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그린란드 : 탐험의 시작 - 83일간 한밤의 태양 아래서 기록한 그린란드 견문록

반응형

“내 이름은 나노끄” 그린란드일루리사트에서 머물던 83일 동안 그곳 원주민들은 나를 이렇게 불러주었다. 나노끄(Nanoq), 그린란드 말로 북극곰이란 뜻이다.

만년설에 덮인 채 오랫동안 잊혀져 온 이 거대한 얼음 나라에서 나는 석 달간 나노끄로 불리며 살았다. 그린란드 내륙의 하얀 사막, 그 광활한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일루리사트의 빙산은 한없이 크고 비장했으며, 설원을 내달리는 북극 썰매개들은 지상의 그 어떤 동족보다 강하고 날렵했다. 물개와 고래, 넙치를 잡으며 살아가는 그린란드 원주민들은 결코 빙하의 질서를 거스르는 법이 없었고, 사람 사는 세상 어디나 그렇듯 일루리사트 곳곳마다 가슴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북극의 여름, 어둠을 빼앗긴 그 백야의 밤과 낮 동안 나는 잠 없이 꿈꾸는 법을 배웠고, 말없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

이 이야기는 83일간 한밤의 태양 아래서 기록한 그린란드 견문록, 일루리사트의 이야기이다.

일루리사트 앞바다에 펼쳐진 첩첩빙산

첫 사냥

탕! 한스가 총을 쏘았다. 탕탕!
리니의 총구에서도 연기가 났다. 그러나 둘 다 빗나가고 말았다. 물개는 잽싸게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물개가 나타났던 지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배를 몰았다. 물개들은 대략 5분에서 15분 사이에 숨을 쉬기 위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총소리에 놀라 제대로 숨을 못 쉬었을 테니 녀석이 다시 물 위로 올라올 시간 간격은 더욱 짧을 것이다. 빙산 사이로 메아리치던 총소리가 잦아들자 이내 정적이 감돌았다.

물개를 겨냥하고 있는 이누이트 사냥꾼. 이들은 먼 거리에서도 물개의 머리를 정확히 포착한다.

초대형 빙산들이 점령한 일루리사트의 바다. 사냥꾼들은 빙산 사이로 배를 몰며 사냥한다.



일루리사트의 바다는 ‘첩첩빙산’이다. 작은 얼음덩어리부터 도시의 한 블록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거대한 부빙까지 그야말로 거대한 빙산의 공동묘지와도 같다. 물개 사냥꾼인 두 명의 이누이트 사나이들은 숨을 죽인 채 예리한 눈매로 바다를 주시했다. 이누이트 어부들은 바닷새의 시력을 가졌다. 까마득한 거리에서도 그들은 정확히 물개의 머리를 확인할 수 있다.


탕탕! 다시 총소리가 울렸다. 사냥꾼들은 물개가 고개를 내미는 4초 정도의 시간 안에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한스와 리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엔 명중이다. 수정처럼 파랗던 바다 위로 갑자기 붉은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한스는 재빨리 보트를 몰았다. 총에 맞았더라도 물개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으면 말짱 헛일이기 때문이다. 한스가 얼른 꼬챙이로 물개를 낚아채자 옆에 있던 리니는 확인사살을 위해 총을 두 방 더 쏘았다. 이제 물개를 완전히 잡은 것이다. 제법 큰 녀석이라 두 사냥꾼은 서로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잡은 물개를 빨리 해체해야 한다며 평평한 부빙을 찾아 배를 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빙산에 갇혀 파도조차 일지 않는 바다 위로 널찍한 부빙이 보였다. 부빙 위로 올라서자마자 한스는 노련한 솜씨로 물개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작은 손칼 하나만으로 80여 킬로그램에 달하는 커다란 물개를 부위 별로 완전히 해체하는 데에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일루리사트 최고의 물개 사냥꾼다운 솜씨다.

그가 작업을 마칠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멍하니 둘러서서 지켜볼 뿐이었다. 한스는 고기 몇 점을 잘게 나누어 갈매기들에게 던져준 뒤 따로 모아둔 고깃덩어리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당신네 탐험대 개들에게 갖다 먹이시오. 녀석들이 아주 좋아할게요.”

바다 위의 평평한 부빙 위에서 물개 해체 작업을 하고 있는 이누이트 사냥꾼 한스.

물개 해체 시간은 대략 1~2시간가량, 능숙한 사냥꾼들은 1시간 이내에 해체가 가능하다.


그린란드 탐험대

한국인 최초, 아니 세계 최초의 ‘그린란드 개썰매 종단’이 성사되기까지는 2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다. 홍성택 대장과 정기화, 정동영, 배영록 대원, 이들 네 명의 한국인 탐험가들은 앞으로 석 달여에 걸쳐 개썰매를 타고 그린란드 북극권의 눈 덮인 빙원을 달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기록을 위한 원정이나 정복으로서의 탐험이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라는 현지인의 독백처럼 해빙의 속도와 양이 점점 가속화되는 그린란드의 동토를 행군하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지구온난화’라는 말보다는 생생한 증거를 통한 살아있는 현장 보고서로서의 탐험을 기획해온 것이다.


이 역사적인 원정을 위해 탐험을 꿈꾸는 자들과 그 꿈을 지지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꿈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모여 한 덩어리가 되었고, 2011년 봄에 비로소 선발대와 본대, 그리고 취재팀과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형성되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베이스캠프 매니저. 본격적인 원정에 앞선 전초작업, 즉 2천여 킬로미터가 넘는 긴 루트에 대하여 한 편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대한민국 그린란드 원정대와 다큐멘터리 촬영 팀



‘빙산’이라는 이름의 도시, 일루리사트

그린란드의 서쪽, 북위 69도 지점에 위치한 일루리사트는 거대한 아이스 피오르드 끝자락에 위치한 해안 마을이다. 이미 5천 년 전부터 원주민 이누이트들이 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며 살아오던 이곳이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고, 그린란드의 세 번째 도시이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로 손꼽히게 된 이유는 바로 얼음 때문이다. 지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일루리사트는 그린란드어로 ‘빙산’이라는 뜻) 오늘날 이 지역의 빙하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이동하며, 가장 많은 양의 빙산을 바다로 내보내고 있다. 하루에 40미터씩 이동하는 빙하가 시시각각 쏟아내는 빙산의 양은 뉴욕 시민들이 1년 동안 쓰는 담수의 양과 맞먹는다. 그런 까닭에 일루리사트는 본의 아니게 지구온난화의 바로미터 역할을 떠안게 되었으며, 수천, 수만 년 세월 동안 얼어붙어 있던 거대한 빙산이 마지막 신음소리를 내며 쩍쩍 떨어져 내리는 최후의 광경을 보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눈과 빙산으로 에워싸인 일루리사트 전경

200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세르메끄 쿠야레끄(Sermeq Kujalleq)는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세계 최대의 빙하지대이다.



백야의 바다에서

해가 지지 않는 일루리사트의 저녁 바다, 갑자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먼 옛날, 지금처럼 이곳에 첫 눈송이가 내리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 육면체였던 눈송이는 이틀 뒤에 부서지고 윤곽이 흐려지다가 열흘이 지나면 낱알 같은 결정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점점 결이 조밀해지다가 3년 뒤에는 비로소 만년설이 된다. 그 이후로 까마득한 세월이 흘러 지도를 온통 하얗게 뒤덮은 그린란드의 내륙빙하가 형성된 것이다. 이제 그 위를 우리 탐험대가 걷게 된다.

내륙빙하의 끝자락, 백야의 바다 위로 성산일출봉처럼 거대한 빙산이 떠있다. 저 빙산들 대부분은 천천히 떨어져 나와 언젠가는 바다로 합쳐지겠지만 가끔 최후까지 살아남은 빙산이 있어 아주 멀리까지 여행을 하기도 한다. 빙산은 멀리 대서양으로 떠나고, 우리 탐험대는 반대로 그 빙산이 태어난 곳, 내륙의 빙하지대로 거슬러오를 것이다.


탐험대가 출발하고 나면 나는 베이스캠프에 남게 된다. 그리고 이동 좌표 확인, 보급품 조달, 에어드롭을 위한 헬기 확보 등 매니저로서의 업무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은 이곳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만의 문화를 배워가며 그린란드의 여름 한 철을 직접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나의 그린란드 탐험이 되리라.

일루리사트, 백야의 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