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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영국

영국 : 영국의 시골 여행의 깊은 맛 오롯이…그림 같은 마을 '코츠월즈'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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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전원…그리고 자유 역사를 머금어 더 풍요롭네

영국 시인 윌리엄 모리스가“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묘사했던 코츠월즈의 바이버리지역. 조르르 늘어선 잿빛 지붕 건물은 중세 때 코츠월즈에서 나는 석회암으로 만들었다. 한때 방직공들이 살며 모직을 만들던 집이다.

여행 가이드북에 도배된 세계 명소를 섭렵한 여행자들은 흔히 착각에 빠진다. 세상의 많은 것을 봤노라고. 하지만 여행 고수들은 안다. 여행의 깊은 맛은 인공으로 구축된 대도시가 아니라 산천과 초목이 빚어낸 시골길에 스며있다는 걸. 가이드북이 기껏해야 한두 장 훑고 스치는 시골 마을에서 우리는 되레 여행(旅行)의 참의미를 깨닫는다. 잠시나마 일상을 잊고 나그네(旅)가 되어 쉬엄쉬엄 거니는(行) 여유, 이것이 진정 떠남의 주목적임을.

영국 잉글랜드 중서부의 코츠월즈(Cotswolds)는 이런 시골 여행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이다. 1960년대 영국 정부가 자연이 아름다운 지역으로 선정한 곳으로 크고 작은 마을 100여개가 오밀조밀 들어서 있다. 아름다운 풍광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영국 내에서도 '그림엽서 같은 마을(picture postcard village)'로 꼽히는 곳, 케이트 모스·엘리자베스 헐리 같은 유명인들이 숨 막히는 런던 생활이 싫다며 박차고 나와 보금자리를 튼 곳이다. 유기농 선진국 영국에서 그린 시크(Green chic·고급 자연주의)를 주도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역사를 머금어 더 풍요로운 코츠월즈의 자연을 만났다.

코츠월즈의 대표적 친환경 농장‘데일스포드’에 진열된 유기농 사과.
산업혁명으로 뒷전에 밀린 자연의 재발견

런던 패딩턴 역을 출발한 기차가 북서쪽으로 2시간 20분 정도 달려 첼트넘(Cheltenham) 스파역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나 런던에 도착했을 때의 상쾌함보다 몇 배는 더 짙은 상쾌함이 밀려든다. 알싸한 풀 내음과 소똥 냄새가 뒤범벅돼 매연에 무뎌진 후각을 시험한다. 첼트넘은 코츠월즈 여행이 시작되는 관문이다.

코츠월즈는 쉼 없이 마음 비우기를 재촉한다. 잡념으로 엉킨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평온을 엮어내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렌터카에 올라 5분 정도 흘렀을까, 차창 너머로 완만한 구릉 위에서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떼가 보인다. 쪽빛 하늘을 수놓은 양떼구름이 이 모습을 느릿느릿 굽어본다. 코츠월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 코츠월즈라는 이름 자체가 양 우리를 뜻하는 '코트(cot)'와 언덕을 일컫는 옛날 영어 단어 '월드(wold)'에서 왔음을 눈으로 이해할 수 있다.

코츠월즈의 자연은 산업화의 반작용이 재발견한 아름다움이다. 중세 때 코츠월즈는 가내 수공 형태의 양모 산업을 기반으로 영국 내에서도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혔다. 귀족들의 대저택이 즐비하고 한가로이 정원을 꾸미던 여유로운 전원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으로 기계식 대량 생산이 시작되면서 급격한 쇠퇴를 맞이한다. 돈줄이 마르자 사람들은 떠나고 마을은 황폐해졌다. 쇠퇴 일로를 걷던 코츠월즈로 사람들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산업화에 반기(反旗)를 든 미술공예 운동이 시작되면서였다. 미술공예 운동을 이끈 공예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모리스는 산업화의 물결이 미치지 못한 코츠월즈를 본거지로 삼았다. 산업혁명으로 뒷전에 밀렸던 자연과 예술이 다시 부흥했다.

코츠월즈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 바이버리(Bibury)는 자연 회귀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윌리엄 모리스가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 묘사했던 마을로, 개발의 뒤안길에서 방치됐던 방직공들의 집이 지금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을 자아낸다.

①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1편 촬영 장소였던 스노스힐.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장면을 찍으려고 온 마을을 인공 눈으로 덮었다고 한다. ②'코츠월즈의 베니스'라 부르는 보턴온더워터. 아담한 개울이 흐르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③찰스 황태자 농장에 딸린 채소 가게 '베지 셰드'. 밭에서 갓 따온 흙 묻은 당근이 진열돼 있다. ④동화 속 한 장면 같은 브로드웨이의 아기자기한 티룸(tea room).
◇잿빛 돌집 사이로 자연이 보이네

첼트넘에서 차로 20여분 북쪽으로 향하자 중세의 흔적을 간직한 작은 마을 윈치콤(Winchcombe)이 나타났다. 잿빛 지붕을 얹은 집들이 한 아름 시야에 들어왔다. 코츠월즈의 풍경을 더할 나위 없이 목가적으로 만드는 ‘코츠월즈 스톤 코티지(cottage·시골집)’였다.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짓는 데도 쓰였다는 코츠월즈 석회암을 쌓아올려 만든 집으로 코츠월즈의 상징이다. 마을마다 조금씩 스타일은 다르지만 전체적 느낌은 비슷하다.

윈치콤 동쪽으로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브로드웨이(Broadway)나 그 옆의 스노스힐(Snowshill)은 좀 더 아기자기한 동화 속 한 장면을 선사한다. 브로드웨이는 전원풍 인테리어로 유명한 로라 애슐리가 살던 곳이고, 스노스힐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1’을 찍은 곳이다. 브리짓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방문한 시골 고향집이 여기에 있다. 빨간 공중전화 부스 옆 가지런한 돌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영화 속 장면으로 빨려 들어간다.(잠깐, 영화 속 장면은 한여름에 찍었다고. 인공 눈으로 마을 전체를 덮어 장관을 이뤘단다.)

코츠월즈 중간 지점에 있는 스토온더월드(Stow-on-the-Wold)는 앤틱 용품 애호가가 찾을 만한 곳이다. 오후 4시, 영국의 맛을 느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지역 주민에게 인기 있다는, 스토온더월드 광장에 있는 카페 허프킨스(Huffkins)에 들러 5.99파운드(약 1만850원)를 주고 크림 티(cream tea) 세트를 시켰다. 갓 구운 스콘과 크림, 잼이 애프터눈티와 함께 나왔다. 달콤한 스콘을 한 입씩 베물며 백발의 영국 할머니들 틈에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여행자의 낭만적 휴식이다.

이곳에서 다시 차를 타고 10여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보턴온더워터(Bourton-on-the-Water)로 향했다. ‘코츠월즈의 베니스’라는 지역 소개책자의 비유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작은 규모의 개울이 흐르는 동네였다. 하지만 느림과 전원, 자유와 아기자기함을 비교 기준으로 하자면 베니스에 판정승을 거둘 만큼 아름다운 마을이다. 느림을 만끽하려고 우체국에서 엽서 한 장을 보냈다. 수신자는 곧 일상으로 복귀할 나 자신. 우편값은 76펜스(약 1380원)였다. 고물가 속에 발견한 몇 안 되는 저렴한 물가였다.

◇자선사업 하는 찰스 황태자의 유기농장

“밭에서 방금 따온 당근이에요. 겉은 이래도 맛은 죽여준다니까요. 이거 한번 봐요.” 소박한 아낙이 흑갈색 흙이 덕지덕지 붙은 당근을 들어 우지끈 동강 냈다. 흙냄새가 당근에서 폴폴 풍겼다. 이곳은 코츠월즈 남쪽 테트버리(Tetbury)에 있는 ‘베지 쉐드(The Veg Shed)’. 낡은 이 허름한 창고 매장의 주인은 놀랍게도 찰스 황태자다. 가게 옆 농장에서 갓 따온 유기농 채소가 여기서 팔린다.

찰스 황태자는 1980년대 초반 테트버리에 있는 대저택 ‘하이그로브(Highgrove)’를 사들여 농장과 정원을 가꿨다. 친환경 유기농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이 작고 허름한 창고를 운영한다. 테트버리 시내에는 저택과 같은 이름을 내건 유기농 가게 ‘하이그로브’가 있다. 수익금 전액이 자선 기금으로 사용된다. 고부가가치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유기농이 코츠월즈에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도구로 승화되고 있었다. 유기농 애호가라면 킹햄 외곽에 있는 데일스포드 유기농 매장은 필수 코스이다. 매끈하게 상업화된 유기농을 만날 수 있다.

코츠월즈의 나날을 뒤로 하고 일상으로 복귀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보턴온더워터에서 부친 엽서가 딱 열흘 만에 아파트 우편함에 도착해 있었다. 이미 망각의 문을 지난 추억이 기억의 강을 건너 잠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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