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트레일
Day 1. 성스러운 계곡에서…'천사의 트럼펫'을 따라
해발 2600m의 작은 마을 피사쿠초에서 걷기를 시작한다. 이 마을의 다른 지명은 KM 82.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에서 철도로 82㎞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낭만이라고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실용적 작명. 승용차와 기차로 갈 수 있는 도로는 여기가 마지막이다.
첫날 예정한 12㎞는 고산(高山)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당신을 배려하는 초보자 코스. 해발고도는 500m가 상승해 3100m까지 올라갔지만, 이미 이틀 동안 머물렀던 쿠스코 도시의 해발고도가 3300m였다. 온순한 페루의 알파카처럼, 심장은 아직 통제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편안하고 순탄한 길이다. 정복과 극복에 의미를 두는 남성 클라이머가 흔히 놓치는 대목이 있다. 잉카 트레일의 길이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빚어내는지. 사막으로 시작한 길은, 구름 속 숲(Cloud Forest)을 지나 마침내 아마존으로 들어가는 아열대 정글을 이끌어낸다. 북반구 아시아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꽃과 새를 안데스에서 만난다.
남미의 등뼈로 불리는 안데스는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산악이 아니다. 완만하고 아기자기하게 오르는 한반도의 산이 아니라 느닷없이 솟아오른 거대한 벽. 게다가 순간적 힘으로 바벨을 들어 올린 운동선수의 힘줄과 핏줄을 보는 듯하다. 팽창한 모세혈관 같은 안데스의 발기. 우리가 첫날 걸은 길의 이름은 성스러운 계곡(Sacred Valley)이었다.
Tip 1 첫날 12㎞ 이동. 이날 야영지는 와이야밤바(Wayllabamba). 해발 3100m. 송이 볶음밥과 고산병에 좋다는 코카 차로 저녁 식사. 저녁 5시 30분 일몰. 무난한 코스.
Day 2. 내 이름은 알레한드로, 아들 넷을 뒀습니다
텐트를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마추픽추의 11월은 우기, 여름 겨울 뒤바뀐 남미의 장마다. 고산의 아침은 빨리 온다. 새벽 5시면 모든 것이 환한 세상. 다행히 비가 멈췄다. 이번 등반을 책임진 가이드 에드가는 팀 전원을 불러 모았다. 11명의 현지 포터와 요리사도 전원 참석. 에드가는 "우리는 나흘 동안 한 가족"이라며 "가족은 서로 인사를 나눠야 한다"고 군인처럼 말했다.
두 번째 사내가 나섰다. "내 이름은 윌프레드. 나이는 마흔이오. 이 일 한 지 10년 됐소. 같은 마을에서 왔소. 자식은 다섯 명을 낳았고, 농사를 짓소."
인사법은 한결같았다. 간결했고, 그래서 강력했다. 포터들은 과장 약간 보태서 거의 날아다녔다. 고무 대충 잘라 만들었다는 '깔까 슬리퍼'를 신고, 키보다 더 큰 배낭을 메고 우리보다 훨씬 뒤에 출발해서, 늘 역전에 성공했다.
게다가 이날은 무려 1100m의 높이를 극복해야 하는 잉카 트레일 최대의 난코스. 정점인 해발 4200m 지점은 '죽은 여인의 통로'라는 악명을 지니고 있다. 산을 넘다가 여자가 죽었다는 뜻은 아니고, 돌아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고개를 돌렸던 잉카의 공주가 돌이 되고 길이 되어 안데스의 다리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다.
Tip 2 둘째 날 12㎞ 이동. 이날 야영지는 파카이마유(Paqaymayu). 해발 3500m. 최고 4200m까지 올랐다가 다시 하산. 일정 중 최대 난코스. 고산병까지는 아니었지만 심장이 적응하기까지 힘들었음. 로모 살타도(소고기 찹스테이크와 볶음밥)와 코카차로 식사.
Day 3. 별은 어떻게 둥근 원을그리며 회전하는가
11월의 안데스를 깨우는 두 가지 소리가 있다. 하나는 텐트를 때리는 빗소리, 또 하나는 벌새(Hummingbird)의 노래. 새벽 4시 20분쯤이면 어김없이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새인지 나비인지 모를 소박한 체구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생명이 있다. 잉카의 말로 와캉키. 학계의 공식 명칭은 마르데발리아 메치아나(Masdevailia Vechiana). 다섯 번 들어도 절대 외울 수 없을 것 같은 이 학명보다, 에드가가 불러주는 이름이 더 눈부시다. 'You will cry'. 실제로 와캉키의 꽃잎에는 두 방울의 눈물이 맺혀 있다. 늘 머금고 있다는 이슬이다.
잉카의 전령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의 아들, 그것도 18~22세의 장자(長子) 중에서 힘과 지략이 뛰어났던 이만 가능했던 것.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잉카의 왕께서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면 차스키는 멀리 바닷가에서 릴레이로 실어 날랐다. 한 사람이 몇 킬로미터 구간을 전속력으로 주파한 뒤 바통을 넘기는 식이다. 가장 가까운 바닷가에서 수도 쿠스코까지는 약 600㎞. 그런데도 만 하루면 신선한 생선이 왕의 밥상에 올랐다고 한다.
Tip 3 셋째 날 10㎞ 이동. 이날 야영지는 퓨유파타 마르카(Phuyupata marca). 해발 3600m. 최고 3950m와 최고 3670m인 두 개의 고점을 통과해야 하는 난코스. 가장 잘 보존된 잉카 유적지로 꼽히는 사야크 마르카(Sayac marka)를 통과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질서정연하게 쌓아올린 제단과 목욕탕, 전망대 등을 만날 수 있다. 알파카와 라마 무리도 조우가 가능하다. 자연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코스.
Day 4. 새벽 4시 기상., 폭우 속 마추픽추
잉카의 신은 오직 30분만의 별을 허락했다. 나머지 시간을 지배한 것은 비. 첫날부터 심상찮았던 우기의 안데스는 밤새 비를 퍼부었다. 극강의 방수를 자랑하는 'Waterproof' 텐트였지만, 10시간 내내 쏟아진 비를 이겨낼 힘은 없었다. 새벽 4시, 잠시 가늘어진 비를 그나마 감사히 여기며 일어났다. 이마의 LED 램프에 의지해 쪼그리고 앉아 컵라면을 먹는다. 마지막 날을 위해 아껴둔 특식이다. 문득 새벽 인력시장의 풍경이 포개졌다.
4시 30분, 여명 전에 출발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넷째 날은 계속해서 내려가는 길. 잉카의 돌계단은 작은 시냇물로 변해 있었다. 판초 안으로 완벽하게 숨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이런 비에는 대책이 없다. 신발까지, 속옷까지 흠뻑 젖는다. 육체보다 걱정인 것은, 과연 마추픽추가 제 모습을 허락해줄지다. 세상은 구름의 바다. 핏줄 솟은 안데스도, 아마존의 정글도, 비와 구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섯 시간을 내리 걸어 인티 푼쿠에 도착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태양의 문. 현지에서는 '오 마이 갓(Oh my God)'이라 부르는 수직 50여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느닷없이 나타난다. 그 문 앞에서 숨을 멈췄다. 문 뒤편으로는 구름의 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세계인데, 문 앞쪽으로는 비밀의 공중 도시가 단속적(斷續的)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해발 2400m의 수수께끼 하늘 도시. 구름은 잉카 최후의 요새를 품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맥과 다리가 함께 풀렸다. 케추아어 마추픽추를 우리말로 하면 오래된 봉우리. 기차와 버스로 이곳까지 올라왔다면, 지금 같은 마음이 과연 들 수 있을까. 몸은 천근만근 무거운데 마음은 믿을 수 없게도 봉우리 위로 솟구쳤다.
Tip 4 넷째 날 9㎞ 이동. 마추픽추는 해발 2400m. 1200m를 줄곧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잉카 트레일의 정수를 보여주는 돌계단 길. 하루 종일 지독하게 내렸던 비 때문에 이날은 마추픽추에 도착하자마자 아래 마을로 후퇴. 다음 날 다시 올랐다. 3박 4일 걸렸던 마추픽추를 셔틀버스 30분 만에 도착했다. 날씨는 전날 비, 이날은 쾌청. 하지만 마음은 반대였다. 작렬하는 안데스의 태양을 묵묵히 견디며 꼼꼼하게 마추픽추를 살폈다. 활자를 남기지 않은 잉카는 말이 없다. 정들었던 낡은 운동화를 신전에 바쳤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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