė)는 그 도도한 백색 이미지 때문에 ‘흰 백조’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1542년 최초로 그 자리에 들어선 이래 성당, 감옥 등 여러 가지 기능으로 바뀌어 내려오다가 18세기 말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조되었다. 현재는 아주 특별하게도 결혼식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주말에는 백색의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신혼부부들과 들러리들로 주변 광장이 가득 찬다. 건물 한쪽에는 도자기 박물관도 위치해 있다.

구시청사의 낮과 밤. 구시청사 광장은 주말이 되면 신혼부부들과 햇볕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 찬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광장 서편 강 쪽으로 위치한 알렉소토(Aleksoto) 거리에 위치한 페르쿠나스의 집(Perkūno namas)은 카우나스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고딕 양식 건물 중 하나로서, 리투아니아 중세 건물의 진면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로 손꼽힌다. 초기에는 길드 연합회, 그 후 예수이트 성회의 예배당, 드라마 극장 등으로 사용되었는데, 1818년 보수 공사 도중 벽 안에서 리투아니아 전통신앙의 최고신으로 천둥을 관장하는 신인 페르쿠나스(Perkūnas)의 형상으로 추정되는 조각이 발견되어, 그 이름을 따 ‘페르쿠나스의 집’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현재는 동유럽 최대의 문호 중 한 명인 폴란드 출신의 작가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의 행적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리투아니아 고딕 양식 건물의 진수를 보여주는 ‘페르쿠나스의 집’.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카우나스 시내 어디에서든 보이는 예수부활성당의 모습. 언덕 아래에서 교회 입구까지 푸니쿨러를 타고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진: 카우나스 관광청>

그 외 카우나스에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박물관들이 많이 위치해 있다. 안타나스 즈무이지나비츄스(Antanas Žmuidzinavičius)라는 조각가가 평생에 걸려 리투아니아와 유럽 전역에서 수집한 악마형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악마박물관, 20세기 초 음악과 회화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리투아니아 현대예술의 밑그림을 그려준 츄를료니스(Čiurlionis)의 작품이 전시된 국립츄를료니스 미술관, 입구에 서 있는 발가벗은 남자상으로 더 유명한 현대미술관인 질린스카스(Žilinskas) 예술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악마박물관에 가면 죽어서 악마가 되어버린 스탈린히틀러를 만날 수 있다. 2층 한가운데,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리투아니아 위에서 춤을 추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모습을 악마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가슴이 숙연해지게 한다. 악마박물관은 여전히 세계 여러 나라들의 '새로운 악마'들을 꾸준히 수집하고 있는데, 동남아,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각국의 악마들은 전시장에 진열되어 있지만, 아직 한국은 이곳에서 열외이다.

카우나스 시내에서는 어디에서도 보이는 언덕 위의 하얀 교회인 예수부활성당(Kristaus prisikėlimo bažnyčia)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카우나스 구시가지의 모습은 환상적이다. 또한 교회 아래쪽에서 언덕 위로 올라가는 푸니쿨라(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케이블카의 한 종류)를 타고 오르는 재미도 쏠쏠하다.

2011년 5월 19일부터 22일까지는 중세 한자 무역동맹 시절의 문화와 생활상을 재현하는 중세문화축제인 '한자축제'가 카우나스에서 열린다. 한자축제는 과거 한자무역의 동맹도시가 모두 참여하는 유럽 최대의 축제 중 하나로 중세시절 유럽의 분위기를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가는 길

카우나스 시내에서 약 17km 떨어진 카르멜라바(Karmėlava) 국제공항에 라이언에어의 저가항공이 많이 취항한다. 더블린, 파리, 런던, 프랑크푸르트, 밀라노, 오슬로, 탐페레, 바르셀로나 등 유럽 주요 도시에서 저가항공을 타고 편하고 저렴하게 입국을 할 수 있다.


수도 빌뉴스에서는 카우나스로 이동하는 버스와 기차가 수시로 출발하며 버스는 한 시간 40분, 급행열차의 경우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된다. 모스크바에서 기차로 들어오는 방법도 있으나, 현재 다른 서유럽 국가로 연결해주는 기차 노선은 전무하다. 유로라인이나 에코라인 같은 국제버스들을 통해서도 카우나스에 어렵지 않게 들어올 수 있다.

러시아 내륙에서 라트비아로 들어올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다우가우필스(Daugavpils)는 라트비아 제2의 도시이다(‘다우가프필스’로 불리기도 하지만, v자가 자음 앞에 왔을 때 묵음이 되는 라트비아어의 특성상 ‘다우가우필스’로 부르는 것이 맞다). 러시아 국경에서의 복잡한 여권심사를 마치고 다우가우필스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누구나 러시아를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는다. 간판이나 표지판, 안내문들이 모두 러시아어와는 상당히 다른 라트비아어로 적혀 있어 국경을 넘어 새로운 문화권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다우가우필스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라트비아어 간판이 달린 서점에 들어가도 내부에 진열된 책들은 90% 이상이 러시아어로 된 책들이며, 라트비아어로 된 메뉴판을 가져다주는 식당에서도 종업원과 손님들은 모두 러시아어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심지어 영화관에 가도 최신 할리우드 영화가 러시아어로 더빙되어 상영될 정도다.

다우가우필스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보행자 전용거리인 리가 거리. <사진: 다우가우필스 관광청>

라트비아는 소련 시절 발트3국에서 가장 러시아화가 많이 진행된 지역이기도 하지만. 다우가우필스가 있는 동부 지역은 특히 더하다. 다우가우필스 주민들 중 60% 이상이 러시아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라트비아 안의 작은 러시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우가우필스는 한국인뿐 아니라 발트3국을 자주 다니는 외국인들에게조차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인구 규모 역시 10만여 명에 불과해 90만 명 정도가 사는 수도 리가와 비교해 봤을 때 그 차이가 엄청나다. 변변한 구시가지도 없고, 크게 내세울 만한 유적지도 없는 곳이라서 관광객도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도시에 대해서는 명성에 비해 크게 볼 것이 없다는 선입견도 많다.

하지만 러시아인 이외에도 라트비아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벨라루스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어우러져 만든, 발트3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색다른 풍경들도 많고, 과거 무역 거점으로서의 영화를 되찾기 위해 국제공항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우가우필스 요새를 휘감고 있는 해자. <사진: 다우가우필스 관광청>

다우가바 강변에 위치한 다우가우필스

다우가우필스라는 이름에는 ‘다우가바 강변의 도시’라는 의미가 있을 만큼, 이 도시는 다우가바강(서드비나강)과 역사를 함께 하고 있다. 수심이 깊으면서도 물결이 잔잔해서 중세 시절부터 대표적인 무역로로 사용되어 왔고 스웨덴 고틀란드섬의 사람들이 다우가바강을 통해 그리스로 갈 수 있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만큼 명성이 높다.

리가를 정복한 리보니아 기사단들(검우기사 수도회)이 이 지역에 성을 건설한 1275년을 도시 역사의 시작으로 삼고 있으며, 당시에는 뒤나부르그(Dünaburg)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때부터 무역 거점으로 발전했지만, 16세기 중엽부터 라트비아 동부의 라트갈레(Latgalė) 지역이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리투아니아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다우가우필스가 속한 라트갈레 지역은 독일 루터교의 영향이 비교적 컸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로마 가톨릭이 번성했고 서부의 표준 라트비아어와 많이 다른, 리투아니아어와 라트비아어의 성격을 모두 보이는 라트갈레어라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회보다 로마 가톨릭 성당이 더 많은, 약간은 기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리가 거리 한가운데 자리잡은 웅장한 로마 가톨릭 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 러시아 인구가 많은 다우가우필스이지만 로마 가톨릭 성당이 더 많다. <사진: 서진석>

1차대전 이후 라트비아가 최초로 독립했을 당시, 라트갈레 지역은 언어적으로 라트비아어에 조금 더 가깝다는 이유로 라트비아와 한배를 타게 되었다. 한때 라트갈레어는 라트비아어의 사투리로 취급되어 많은 관심을 얻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독립적인 언어로 인식되어 라트갈레의 중심도시인 레제크네를 중심으로 하여 라트갈레어 방송, 교육, 편찬사업 등 라트갈레어 부활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우가우필스는 2차 대전을 겪으면서 큰 손실을 입었으나,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답게 철강, 섬유, 식품가공업, 경공업 등 소련 내부의 원자재를 가공하는 공업단지가 집중적으로 건설되면서 소련 내부의 고학력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이주해왔다. 그 결과 한때 러시아인의 수가 이 도시 전체 인구 중 80%에 육박하기도 했다.

소련이 붕괴된 후, 러시아 내륙에서 생산되는 원자재에 의존하는 현지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실업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러시아 유민들의 시민권 취득이나 교육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로 여러 주변 국가들의 투자가 늘어났고, 다우가우필스가 가진 다문화적 특성을 십분 활용한 축제와 문화행사들이 열려 외지인들의 방문이 늘어나자 과거에 가지고 있던 조금은 어두웠던 고정관념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다우가우필스가 자랑하는 볼거리, 다우가우필스 요새 (Daugavpils Cietoksnis)

다우가우필스 요새는 19세기 초 건설 당시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다. 1577년 이반 대제의 명령에 의해서 성곽이 최초로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거듭하였으나, 현재의 모습이 완성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초이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벌 야욕에 불타오르던 1810년 알렉산데르 1세가 ‘러시아 제국의 서부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건설을 명한 요새는, 1812년 나폴레옹 군대가 다우가우필스를 실지로 장악하면서 나폴레옹 군대의 진격을 막고자 했던 초기의 계획을 완전히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1833년 니콜라스 1세 시절에 완공되었다.

요새 내 텅빈 군사시설과 함께 서있는 아파트. <사진: 서진석>

한때 군사시설이었음을 말해주는 무기. 현재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사진: 서진석>

해자, 요새 전체를 휘감는 성벽, 웅장한 모습의 성채, 소방서, 보루 등 당시의 군사시설물과 함께, 요새 안에 살았던 이들을 위한 주거건물, 공공건물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러시아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 서유럽의 침공에 대항하고자 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1940년 소련 붉은군대가 다우가우필스를 점령했을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카테리나 궁전에 있던 호박실을 약탈한 독일군이 급하게 퇴각을 하면서 요새 어딘가에 그 보석들을 숨겨놓았다는 재미있는 전설도 남아 있다.

현재 요새는 다우가우필스 최고의 자랑거리로서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홍보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 지역이 방치되어 있거나 개발 중이다. 특히 소련 시절 밀려드는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내부에 아파트까지 건설되어 일반 시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한때는 위용을 자랑했으나 주인이 사라진 텅 빈 요새 한가운데 서면 사라진 도시 안에서 길을 잃은 느낌마저 든다.

다우가우필스 시내 관광안내소에 미리 신청하면 가이드의 자세한 안내를 받아 관광할 수 있고, 요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으로도 재밋거리를 찾아볼 수 있다. 2005년부터 대단위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공사가 끝나면 라트비아 최대의 볼거리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히 보이는 지역이다. 시내에서 대략 3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전차나 버스를 타면 금방 도착한다.

19세기 후반의 운치있는 건물들이 가득한 다우가우필스 시가지

다우가우필스에는 특별히 구시가지라고 부를 만한 지역이 따로 없지만, 요새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시에톡스냐(Cietokša) 거리와 다우가우필스 중앙역 앞에서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도로인 리가 거리(Rigas iela), 사울레스 거리(Saules iela) 등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에서는 19세기 후반기에 건설된 운치 있는 건물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리가 거리 한가운데 광장에 자리 잡은 통일의 집(Vienibas nams)은 라트비아 공화국 1대 대통령 카를리스 울마니스가 1934년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 시민들의 요청에 화답하여 건설해 준 건물로 유명하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기능주의와 네오-고전주의를 혼합한 양식의 이 건물에는 현재 대규모 공연장, 문화센터, 시립도서관, 관광안내소 등이 입주해 있다.

다우가우필스를 방문하는 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곳은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이다. 1883년 아르누보 양식으로 건설된 건물에 1938년 입주한 이 박물관은, 라트갈레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다우가우필스 도시의 역사와 함께 중세, 근대 시절 이 도시에 살았던 시민들의 생활상, 도시가 낳은 대표적인 예술가인 레오니드 바울린스(Leonids Baulin), 다우가우필스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추상화가로 활동한 마크 로스코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라트비아 동부에서 가장 아름답고 규모가 큰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 <사진: 서진석>

다우가우필스 역사예술박물관 내부 <사진: 서진석>

중앙역에서 시작되어 다우가바강에 이르는 대략 1km의 보행자 전용거리인 리가 거리는 다우가우필스에서 가장 활기차고 화려한 거리이다. 방문객들이 많은 여름이면 크고 작은 축제들이 열리며, 분위기 좋은 식당과 커피숍, 상점들이 즐비해 도시의 분위기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거리이다. 특히 보도블록 사이사이에 박힌 조명은 여름밤의 정취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다우가우필스는 라트비아 전체에서 가장 녹지가 많은 곳으로도 손꼽힌다. 다우가우필스가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마크 로스코, 한때는 사투리에 불과했던 라트갈레어의 위상을 높인 라트비아 최대의 문호 라이니스 , 라트비아 서사문학의 아버지 안드레이스 품푸르스 등 여러 위인들을 주제로 한 크고 작은 광장은 도시를 산책하는 이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가는 길

다우가우필스에는 국제공항이 없으므로 수도 리가를 통해서 들어오는 방법이 가장 편하다. 2011년 현재 하루 네 차례 기차가 운행하고 있으며, 기차에 따라 2시간 50분에서 4시간까지 걸린다. 버스로 이동할 경우 리가에서 거의 매시간 버스가 출발하고, 경유 도시에 따라 3시간 반에서 4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러시아로 이동하는 국제철도노선은 없으나, 유로라인이나 에코라인 등의 버스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카우나스에서는 기차나 버스를 통해서 이동할 수 있다.

타르투(Tartu)는 규모나 인구적으로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로, 수도 탈린(Tallinn)과 함께 여러 가지 중요한 국가 기능을 함께 나누어 수행하고 있는 도시이다. 에스토니아는 물론이거니와 북유럽 전체에서도 최고(最古)의 대학교 중 하나인 타르투 대학교가 위치해 있는 데다가, 교육부, 최고법원, 국가기록원 등을 비롯해 에스토니아 과학단지 등 여러 가지 중요 기관들이 바로 이 도시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명성에 걸맞지 않게 인구수는 고작 10만 명에 불과한 타르투는, 여느 다른 유럽의 대도시들과 비교하면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10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에스토니아 전체의 인구가 130만에 불과하고, 그 중 3분의 1인 40만 명이 수도 탈린에 거주한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타르투 시청광장의 모습.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는 엄밀히 말해서 발트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타르투라는 도시명칭이 등장한 최초의 기록이 1030년에 나타나기 때문인데, 이는 탈린보다 200년이나 앞선다. 이외에도 타르투는 탈린이 갖지 못한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1583년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에 의해 잠시 지배를 받았던 일과 1219년 덴마크가 탈린 건설을 시작했을 당시 타르투는 남쪽 라트비아와 함께 독일 지배 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1583년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을 다스리고 있던 폴란드 국왕 스테판 바토리는 이 도시에 현재 타르투 대학교의 전신이 될 예수교 학교를 설립하고, 폴란드에서 국기로 사용되는 백적(白赤)기를 타르투 시에 공식으로 하사하게 된다. 폴란드의 지배는 17세기 초 스웨덴이 에스토니아를 차지하게 되면서 종식되어 불과 몇십 년 지속되지 못했으나, 폴란드 공화국의 국기가 여전히 타르투 시기(市旗)의 배경으로 사용될 만큼 그 영향은 대단하다.

타르투 대학교의 건설을 명한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동상.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의 심장이자 에스토니아 문화, 역사의 중심지인 타르투 대학교의 겨울 야경. <사진: 타르투 관광청>

무엇보다 타르투가 자랑하는 것은 1632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에 의해 건설된 타르투 대학교이다. 초기에는 인근 지역의 독일 귀족의 자제들만 수학할 수 있었으나, 19세기 제정 러시아에 의해 농노제도가 철회되고 에스토니아인들에게도 입학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면서 타르투 대학교는 에스토니아의 지성과 문화운동을 이끄는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이웃 나라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대학교가 1832년부터 1919년까지 폐교된 이후, 발트 연안의 유일한 대학교가 되어 현재 발트3국의 문화적 역사적 기틀을 만든 이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에스토니아를 넘어 발트3국 전체의 민족운동을 이끈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이곳 타르투를 북방의 아테네라고 불러마지 않는다.


이런 배경에서 타르투에서는 에스토니아 최초의 근대식 대극장인 ‘바네무이네(Vanemuine ) 대극장’이 건설되었으며, 최초의 학술인 모임, 최초의 예술인 협회 등이 생겼다. 1869년에는 에스토니아의 대표적인 문화브랜드인 ‘노래대전’이 시작되어 발트3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이런 이유들을 비추어 볼 때 타르투 시민들은 탈린에 대해 적지 않은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듯하다. 그동안 국제공항을 제외하고는 수도에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자랑하던 타르투 시민들은 타르투 공항에서 2009년부터 스웨덴 스톡홀름과 라트비아 리가로의 취항을 시작하자, 그 자괴감도 누그러뜨리고 진정한 국제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타르투의 시가지 풍경. 에마 강의 아늑한 풍경은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구시청사 건물은 현재까지도 공식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탈린과 비교하여 타르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은 단지 문화적이나 역사적인 배경뿐 아니라, 도시 한가운데에 흐르고 있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라는 의미의 ‘에마 강’(에스토니아어로 Emajõgi, 에마외기 강)이라 불리는 이 물줄기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시인인 리디아 코이둘라(Lydia Koidula)의 시에 한 많은 에스토니아 민중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타르투의 볼거리

타르투는 한국인들이 그리 많이 찾는 여행지는 아니지만, 인근 지역에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고 국제회의 등이 수시로 열려서 외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값이나 숙박비용은 탈린 못지않다.

타르투에서 관광객들의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18세기에 지어진 타르투 시청과 시청광장이다. 전체적으로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합된 이 건물은 현재도 공식 시청 건물로 사용되고 있으며, 자갈돌 사이사이로 알록달록한 빛깔의 조명이 설치되어 밤이 되면 환상적인 야경을 만들어내는 광장은 노천카페와 식당으로 즐비하다. 타르투 거주 인구 중 10분의 1이 대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타르투 노천광장은 젊음과 햇살을 즐기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이런 타르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청광장 한가운데 놓인 ‘키스하는 학생(Suudlevad tudengid)’동상이다. 1998년 제막되어 대학도시라는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이 동상은 주변의 분수와 어우러져 가장 타르투다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명소이다.

키스하는 학생상이 없는 타르투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타르투 대학교가 배출한 세계 최고의 석학 중 하나인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 기념 분수. 타르투 대학교 도서관 앞에 설치되어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시청 뒤편에 자리 잡은 그리스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시키는 백색의 건물은 바로 타르투 대학교 본관이다. 강의가 열리는 강의동은 도시 전체에 흩어져 있으나 대학교의 가장 중요한 기관들은 바로 이곳에 집결되어 있다. 대학교를 보고 섰을 때 왼편에 보이는 건물 옆면에는 현재 타르투 대학교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스토니아 대표 지성인들의 얼굴로 장식되어 있어 인상적이다.

에스토니아 문화의 대표인물들을 제외하고도 190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빌헬름 오스트발트 (Wilhelm Ostwald), 천문학의 대가 슈트루베 (Struve), 기호학의 아버지 유리 로트만 (Yuri Lotman), 발생학의 아버지 카를 베어(Karl Ernst von Baer) 등 세계 인문학과 자연과학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중세 대학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타르투 대학교 맨 꼭대기에는 과거 학생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대학감옥이 위치해 있다. 화재 이후 상당 부분이 훼손되긴 했지만, 중세시절 여러 가지 이유로 수감(?)되었던 학생들이 남겨놓은 낙서들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대학감옥에 입장하려면 대학교 본관 내 정보센터에 문의하면 된다.

한때 발트3국 최대의 규모였으나 지금은 폐허로 남은 대성당. 한쪽 면에는 타르투 대학교 역사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진: 타르투 관광청>

7월에 열리는, 중세시절 생활을 재현하는 한자(Hansa)축제는 언제나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사진: 서진석>

탈린에 톰페아 언덕(Toompea Hill)이 있다면 타르투에는 토메매기(Toomemägi)라는 언덕이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 위에는 타르투 대학교와 관련된 여러 위인들의 동상과 기념비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한때 발트3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알려진 타르투 대성당(Tartu Cathedral) 건물이다. 12세기에 완성된 이래 수백 년에 걸친 전쟁의 결과로 끝내 폐허가 되어버린 이 대성당은 한쪽 부분만이 복원되어 현재 타르투 대학교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사의 다리 <사진: 서진석>

악마의 다리 <사진: 서진석>

타르투 대성당 주변으로는 인상적인 교각이 두 개 남아 있는데, ‘천사의 다리(Inglisild)’와 ‘악마의 다리(kuradisild)’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천사의 다리는 주변 공원의 모습이 ‘영국식’이라는 의미로 ‘영국식 다리’로 이름이 붙여졌으나, 에스토니아어로 영국이라는 단어와 천사라는 단어의 음가(音價)가 비슷하여 자연스럽게 ‘천사의 다리(Inglisild)’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천사의 다리에 서서 대성당 쪽을 보았을 때 보이는 회색톤의 석조교각은 ‘악마의 다리’이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정확히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이 다리가 만들어질 당시 제정러시아의 지배가 시작되었다는 설, 다리를 설계한 독일인 성(姓)의 의미가 ‘악마’라는 설, 여러 가지가 있으나, 아무래도 마주 보고 서 있는 ‘천사의 다리’를 의식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타르투 출신의 문학가 에두아르드 빌데(Eduard Wilde)와 아일랜드의 오스카 와일드(Oskar Wilde)의 동상. <사진: 타르투 관광청>

윌로 으운이 제작한 ‘아빠와 아들’ 동상. 작가와 아들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냈다. 아빠와 키가 똑같은 아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진: 서진석>

타르투 시내의 또 다른 볼거리는 거리 곳곳에 술래잡기하듯 숨어있는 다양한 조각상과 벽화들이다. 위에 설명한 ‘키스하는 학생상’도 유명하지만 윌로 으운(Ülo Õun)이 제작한 ‘아빠와 아들’, 그리고 타르투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한 아일랜드 펍인 ‘빌데(Wilde) 펍’ 아래 만들어진 ‘에두아르드 빌데(Eduard Wilde)’와 ‘오스카 와일드(Oskar Wilde)'동상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이 두 작가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단지 성의 철자가 같다는 이유로 이곳에 마주 앉아 있다. 이 동상은 오스카 와일드의 고향인 아일랜드 골웨이에도 조성되어 있다.

대학교 주변으로 펼쳐져 있는 아기자기한 가게와 갤러리들, 여름이면 매일 펼쳐지는 다양한 축제 등을 제대로 즐기려면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도시에 머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는 길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스웨덴스톡홀름에서 직항로가 운영되고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연결은 그다지 쉽지 않다. 수도 탈린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2시간 반이면 타르투에 도달한다. 그 외 유로라인( Euroline)이나 에코라인(Ecoline) 등 유럽 국제버스를 이용하면 유럽 대도시에서 연결이 아주 수월하며, 리가에서는 버스로 대략 4시간 반이 걸린다. 철도는 탈린과 몇몇 지방도시를 연결하는 노선이 있을 뿐, 국제노선은 전무하다.

스톡홀름 카드와 지상에서 가장 긴 아트 갤러리

"스웨덴에서 가장 좋은 게 무엇이었나요?" 많은 여행자들이 이렇게 답한다. "스톡홀름 카드요." 지하철과 버스, 섬들을 오가는 페리, 자전거 투어는 물론 80군데 주요 관광지의 할인 혜택까지 하나의 카드로 해결할 수 있다. 물론 무척이나 경제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러나 여행의 수단에 불과한 교통 카드를 '가장 좋았다'는 목적으로 탈바꿈시키다니. 그야말로 '스톡홀름답다'.


이 카드는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아트 갤러리'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해준다. 스톡홀름에 있는 90개의 지하철 역사들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처럼 치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벽과 천장 자체를 동굴처럼 불규칙하고 자연스럽게 마감한 뒤에 페인팅, 모자이크, 조명, 조각 기둥들을 덧붙여 놓았다. 대학(Universitetet) 역에는 생물 분류학으로 유명한 칼 폰 린네의 업적을 기리는 장식물을 새겨두는 등 지역적 특성도 잘 살리고 있다. 갤러리답게 중앙역(T-Centralen station)에서 출발하는 가이드 투어도 있다. 화요일은 블루, 목요일은 그린, 토요일은 레드라인을 따라간다.


스톡홀름 지하철 역사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아트 갤러리'라 불린다.

항해사의 대 망신을 큰 자랑으로 만들다 - 바사 호 박물관

전함 바사 호, 17세기 선박의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


1625년 구스타프 2세 치하의 스웨덴 왕국은 해양 강국의 면모를 뽐내기 위해 전함 바사(Vasa) 호를 건조한다. 당대 최고의 과학과 예술의 집합체로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출항한 배, 그러나 처녀항해를 떠난 선박은 2Km도 못 가서 균형을 잃고 침몰하고 만다. 과시용으로 너무 많은 포를 실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서라고도 하고, 구스타프 국왕이 정치적 이유로 너무 급히 배를 완성시키라고 지시한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세계 해양사에 길이 남을 대망신을 당한 셈이다.


그로부터 300년이 흘렀다. 해양 고고학자들은 1956년 스웨덴 항구 바로 바깥에서 바사 호를 발견해 5년에 걸친 작업 끝에 인양한다. 놀랍게도 선체는 17세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스톡홀름 사람들은 선조들의 부끄러운 실패를 끌고 와 멋진 박물관으로 변모시켰다. 커다란 돛대를 달고 있는 해안의 박물관 안에는 바사호의 본 모습이 생생히 재현되고 있다.

거대한 선박의 본체, 아름다운 선미의 조각, 선원들의 옷가지와 물품 등과 더불어 당시 선박의 구조와 선원들의 활동을 볼 수 있는 미니어처까지 세심하게 진열되어 있다. '30년 전쟁' 때 발틱 해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 바사 호는 당시에는 적들을 하나도 죽이지 못했지만, 수백 년 뒤에는 세계의 여행객들을 사로잡고 있다.

노벨상 시상식의 수상자는 어떤 기분일까 - 콘서트홀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써라.' 이 격언을 스웨덴 사람처럼 충실히 따르는 경우가 있을까? 냉전 시대 스웨덴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를 오가며 짭짤한 수익을 얻었다. 그래서 박쥐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사회적 환원'이라는 가치를 앞장서 추구해 왔기에 결국 착한 박쥐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해 떼돈을 벌어들이고, 잘못 나온 부고 기사에서 '더러운 상인'이라 불린 노벨 의 변신 역시 그러했다. 그는 유산의 94%를 '노벨상' 설립에 남기고, 인류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들에게 영광의 메달을 건네주도록 했다.

매년 12월 10일 스톡홀름의 콘서트홀에서는 노벨상 시상식이 벌어져 전 세계인의 시선을 한 군데로 모으는데, 그 밖에도 노벨상의 꿈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도시 곳곳에 있다. 시상식이 끝난 뒤 전망 좋은 시청 건물에서 공식 연회가 벌어지는데, 평소에도 이곳 레스토랑(Stadshuskällaren)에서 노벨상 수상자들의 디너 메뉴를 맛볼 수 있다. 구시가에 있는 스웨덴 아카데미 소유의 레스토랑(Den Gyldene Freden)은 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장소로 유명하다. 노벨상의 실물을 보려면 구시가인 감라 스탄(Gamla Stan)에 있는 노벨 박물관을 찾아가면 된다.


1918년의 노벨상 증서. 노벨상에 쏟아진 초기의 관심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상금액 때문이기도 했다.

말괄량이 삐삐의 친구가 되고 싶다면 - 주니바켄

[삐삐 롱스타킹]은 잉거 닐슨 주연의 TV 시리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벨 할아버지가 세상에 유용한 사람을 뽑아 추켜세운다면, 세상에 절대 무용한 일들을 벌여놓고 으스대는 소녀가 있다. 바로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이 1945년에 선보인 [삐삐 롱 스타킹]이다.

항상 괴상한 패션에 장난기로 가득 차 있는 소녀,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친구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소녀. 삐삐는 어쩌면 "인내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말하는 스톡홀름 인들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광기를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스톡홀름에서 삐삐를 만나려면 듀르가르덴(Djurgarden) 섬으로 달려가면 된다. 여기에 있는 어린이 박물관 주니바켄(Junibacken)은 우리를 [보물섬] [정글북]과 같은 동화 속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린드그렌의 작품 세계가 재현되고 있다. 건물 바깥에는 린드그렌의 동상이 서 있고, 그녀를 기념하는 영구 전시물이 갤러리에 가득하다. 아이들은 이야기책 기차를 타고 린드그렌 월드를 탐험해 볼 수 있다.

아바와 스웨디시 팝의 향연 - 그뢰나 룬트

듀르가르덴 섬은 마치 보물섬처럼 곳곳에 신나는 재미를 감춰두고 있다. 놀이공원인 티볼리 그뢰나 룬트(Tivoli Gröna Lund) 역시 빼놓을 수 없는데,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스톡홀름의 상징으로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 1883년에 세워진 이 공원은 특이하게도 당시의 거주지와 상업 건축물들을 부수지 않고 그것을 감싸 안은 채 여러 놀이기구들을 채워 넣었다. 19세기에 손으로 만든 회전 돼지가 아직도 아이들을 태운 채 돌고 있는데, 스톡홀름 사람들의 알뜰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놀이공원은 여름철의 콘서트로도 유명하다. 밥 말리, 비비 킹, 지미 헨드릭스에서부터 최근의 레이디 가가까지 멋진 리스트가 이어져왔다. 그중에서도 공원의 공식 홈페이지가 가장 위에 올려놓은 역사적 공연은 무엇일까? 바로 이 도시가 낳은 세계적인 팝 그룹 '아바(ABBA)'의 1975년 콘서트다. 아바는 1974년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를 통해 큰 주목을 받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유럽 투어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절치부심 끝에 시작한 이듬해의 스웨덴-핀란드 투어에서 본격적인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곳 그뢰나 룬트의 공연에서 정점을 찍었다.


아바가 그뢰나 룬트에서 공연했던 1975년의 앨범 [ABBA]. 팬들은 '리무진 앨범'이라고도 부른다.

아바, 에이스 오브 베이스, 카디건스 등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스웨덴 팝 밴드는 하나둘이 아니다. 그 성공의 원인은 뭘까?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 흥겹고도 단순한 리듬, 복고풍의 아기자기한 정서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그들이 영어로 노래한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도 매우 쉬운 영어로. 이것 역시 스웨덴식 실용주의라 할 수 있는데, 덕분에 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는 최대의 팝 수출국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최근 뮤지컬 [맘마미아] 등을 통해 아바가 새롭게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곳 공원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아바 더 뮤지엄(ABBA the Museum)'이 건설되고 있다고 한다.

북유럽 디자인의 작은 보물들을 만난다 - 갤러리 파스칼

전후 스웨덴 디자인의 대표자인 스티그 린드버그(Stig Lindberg, 오른쪽). 세라믹, 유리, 텍스타일 등에서 탁월한 제품들을 만들어냈다.


꾸미지 않은 듯 꾸민다. 생활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만지게 한다.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식을 줄을 모른다. 이 도시는 스톡홀름 퍼니처 페어(가구), 노던 라이트 페어(조명), 스톡홀름 패션 위크(패션) 등은 북유럽 디자인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꾸준히 제공한다. '디자인하우스 스톡홀름', '이케아' 등 스웨덴 산 디자인 제품을 구경할 수 있는 숍들도 곳곳에 있다.


갤러리 파스칼(gallerypascale.com)은 스웨덴-프랑스 혈통의 여성인 파스칼 코타드-올슨(Pascal Cottard-Olsson)의 콜렉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작은 갤러리 겸 숍이다. 가구, 패션, 조명, 일러스트레이션 등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전시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초록색이 가장 강하다 - 로얄 내셔널 시티 파크

디자인을 사랑하는 시민들인 만큼 도시는 온갖 색들로 반짝인다. 그렇다면 이 도시에서 가장 빛나는 색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린. 최근 유로연합은 도시 환경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고자 매년 한 도시씩 유럽의 녹색 수도(European Green Capital)로 선정하기 시작했는데, 2010년 그 첫 번째 우승자가 바로 스톡홀름이다. 과감한 교통 정책으로 출근자의 80%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되었고, 지난 10년간 자전거 이용자는 130%나 증가했다고 한다. 특히나 획기적인 쓰레기 배출 프로세스 등을 통해 탄소 배출을 급속히 줄이고 있는데, 2050년에는 탄소 배출을 완전히 없앤다는 계획이다.


거주민의 95%가 300미터 이내에 '진짜' 녹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큰 자랑이다. 듀르가르덴의 동쪽 녹지대를 포함한 로열 내셔널 시티 파크(Royal National City Park)는 시 공원으로는 세계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시 구역 안에 7개의 자연보호구역이 있고, 시내에서 30분만 나가면 무스와 순록을 볼 수 있는 사파리 투어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감라 스탄(Gamla Stan) 지구의 '건물 지붕 트레킹 투어' 등 도심 속에서 야생을 즐기고자 하는 상상력도 기발하다.


스톡홀름은 2010년 유로피언 그린 캐피털의 첫 번째 도시로 선정되었다.

스웨덴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바로 풍요로움이다. 북유럽 지역 국가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지녔고, 경제력과 사회복지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풍요로움을 진정 즐길 줄 아는 자부심 강한 국민들. 이 모든 것이 모여 스웨덴을 형성한다. 그 중에서도 예테보리는 높은 시민의식이 도시 전반에 깔려 있는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스웨덴 제2의 도시로 불리고 있다.

수출항 도시 예테보리-예테보리는 무역이 발달된 항구도시이다.



쇼핑과 예술이 넘치는 활기찬 거리

예테보리는 스웨덴의 서쪽 관문이자 인구 약 45만 명의 수출항 도시이다. ‘북방의 사자’로 불리는 구스타프 아돌프 2세에 의해 17세기 초 시의 기초가 확립된 이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활기찬 곳이다. 예테보리는 위치상 북해와 발트해를 마주한 항구도시로, 오래 전부터 상공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해온 곳이다. 북게르만족인 고트족이 살고 있어, 고텐부르크(고트인들의 성이란 뜻)라고도 하며, 위치상으로는 덴마크의 북단과 마주 보고 있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고속열차를 타면, 3시간여 만에 예테보리에 다다를 수 있다. 열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다양한 색의 풍경들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 북유럽만이 가진 특유의 자연 경관은 기차여행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는 예테보리 중앙역을 나오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쇼핑몰 ‘노르드스탄(Nordstan)'을 보게 된다. 직접 만들어 파는 수공예 제품부터 시작해 브랜드 명품, 다양한 먹을거리, 빈티지한 보세 상점까지, 눈을 자극하는 오색찬란한 즐거움이 가득한 쇼핑몰이다. 하지만 여행 시작부터 쇼핑의 유혹에 빠질 수는 없는 법, 서둘러 쇼핑센터를 지나면 시청이 나오며, 시청 광장에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시청의 옆쪽에는 스토라 함 운하가 흐르고 있다. 노르드스탄 쇼핑센터에서부터 직선도로를 따라 예테보리 시내의 중심 거리 쿵스포트아베뉜(Kungsportsavenyn)를 걷다보면, 남쪽 끝에서 예타 광장(Gotaplatsen)에 도착한다.

예테보리 문화의 중심인 이곳은 예술의 광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도 훌륭한 작품들과 건물들이 광장 곳곳에 들어서 있다. 특히 광장 중앙에 있는 포세이돈 동상이 세워진 조각분수는 스웨덴이 자랑하는 조각가 카를 밀레스(Carl Milles)의 작품으로 예테보리의 대표적 조각분수다. 분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는 시립극장과 미술관, 콘서트 홀, 도서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대관람차와 오페라하우스-오페라하우스(우측)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공연이 펼쳐 진다.

포세이돈 동상-스웨덴 조각가 카를 밀레스의 작품으로 조각분수와 함께 만들어졌다.



립스틱(?) 바른 건물에서 도시를 조망하다

예타 광장에서 아베뉜거리를 따라 서쪽으로 죽 내려가면 강 하구에 이르는 릴라 봄멘(Lilla Bommen)에 다다른다. 이곳에 있는 예테보리 오페라하우스는 1989년 새 오페라하우스를 짓기로 결정을 한 이후 1994년 10월에 완공됐다. 유선형의 기초 위에 세워진 배 모양의 건물인 오페라 하우스는 현재 세계수준급의 공연장으로 명성을 얻고 있으며, 오페라와 뮤지컬, 발레 공연 등이 상영된다. 특히 무대 위에 있는 전광판에는 자막이 곁들여져 내용을 알기 쉽지만, 앞 쪽 좌석에 앉으면 무대와 전광판을 번갈아 보기가 불편할 정도로 공연장 규모가 큰 편이다.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 높게 솟아 있는 오피스 건물은 붉은 포인트로 인해 ‘립스틱’이라는 귀여운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22층은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가운데에는 지상에서 86m 높이의 전망대가 있어 항구와 근처 섬들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립스틱에서 보는 전망도 멋지지만, 바로 옆에 있는 대관람차 안에서 여유 있게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관광객들도 비교적 적기 때문에, 북적북적한 것보다 훨씬 여유로운 여행을 만끽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예테보리가 좀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데에는 다른 여행지에 비해 비교적 낮은 물가에 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바이킹호를 가장(?)한 호텔 레스토랑에 식사를 할 때에도 저렴한 가격에 맛좋은 예테보리만의 요리를 맛 볼 수 있다. 유유자적하게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분위기 좋고 맛있는 식사까지 했는데, 강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파단이라고 불리는 선착장에 이르면, 유람선을 타고 강물을 따라 운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대관람차-강가와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사색을 즐기며, 시민의식을 생각해 보다

이제 놀이문화를 즐겨 볼 차례인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리세베리 놀이 공원이다. 공원 내에는 젊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지만, 생각보다는 놀이기구가 많지 않다. 하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은 사색하며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볼 수 있다. 걷다 보면 보게 되는 카를 밀레스 등의 조각가들이 만든 다양한 작품들도 산책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자연 속에서 홀로 거니는 사색이 좀 더 필요하다면, 예테보리 원예협회공원(Tradgardenforeningen)을 방문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곳원은 19세기 중반 성벽 내의 주거공간이 혼잡해짐에 따라 조경사와 건축가들이 모여 시민들의 휴식처로 만들었다고 한다. 공원 내에는 아름다운 영국식 정원에 온실, 장미원, 나비관 등과 조각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어, 자연을 걷는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

다시 운하로 돌아와 예테보리만의 강 내음을 맡는다. 예태보리 여행 중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감 넘쳐 보이는 시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훌륭한 도시를 만드는 것은 시민의 몫일까. 아니면, 도시를 이끄는 사람들의 몫일까.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답 없는 질문에 고개를 내젓는다. 결국 양쪽 모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예테보리는 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문화와 예술이 도시 전체에 펼쳐져 있는 풍요로운 도시 안에서 자부심 넘치는 높은 시민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가는 길
현재 우리나라에서 스웨덴까지의 직항편은 없기 때문에, 보통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도시를 경유한 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도착한다. 스톡홀름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3시간 정도면 예테보리 중앙역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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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더욱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스톡홀름

누구나 여행을 꿈꾼다.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수많은 고민이 따르기 마련이다. 오랜 심사숙고 끝에 큰마음 먹고 여행을 결심했다면 과감히 내지르자. 

어렵사리 결정한 여행 계획 앞에 그럭저럭 흐지부지 만만한 여행지는 내키지 않을 터. 이왕 여행을 결심했다면 평소 닿기 힘들었던 북유럽으로 가보면 어떨까. 천혜의 자연과 이국적인 문화, 몇 장의 사진으로만 접했던 눈부신 문화유산까지, 마음을 홀리는 명소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북유럽 여행은 상상 이상의 감동을 선사한다. 

낯선 만큼 신비롭다. 북유럽은 아직 국내 여행객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스웨덴은 북부 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 남북으로 위치한 곳으로 보다 풍부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스웨덴의 수도이자 '북유럽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을 가진 스톡홀름은 한번쯤 들러볼 만한 관광명소로 꼽힌다. 한여름에도 기온은 20도를 밑돌며 연간 강수량이 500㎜ 수준을 유지해 언제 찾아도 즐거운 여정이 기대된다. 

스톡홀름에서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은 스톡홀름 옛 시가지. 일명 '감라스탄'으로 불리는 이곳은 스웨덴의 옛 모습이 자아내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고딕양식과 바로크, 로코코 등 다채로운 건축 양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축물들과 옛 건물 그대로를 간직한 레스토랑, 카페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세풍 분위기를 즐기려면 골목투어를 빼놓을 수 없다. 고즈넉한 풍광과 어딘가 낡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분위기를 간직한 골목투어는 여행객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이곳은 13세기 형성되어 오늘날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기까지 오랜 과정을 거쳤다. 

감라스탄을 둘러보다 보면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풍광이 있다. 바로 중세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대광장. 노벨 박물관과 도서관, 증권거래소 등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을 장식하는 중요 명소들이 자리해 여행의 맛을 더한다. 

감라스탄에서 놓칠수 없는 볼거리 중 하나는 대성당과 왕궁이다. 13세기에 모습을 드러낸 대성당은 스톡홀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왕실의 주요 행사가 열렸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또한 고딕·바로크 양식이 집약된 웅장한 건축물로 내부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섬세한 천장 벽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VIP여행사(02-757-0040)에서 '북유럽+발틱 3국' 상품을 판매한다. 핀에어 항공을 이용해 출발하며 전 일정 일급호텔에서 머문다. 특히 스웨덴 스톡홀름 옛 시가지 내 호텔 숙박으로 특별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헬싱키~오슬로, 베르겐~스톡홀름, 스톡홀름~빌니우스 구간은 항공으로 이동한다. 

또한 지역별 다양한 특식과 한식이 제공되며 노옵션 행사 상품으로 달러북을 증정한다. 왕복항공료, 유류할증료 및 택스, 호텔, 식사, 입장료 등을 포함한 요금은 459만원이다. 

[한송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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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거리를 거닐다 보면 자연스럽게 카메라부터 꺼내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DESIGN STOCKHOLMSweden

안데르센의 동화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디자인의 건물과 공기에서 느껴지는 자유분방한 거리 풍경, 북유럽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주는 인테리어. 스톡홀름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카메라부터 꺼내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3만 개가 넘는 섬으로 이뤄진 도시는 긴 겨울을 보내고 4월부터 서서히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4월을 절정으로 보면 된다. 특히 4월 마지막 날에는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 Night)’이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고대 마녀들이 봄이 오길 기다리면서 춤과 모닥불, 불꽃놀이가 어우러진 향연을 펼치는 스톡홀름 최대의 페스티벌이다.

MUSEUMS16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스웨덴 가구들을 전시하는노르디스카 박물관(Nordiska Museet, Djurgardsvagen 6-16, 115 93). 피카소와 달리, 마티스의 작품을 전시하는현대미술관 (Moderna Museet Malmo, Exercisplan 4, 111 49, modernamuseet.se), 스웨덴 유일의 도자기 팩토리인구스타브스베르그 포슬린파브릭 (Gustavsbergs Porslinsfabrik, Chamottevagen 2, 134-40)등이 유명하다.

MISS CLARA한 여학교 교장이었던 ‘클라라 스트롬 버그(Clara Stromberg)’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92개의 객실을 갖춘 디자인 호텔로 아르누보 스타일이다.

addSveavagen 48, 113 34

THE ROYAL OPERA HOUSE스웨덴 왕립오페라는 무려 2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데, 백스테이지 투어와 다양한 공연들을 감상할 수 있다.addGustav Adolfs Torg, 103 22

SANDHAMN SEGLAR산드함 지역에 위치한 4성급 호텔로, 항구 가까이에 있어, 요트를 즐기기에 좋다.addSandhamn Seglarhotell AB, PO Box 124, Sandhamn, 130 39

BETONGGRUVAN‘콘트리트 광산’이라는 뜻의 디자인 숍.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홈 제품들을 직접 만들어 판매한다.

addSveavagen 133, 113 46

OAXEN KROG & SLIP유르고르덴 섬에 있는 바다 테마의 트윈 레스토랑. <미슐랭 가이드>에서 스타를 받은 다이닝 레스토랑 ‘옥슨 크록’과 캐주얼한 비스트로 ‘슬립’이 건물 안에 나란히 자리한다. 옥슨 크록은 바닷가재가 주메뉴이고 슬립에서는 진저를 곁들여 구운 돼지 옆구리 살 요리를 즐길 수 있다.addBeckholmsvagen 26, 115 21

GAMLA STAN감라스탄은 스톡홀름의 구시가지다. 16세기의 오랜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네덜란드 풍 바로크 건축물은 멀리서 봐도 장관이다.

고향 생각마저 마비시키는 땅… 동유럽의 서정적 공기를 호흡하다

리투아니아 남부 드루스키닌케이의 구르타스 공원.
리투아니아 남부 드루스키닌케이의 구르타스 공원. 과거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점령된 당시 설치된 유적을 모아 전시했다. 레닌·스탈린·칼 마르크스 등 공산주의 지도자와 사상가의 조각상도 있다. /사진 작가=한민국
최근 나는 동유럽의 리투아니아라는 나라에 다녀왔다. 인구가 200만이 안 되는 발트해의 작은 나라. 계기는 이 나라에서 매년 가을 열리는 '드루스키닌케이 시축제'에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드루스키닌케이(Druskininkai)는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에서 3시간 정도 버스를 이용해서 가야 하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이 시골마을은 우리나라의 제주도처럼 요양지나 휴양지의 공간으로 인식되기도 하며 은퇴하거나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노인들이 산책하기에 좋은 평온한 도시이다. 실제로 이곳엔 온천이나 스파(SPA)를 테마로 하는 공간들이 꽤 있다. 1·2차 세계대전의 적전지를 공원화한 '드루스키닌케이 구르타스 공원'은 이곳의 필수코스. 동유럽산 동물과 마르크스의 석상 등이 보존된 곳이기도 하다. 그곳의 가을은 고엽이 된 포플러나무들 이파리들이 우주공간에서 우수수 떨어진 것처럼 가득하다. 도무지 사건이라고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평온하고 온유한 공기의 질감은 여행자의 불안과 여독과 귀소본능을 잠시 마비시킬 정도이다.

하지만 이 드루스키닌케이가 세계에 알려진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드루스키닌케이 시축제'이다. 이 축제는 이미 세계적으로도 독창적인 시 페스티벌로 알려진 축제 중 하나. 이 시축제는 며칠간 세계의 시인들을 초청하고 동유럽에서 휴양온 사람들이 어울려 24시간 내내 조그마한 카페에 모여 술을 마시며 자신이 써온 시를 돌아가며 낭독한다. 소박하면서도 정취가 있는 클래식한 느낌이다. 물론 드루스키닌케이의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 사람들을 하나로 만든다. 동유럽이라는 국가에서 사람들에게 시의 존재는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혹자들은 시가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은 여전히 동유럽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자본의 논리에 맞서 아직 시의 뜨거운 노래들과 정신이 사람들의 내면에 표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사회주의와 유혈혁명을 지나간 자리에 쓰러진 술병들과 수많은 형식의 시들이 민중의 삶 속에서 공존하며 '노래하는 혁명의 땅'으로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피스 공화국 광장.
우주피스 공화국 광장.
내가 이 드문 도시 축제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축제를 처음 기획하고 현재까지 전 세계의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을 직접 초청한 코르넬류스라는 한 시인의 초청을 통해서였다.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문화부장관을 역임했고 대내외적으로 리투아니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인정받는 시인이다. 나는 그를 소설가 하일지 선생으로부터 몇 년 전 처음 소개받았는데, 한국에 그의 작품을 소개하거나 한국방문 때 낭독회를 직접 연출했던 인연이 몇 번 있었다. 한국 문단은 동유럽작가들의 문학세계, 그중에서도 리투아니아의 문학에 대해서는 거의 전무라 할 만큼 생소하다. 때문에 나는 그의 깊이 있는 시적 성찰과 서정적인 작품들이 갖는 신화와 은유의 세계를 한국의 독자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초청한 것이다. 조금 색다른 동유럽의 가을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평온과 시의 뜨거운 노스탤지어가 남아 있는 리투아니아로 한 번 날아가 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곤 한다.


여행수첩

많은 사람에게 리투아니아라는 나라는 생소하다. 어디 쪽에 붙어 있는 나라지? 하는 물음부터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도 생소하다. 농담삼아 '음악감독을 하는 박칼린씨 정도의 엄마가 리투아니아인이야'라고 하면 그땐 좀 호기심을 보인다. 소설가 하일지의 '우주피스 공화국'의 실제 모델인 도시가 빌뉴스이며 이문열의 소설 '리투아니아의 연인'에도 이 도시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곳으로 묘사된다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경청하기 시작한다. 리투아니아는 90년대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가 있으며 모국어에 대한 자존감이 강하다. 하지만 리투아니아가 하나의 독립국가로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90년대 초반이다. 흔히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리투아니아의 자매들이라 비유되는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와 함께 이 세 나라는 발트3국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중에 리투아나아의 수도인 빌뉴스는 발트3국의 문화적 교육적 중심지로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오래전부터 이 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동유럽의 파리라고 부를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이며 예술공동체 마을인 '우주피스 공화국'이 실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내 중심의 서점 'MINT VINETU' 카페 'CAFE DE PARI'는 리투아니아 지성의 산실이다. 빌뉴스 대학생들이 모여 토론과 춤과 문화를 즐기는 곳이다. 이 카페에는 발트해 연안에서 잡아올린 굴 요리가 주 메뉴이며 만원 정도의 가격이면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은 후 '빌뉴스 현대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동유럽 예술가들의 모던한 설치예술이나 회화들을 감상해 보는 것도 빼놓지 말 것.

그리고 빌뉴스에는 실제로 우주피스 공화국(무료 입장)이 있다. 우주피스 공화국은 리투아니아어로 강 건넛마을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유럽의 예술독립가들이 자급자족하면서 창작하며 사는 공동체 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그중에서도 마을 입구의 '우주피스'라는 카페는 꼭 한번 권하고 싶다. 이 카페에서는 매년 각종 전시, 공연이 가득하다. 리투아니아 정부에서는 이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독립기념일인 4월 1일에는 축하사절단을 보내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소설가 하일지씨가 주한 우주피스 공화국 대사로 임명받아 현재 활동 중이라는 점. 당신도 동유럽에 가서 한 번쯤 우주피스 공화국의 시민이 되어보길 기대한다.

시내 중심의 '콩그레스 호텔(CONGRESS HOTEL·하루 40달러 정도)'은 특유의 중세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발트 3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과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나라, 세계 무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농구팀을 가진 나라, 리투아니아(Lithuania). 여러 명망 있는 작가들이 리투아니아에 대한 소설을 집필하고 최근 들어 각종 여행 프로그램에서 조금씩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리투아니아는 아직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사실 리투아니아의 독립은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소련의 붕괴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고, 농구는 조금 유명한 게 아니라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처럼 알면 알수록 흥미와 궁금증을 더욱 유발시킬 만큼 재미있는 나라,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에는 대체 어떤 모습이 담겨 있을까.

오나 성당과 바로 그 뒤에 위치한 프란체스코 성회의 일파인 버나딘(Bernadine) 수도사들이 건축한 버나딘 성당이 만드는 그림 같은 풍경. 이 성당 근처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폴란드의 문호 아담 미츠키에비치의 동상이 보인다. <사진: 서진석>

빌뉴스를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들은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향기가 나는 도시”라고 부르곤 한다. 붉은 벽돌로 휘감긴 고풍스러운 바로크 양식들이 주를 이루는 빌뉴스의 구시가지 전체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고,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주변 국가들의 문화적 중심지로 활약하던 중세 시대부터 이어진 역사의 숨결이 골목마다 남아 있다.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Mickiewicz), 체스와프 미워시(Czesław Miłosz), 율리우스 스워바츠키(Juliusz Słowacki) 같은 주변 국가의 유명한 문호들도 인생의 꽤 큰 부분을 이 작은 도시에서 보내며 문학적 영감을 키워왔다. 그런 역사의 흔적은, 6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도시 구석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이끼가 뿜어내는 은은한 향기로 산화하여 관광객들과 호흡한다.

빌뉴스 구시가지의 풍경 <사진: 서진석>

동유럽 지성의 산실 빌뉴스 대학교

그런 고풍스러운 향기를 감상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은 동유럽 지성의 산실인 빌뉴스 대학교이다. 1569년 리투아니아 최초의 대학교로 승격된 이래 주변 국가들의 철학가, 문학가, 사상가들을 길러 냈고, 건물 전체가 유물이자 박물관이 되었다. 세계 최고의 인류학자인 마리야 김부티에녜(마리야 김부타스, Marija Gimbutas), 리투아니아의 대표적인 역사가 시모나스 다우칸타스(Simonas Daukantas), 노벨문학상 수상자 체스와프 미워시 등을 길러 내고 프랑스 기호학파의 대부 알기르다스 그레이마스(Algirdas Greimas)가 연구했던 유서 깊은 강의실과 연구실에서는 여전히 리투아니아의 젊은이들이 수학하고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빌뉴스 대학교 내에 위치한 성 요한 성당(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 두 명을 동시에 기념하는 성당). 소련 시절 이 성당은 음악학교로 사용되었다. <사진: 서진석>

빌뉴스 대학교 어문학과 2층 복도에 만들어진 프레스코, 빌뉴스 대학교를 거쳐간 문학가들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사진: 서진석>

독립적인 건물이 캠퍼스 곳곳에 자리 잡은 일반적인 대학교의 모습과 많이 다르게, 이 대학교의 건물들은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 학교를 처음으로 찾은 학생들은 자신의 수업이 진행되는 강의실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을 정도이다. 학생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복도와 강의실 내부, 천장 등은 리투아니아의 역사와 문화, 철학이 담긴 심오한 벽화로 장식되어, 마치 중세시절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구시가지 골목에서의 기분 좋은 길 잃기

리투아니아어로 ‘세나미에스티스(Senamiestis)’라 불리는 구시가지는,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필리에스(Pilies) 거리와 디지요이(Didžioji) 대로를 빼면 대부분의 지역이 거미줄 같은 좁다란 골목길들로 이루어져 있다. 수백 년의 세월을 머금었을 법한 곰팡이들이 붉은 벽돌의 처마 밑에서 향기를 내뿜고 있는 골목의 뒤편에서도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구시가지와 더불어, 요즘 예술인의 마을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빌뉴스의 몽마르트르 ‘우주피스(Užupis) 마을’로 가는 길목인 ‘리테라투(Literatų gatvės)’ 즉 ‘문학인의 거리’는 리투아니아 문학사를 장식했던 유명 작가들을 테마로 한 다채로운 장식들을 골목 곳곳에 심어놓아 무심코 그 길을 지나는 나그네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거리 맨 끝자락에 위치한 문신 스튜디오조차도 리투아니아 문학세계의 한 단면이 되어버린 느낌이 들 정도이다.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 잡은 필리에스 거리.
<사진: 서진석>

문학인의 거리(Literatų Gatvė)에서는 시인 아이다스 마르체나스가 쓴 동명의 시에 영감을 받아 2008년부터 리투아니아 문학과 관련된 전시물들을 게시하고 있다. <사진: 서진석>

서슬 퍼렇던 세계대전 시절,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게토 역시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다. 한때 빌뉴스는 북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2차 대전 전까지 전체 인구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리트박(Litvak)이라고 불렸던 리투아니아계 유대인들은 독일 방언과 히브리어 등 여러 개 언어가 융합되어 생성된 언어인 이디시(Yiddish)를 구사했다. 2차 대전 중 리투아니아에 살던 유대인이 95% 이상 처형되어 현재는 거의 종적을 감추어 버린 지금, 그들이 사용하던 이디시도 사어(死語)가 되어버렸지만 아직 빌뉴스 대학교에는 여전히 이디시 연구와 강의가 진행되고 있어 과거 유대인 연구의 메카가 되고 있다.

구시가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목길로 변화한 유대인 거주지역. <사진: 서진석>

구시가지에 위치했던 게토는 당시 유대인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과거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아기자기한 장식과 가게들과 식당, 호텔 들이 밀집해 있는 아름다운 길로 탈바꿈했다.

기독교 건물의 전시장 빌뉴스

북유럽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빌뉴스 구시가지에는 대략 20개 정도의 성당 건물이 남아 있다. 종교 행위가 금지되었던 소련 시절에는 성당들이 모두 박물관 (심지어 어느 한 성당은 무신론박물관이 되기도 했다), 전시장, 인민학습당 등으로 기능을 바꾸어야 했으나,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리투아니아인들은 독립과 동시에 모든 성당의 기능을 다시 이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라트비아에스토니아의 경우, 대다수의 성당들이 여전히 제 기능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박물관이나 전망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리투아니아인들의 높은 신앙심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지의 입구와도 같은 새벽의 문. 위에 위치한 작은 기도실에는 기적의 성화로 불리는 ‘검은 마리아상’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서진석>

나폴레옹이 손바닥에 얹고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는 찬사를 보낸 것으로 인해 더 유명한 오나 성당. 빌뉴스 구시가지에서 유일한 중세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사진: 서진석>

리투아니아 구시가지 입구에 자리 잡아 성내에 들어오는 여행객들의 안녕을 기원해주었던 작은 기도실인 ‘새벽의 문(Aušros Vartai, Gate of the Dawn)’에는 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바르보라 라드빌라이테(Barbora Radvilaitė)를 흠모한 한 장인이 그녀의 모습을 성모 마리아의 얼굴로 성화시켰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리투아니아 고딕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성 오나 성당(성 안나 성당, Šv. Onos bažnyčia)은 1812년 러시아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빌뉴스를 들른 나폴레옹이 보고 반해 ‘손바닥에 얹고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런 찬사가 무색하게도 성당 내부는 러시아에서 패배를 맛보고 돌아오던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파차스 장군이 봉헌한 베드로 바울 성당. 내부 벽면 전체가 석회와 대리석을 갈아 직접 만든 조각들로 가득하며 리투아니아에서 내부가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손꼽힌다. <사진: 김향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성전을 봉헌하려 했던 파차스 장군의 손길이 남아 있는 ‘성 베드로 바울 성당 (Šv. apaštalų Petro ir Povilo bažnyčia, St. Peter and St. Paul's Church)’은 전체 유럽에서 내부장식이 가장 화려한 성당으로 손꼽히며, 소련 시절 인물화 박물관으로 변질되는 역사의 상처를 입은 빌뉴스 대성당(Vilnius Cathedral)은 여울물 같은 리투아니아의 현대사를 굽어보며 국민들의 상처를 보듬어 안은 성스러운 장소로 승화되었다.

빌뉴스 구시가지 한가운데 자리 잡은 러시아 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 해가 질 무렵 지붕이 빛을 받아 반짝이면서 화려한 광경을 연출한다. 빌뉴스 구시가지에는 러시아 정교회, 로마 가톨릭, 독일 루터교, 유대교 시나고그 등 기독교와 관련된 건축물이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진: 서진석>

리투아니아 대공작이었다가 폴란드에서 왕이 되었던 요가일라(Jogaila, 폴란드어로 야기에워)의 아들이자 성인인 카지미에라스 기념 성당. 160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소련 시절, 종교의 불필요함을 교육시키기 위한 ‘무신론 박물관’이 되기도 했다. <사진: 서진석>


리투아니아의 관광명소, 트라카이

트라카이(트라케이, Trakai)는 엄밀히 말하면 빌뉴스와는 별개의 지역이지만, 거리가 가까워 빌뉴스에 들르는 사람들이 의례적으로 방문하는 관광명소다. 트라카이는 수십 개의 호수가 모여 만드는 장관도 일품이지만, 갈볘(갈베, Galvė) 호수 위 섬에 자리 잡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곽은, 숲의 초록색, 하늘의 파란색, 벽돌의 붉은색, 이렇게 빛의 3원색 속에서 자신의 위용을 뽐내며 리투아니아 사진첩의 표지를 장식한다.

빛의 삼원색 속에 사로잡힌 트라카이 성의 아름다운 모습. <사진: 김향란>

트라카이는 중부에 위치한 케르나볘(케르나베, Kernavė)에 이어 두 번째로, 14세기 초에 빌뉴스로 천도하기 전까지 리투아니아의 수도였던 도시이며, 리투아니아의 중세 역사를 이끌어간 대공작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15세기에 완공된 트라카이 성(Trakų pilis)은, 중세 시절을 다룬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난공불락 요새의 형태를 그대로 담고 있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선교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땅을 탐하던 독일 기사단의 끊임 없는 침략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2010년 올해 정확히 600주년을 맞는,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이 독일기사단들과 대항해 싸운 ‘타넨베르크 전투(리투아니아어로 잘기리스 Žalgiris, 폴란드어로는 그룬발드 Grunwald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전투를 이끈 리투아니아 최후의 대공작 비타우타스(Vytautas)는 트라카이성에서 7일 동안 화려한 연회를 개최했다고 알려져 있다. 리투아니아인들이 가장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인 비타우타스는 바로 이 성에서 생을 마쳤다.

독일기사단들의 침략이 한풀 꺾이고 수도마저 빌뉴스로 옮겨지자 트라카이 성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 이후로 수십 차례의 전쟁을 겪으면서 완전히 폐허가 된 채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갔다. 하지만 20세기 초 트라카이 성 주변에서 다양한 중세 유물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복원과 발굴사업을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이 완성되게 되었다.

트라카이 시내에서 쉽게 만나볼 수 있는, 타타르인들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는 나무집들. <사진: 김향란>

트라카이 성에서 일생을 마감한 비운의 영웅 비타우타스 대공작의 목상. 트라카이 성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다. <사진: 김향란>

현재 트라카이 성 내부에는 비타우타스 대공작을 중심으로 한 대공작들의 삶과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과 중세 시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시 대공작들은 자신들의 개인 호위병으로 삼기 위해서 흑해 크림반도 지역에 살고 있는 터키계 타타르인들을 대량 이주시켰으며, 그 결과 트라카이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그들과 관련된 삶의 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트라카이에서만 먹을 수 있는 키비나스(kibinas)라는 음식과 트라카이 시내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거리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독특한 모양의 나무집들이다. 키비나스는 다진 양고기를 반죽에 넣어 오븐에 구운 음식으로 트라카이 성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별미이다. 중세 시절 타타르인들과 관련된 생활양식들은, 트라카이 성 내부에서 만나볼 수 있다.

가는 길

리투아니아의 관문인 수도 빌뉴스는 생각처럼 멀지만은 않은 곳이다. 핀란드 항공이 서울에 취항을 시작하면서 헬싱키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어 더욱 가까워졌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바로 리투아니아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지만, 유럽을 여행하는 도중 폴란드나 러시아 등을 거쳐 육로로 들어오는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다.

단지 문제는 서유럽과의 기차 연결편이 현재로서는 전무하여 유레일패스 같은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그렇지만 전체 유럽을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국제버스 유로라인(Euroline)이 유럽 각 도시에서 빌뉴스 등 리투아니아의 대도시로 가는 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며, 라이언에어 같은 저가항공도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Kaunas)에 취항을 시작했으므로, 유럽 여행 도중 한 번쯤 방문하기에 좋다.

트라카이는 빌뉴스 버스터미널에서 버스가 수시로 출발하며 거리는 대략 20km 떨어져 있다. 기차로도 이동이 가능하지만 트라카이 시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바로 보이는 이정표를 따라 쭉 올라가면 성에 도달할 수 있다. 3km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지만 주변에 보이는 호수의 풍광들과 타타르인들이 남긴 가옥들을 감상하다 보면 지루하지 않게 올라갈 수 있다.

스웨덴에서 살며 느낀 북유럽의 가치

스웨덴 스코네 지역의 일반적인 농가 주택 및 창고. 스코네랭가라고도 한다.
스웨덴 스코네 지역의 일반적인 농가 주택 및 창고. 스코네랭가라고도 한다. /Conny Fridh/imagebank.sweden.se
북유럽 사람들을 처음에 의심했다. 한국과 미국에서 경험한 40년 넘는 삶과 비교해 너무나 다른,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도덕책 한구석에서 나올 것 같은 그런 이야기를 자신의 소신이라고 이야기하는 북유럽 친구들이 전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스칸디나비아에 갔을 때 단지 디자이너여서가 아니라, 최소한 궁금증을 못 참는 성격을 주신 것에 신에게 감사했다. 우연한 기회에 북유럽을 방문했던 것이 우리 가족을 스웨덴에 붙잡는 계기가 됐다.

디자인 박람회에서 평소 좋아하던 유명 디자이너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넸다. 그는 오히려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는지 놀라워하고 신기해했다. 그게 북유럽이었다. 남을 쉽게 동경하는 마음이라면 스웨덴의 재벌 가문이나 왕실 가족을 쳐다보며 스스로를 비교하겠지만, 그들도 함께 사는 사회의 일원일 뿐 나와 견주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국왕의 모습, 자전거를 타고 일하러 가는 재벌이나 국회의원을 보는 건 이곳에선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큰딸아이와 처음으로 담임선생님을 면담하던 날이었다. 나의 역할은 그 둘의 대화를 지켜보는 '증인'이었다. 선생님은 딸아이에게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지" "무엇이 어려운지" "가장 궁금한 건 무엇인지" 등을 물었다. 내가 끼어들어 대답하려 하자 오히려 "아이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그냥 듣자고만 했다. 여기선 아무도 누가 제일 성적이 좋고, 나쁜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경쟁하는 시상식도 없었다. 아이 성적이 몇 등인지 알고 싶어 하는 내게, 그 궁금증이 결국 우리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했다. 비로소 우리는 아이 능력과 꿈, 행복을 '아이와 함께' 이야기하게 됐다. 경쟁이 없는 스웨덴의 학교가 낯설어 담임선생님께 이유를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스웨덴은 뛰어난 아이 한 사람을 찾기보다 대다수보다 뒤처지는 아이가 없도록 골고루 이끌어야 한다는 평등 교육을 실천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힘들어지는 사회를 원하지 않는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18세기까지의 옛날 항구. 현재는 관광용 여객선과 각 도서를 잇는 정기 여객선의 항구로 쓰이고, 수상 버스와 소형보트가 정박해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의 18세기까지의 옛날 항구. 현재는 관광용 여객선과 각 도서를 잇는 정기 여객선의 항구로 쓰이고, 수상 버스와 소형보트가 정박해 있다. /Ola Ericson/imagebank.sweden.se
이러한 분위기는 협업에서도 반영된다. 이곳에서 협업은 존중을 의미했다. 핀에어 항공사의 디자인으로 유명한 마리메코나 그릇의 이탈라, 의류의 H&M, 주방용품 회사 스텔톤 등 북유럽 거의 모든 회사는 작은 공방에서 협업하며 생산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한국에서 협업은 한국적 의미로 공동 작업이고, 어찌 보면 하도급 업무일 수도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협업은 각자의 업무와 절차, 책임, 수익 등이 빼곡히 적힌 계약서를 의미한다. 그 계약을 또 공식화하고 보증까지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이런저런 마찰로 산으로 가버린 이야기는 흔하다.

나는 늘 익숙해 있던 '재확인'이란 습관이 결국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경험에서 온 결과라는 것을 배웠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약속의 확인은 매너이자 나를 지켜주는 분명함이라 믿었는데, 오히려 매번 다시 확인하는 내게 북유럽 친구들은 "약속을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느냐"고 의아해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짓 없는 답을 전하는 북유럽 사회에 와서 약속과 배려의 의미를 처음부터 새로 배운 것이다. 구두 약속이라도 법적인 효력을 지니는 나라. 북유럽의 가치 중 하나인 배려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라는 바탕이 없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문화적 가치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스케이트장에서 정해진 요금표를 보고 그만큼의 돈을 책상에 올려놓고 스케이트를 가져갔고, 박물관 출입구에서 입장권을 재확인하는 이도 없었다.

스웨덴 가정의 단란한 식사 모습.
스웨덴 가정의 단란한 식사 모습. /Melker Dahlstrand/imagebank.sweden.se
1+1의 개념이나 묶음으로 사면 할인이 되는 개념은 이해되지 않았다. 친구 선물을 고르다 점원에게 "10개를 한꺼번에 사면 할인이 있느냐"는 미국식 질문을 건넸다. "곱하기 10이 필요하지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고 나에게 되물었다. 공짜라도 내게 의미가 없는 것이면 갖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지금은 살기 좋은 곳으로 동경받는 북유럽 5개국은 역사적으로 아주 외지고 척박한 그야말로 가난한 땅이었다. 어려운 시절부터 생활의 절제와 절약, 그리고 사람이 적은 곳에서 인력을 소중히 생각하는 평등과 존중이 항상 북유럽을 지켜주고 있다.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북유럽 전통은 심플하고 기능적인 디자인을 원한다. 긴 겨울을 달래주는 아름다운 조명이 발달하고, 캄캄한 겨울 동안 밝은 자연의 느낌을 그 안에서 소중히 연출하는 공간이 우리가 열광하는 북유럽 인테어이다. '북유럽 스타일'이라는 하나의 트렌드로 유행이 될 만큼 세계는 북유럽 디자인에 열광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모두 자연스러운 그들 삶의 흔적이다. 아름다운 디자인과 색상은 길고 어두운 겨우내 밝은 하늘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의 바람이다.

꿈 같은 햇볕과 따스함이 주어지는 여름에도 그들은 들떠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사함을 나누며, 삶의 행복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예쁜 디자인, 사회복지의 안락한 생활,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는 사회 분위기를 동경하기 이전에 그들의 모습을 이끌어 준 북유럽 사회의 마음을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철도여행은 K-rail만 있는게 아니다! 유럽 철도여행
ⓒ최지웅
북유럽에서 철도는 넓은 지역 간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편으로 생활수준이 높은 북유럽답게 좌석은 편안하고 무엇보다도 북유럽의 자연을 차창을 통하여 감상할 수 있다. 얼핏 보면 비슷하게 보이지만 북유럽의 철도는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북유럽에서 가장 국토가 넓은 스웨덴은 남쪽에는 넓은 호수와 끝이 보이지 않는 숲이 많다. 스칸디나비아산맥을 너머서 있는 노르웨이는 피오르가 만든 협곡이 많아서 북유럽에서도 가장 경치가 좋은 철길이다. 핀란드는 스웨덴보다 훨씬 호수가 많아서 기차를 타면서 수없이 많은 호수를 만날 수 있다.


북유럽 피오르 철도 여행의 핵심 코스
플롬 철도 Flaam Line

노르웨이 플롬 코스는 길이는 20.2km에 불과하지만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피오르를 따라서 달리는 등산철도이다. 베르겐선에서 나누어져 출발지인 뮈르달역은 해발 865.5m에 있지만 종점인 플롬역(FlaamStation)은 해발 2m에 있어서 55퍼밀(‰)(1km를 가는 동안 55m 올라감)인 급경사 구간이다. 열차는 연중 운행하고 있으나 관광객이 집중되는 여름에 자주 다닌다. 겨울에는 하루에 4왕복만이 다니지만 여름에는 10왕복까지 늘어난다.
플롬선 열차는 양쪽 끝에 전기기관차가 연결되어 있고 그 사이에 객차가 연결되어 있다. 객차는 오래되었고 짧은 구간을 달려서 좌석은 좀 불편하지만 창문이 열려서 밖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플롬선 관광열차의 백미는 쇼스포스(Kjosfoss)라는 폭포의 장관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가수가 판소리와 비슷한 노래를 부른다. 이 폭포로는 기차 이외에는 접근할 수 없다고 한다.

플롬은 플롬강이 네피오르와 만나는 장소에 있으며 인구는 고작 500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여기서 바로 관광 페리로 환승한다. 페리를 타고 둘러보는 구간은 네피오르의 지류에 해당하는 에우를란스피오르드와 내뢰이피오르이다. 길이는 짧지만 철도와 연계가 되어서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노르웨이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어느덧 피오르는 끝이 보이고 구드방겐(Gudvangen) 항구가 나타났다. 항구 주변에는 플롬처럼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작은 마을이라서 항구 바로 앞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버스정류장에는 보스(Voss)로 향하는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버스는 내뢰이달렌 계곡을 올라가는 스탈헤임스클레이바(Stalheimskleiva)라는 도로를 올라간다. 길은 좁고 경사가 급하며 거의 180도에 가까운 커브가 U자형으로 이어진다. 도로의 폭은 좁고 13번이나 머리핀모양으로 꺾여 있었다. 올라가면서 경치는 점점 좋아져서 산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폭포와 내뢰이피오르가 끝나는 구드방겐 마을의 전경이 펼쳐졌다. 버스는 호수 주변을 달려서 보스역(VossStation)에 도착하였다. 보스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노르웨이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베르겐까지 갈 수 있다.

(위에서부터) 1량으로 움직이는 인란스바난의 디젤동차, 쇼스포스역(Kjosfoss Stasjon, Kjosfoss Station)에서만 볼 수 있는 쇼스포스(Kjosfoss)라는 폭포 ⓒ최지웅
피오르드를 따라 올라가는 산악 노선
오프트바넨 Ofot Line

노르웨이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오포트바넨(Ofotbanen, Ofot Line)은 나르비크(Narvik)에서 스웨덴과의 국경이 있는 릭스그랜센까지의 철길이다. 철길은 말름바난(Malmbanan)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키루나(Kiruna)를 거쳐서 보트니아만(Gulf of Bothnia)에 있는 룰레오까지 연결된다.

오포트바넨은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국경을 이루고 있는 스칸디나비안산맥을 넘어야 하므로 나르비크부터 철길은 오르막이 계속 이어진다. 왼쪽으로는 오포트피오르(Ofotfjord)가 이어진다. 철길은 계속하여 올라가면서 물과는 점점 멀어지고 피오르는 점점 폭이 좁아지고 높아진다. 스웨덴에 들어왔지만 풍경은 크게 차이는 없다. 다만 바위보다는 숲과 호수가 많고 경사가 적고 선로 사정이 좋은지 열차는 속도를 내면서달린다. 낮이 긴 여름을 맞아서 정차하는 역마다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아비스코(Abisko)가 대표적인 장소로 마을이 있는 아비스코 외스트라역과 국립공원에서 가까운 아비스코 투리스트역(Abisko Turiststation)에 정차한다. 넓은 숲이 나타나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호수를 따라서 간다. 가끔 바위가 보이고 호수 건너서는 눈이 남아 있는 낮은 언덕이 계속하여 이어진다. 종착역은 키루나중앙역(Kiruna Central Station)이다.

1 플롬선 등산열차를 탈 수 있는 뮈르달역 승강장 2 플롬선의 종착역인 플롬역 3 버스를 타고 급경사를 올라가면 높은 산 사이에 자리잡은 구드방겐(Gudvangen)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최지웅

광활한 스웨덴의 숲을 가로지르는
인란스바난 Inlandsbanan

북유럽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스웨덴의 관광 철도인 인란스바난(Inlandsbanan,www.inlandsbanan.se)은 무라에서 스베그, 외스터순, 빌헬미나, 요크모크를 거쳐서 북극권 안에 있는 옐리바레까지 이어지는 1,289km의 철길이다. 스웨덴의 내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며 서쪽으로는 산맥을 넘으면 노르웨이가 있다.
인란스바난은 관광 열차이기는 하지만 스웨덴의 로컬선에서 볼 수 있는 겨우 1량짜리 디젤동차로 운행한다. 단체 승객이 있는 경우에는 여러차량이 연결되는데 차량 사이로는 건너갈 수 없다. 이 열차를 타는 동양인은 워낙 드물기 때문에 승무원은 물론 다른 승객들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보고 싶은지를 물어볼 것이다.

관광 열차이므로 열차에 타면 차장이 좌석 안내는 물론 인란스바난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은 물론 식사 주문까지 받는다. 기본적으로 스웨덴어와 영어가 통한다. 열차를 타고 가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주저하지말고 차장에게 문의하여 보자. 시각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인란스바난은 기본적으로 반나절 이상을 달린다. 그러면 식사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데 중간에 식사 시간이 있어서 30~40분간 정차한다. 이때에는 역에서 가까운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다만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차내에서 차장이 주문을 받는다. 대부분이 현지에서 생산된 재료로 만들어서 스웨덴 시골의 소박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인란스바난이 지나가는 스웨덴 내륙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다. 열차가 정차하는 마을은 정말 조용하고 가끔씩 보이는 도로도 지나가는 차를 보기 어렵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북유럽의 자연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겨울이 긴 북유럽이라서 풀밭 바닥에는 물기가 많고 작은 풀들이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시력 향상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요즈음에 인기가 높은 블루베리(Blueberry)의 친척인 빌베리(Bilberry)가 자라고 있어서 스웨덴인들이 따서 먹는 걸 볼 수 있다. 자연에서 자라는 그야말로 무공해 빌베리이다. 다만 너무 열매가 작아서 먹은 것 같지도 않지만. 인란스바난이 정차하는 역은 현재 여객 수송보다는 인란스바난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휴게소나 인란스바난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골이지만 마을은 깨끗하고 역도 정말 잘 관리되어 있다. 인란스바난 북쪽 구간은 북극권 안으로 이어진다. 북극권이라고 갑자기 눈과 얼음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우리나라보다 훨씬 북쪽인 북극권에 한 번 와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북유럽 여행에서는 감동적이다.

(위에서부터) 풀밭에 물기가 있어서 침목으로 길을 만들었다. 강을 건너는 도로와 철교 겸용 다리를 승객들이 열차에서 내려서 직접 걸어서 간다. ⓒ최지웅
<Travel Information>
북유럽의 기차 운임 역시 매우 비싸다. 여행 기간에 따라서 적당한 철도 패스를 사용하는 게 좋다. 기차 승차가 적다면 미리 각국 철도 회사 홈페이지에서 할인승차권을 구입한다면 저렴하게 기차를 탈 수 있다.

덴마크국철 DSB : www.dsb.dk
스웨덴철도 SJ : www.sj.se
인란스바난 : www.inlandsbanan.se
노르웨이국철 NSB : www.nsb.no
핀란드국철 VR : www.vr.fi

1 북유럽의 열차는 기본적으로 1등석과 2등석으로 구분된다. 1등석은 정차역이 적은 열차에만 편성되어 있다. 로컬선 열차의 경우에는 2등석만 있는 경우가 많다.

2 북유럽의 야간열차, 스웨덴의 X2000, 노르웨이의 장거리열차는 예약 필수이다. 패스 소지자의 경우에는 스웨덴의 야간열차와 X2000은 스웨덴철도 SJ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으나 나머지는 북유럽 현지에서만 예약할 수 있다. 패스 소지자가 아닌 경우에는 해당 국가 철도 회사 홈페이지에서 예약하면 자동으로 자리가 지정된다.

3 스웨덴과 핀란드는 북쪽에 육지가 연결되어 있으며 철길도 있지만 여객 열차가 다니지 않아서 버스를 타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 관계로 많은 여행객들이 스톡홀름과 헬싱키 또는 투르크를 연결하는 페리를 이용한다.

4 유럽은 주말이나 연휴에는 평일에 비하여 열차운행 회수가 줄어드는 경우가 많고 야간열차가 운행하지 않기도 한다. 주말에 이동한다면 사전에 시각표를 확인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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