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자유를 찾아오다 - 암스테르담 중앙역

이 도시의 이름이 책 제목으로 쓰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암스테르담]에서 두 친구 클라이브와 버넌은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약속을 어기기 위해서. 둘은 한때 서로의 우정을 걸고 약속했었다. 상대방이 끔찍한 병에 걸려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고 겨우겨우 생존하는 처지가 된다면 다른 한 친구가 책임지고 안락사가 허용되는 암스테르담으로 데려가겠노라고. 그들은 결국 약속대로 상대방의 죽음을 도모한다. 약속과 다른 것은 상대방의 동의가 없었다는 것. 이 소설 속에서, 네덜란드의 정신을 상징하는 ‘안락사’는 파렴치하게 악용된다. ‘네덜란드 자유의사 안락사연맹(De Nederlandse Vereniging voor vrijwillige Euthanatie)’이 알았으면 경악하여 펄쩍 뛸 노릇이다.

 

1973년부터 이미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운동이 펼쳐졌고 사실상 용인되었던 네덜란드에서 안락사 법안이 공식 발효된 것은 2002년 4월이다. 2000년 11월, 하원에서 찬성 104, 반대 40으로 통과된 이후 2년 만이었다. 파장은 컸다. 안락사 허용에 따른 논란은 유엔 인권위원회를 필두로 하여 전 세계적으로 일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엄격한 기준을 세워 남용을 방지한다. 소설 속에서의 사건과 같은 악용이 진짜로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은 나라의 절망적인 사람들은 지금도 암스테르담으로 모여들고 있다. 육로건 비행기로건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이들은 반드시 한번은 거쳐 가야 하는 중앙역. 그곳은 그들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역이기도 할 터이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이들은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중앙역.

 

 

공정한 거래를 주장하다 - 막스 하블라르 재단

이동식 장터인 페어트레이드 SRV는 공정무역 행사의 명물이다.


 

‘공정무역 커피’라는 이름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지금은 거대 규모의 커피체인점에서도 공정무역 커피를 내세운다.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문화가 정착한 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커피농장의 노동착취에 대해 인식하게 된 역사는 짧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1859년에 물타툴리의 [막스 하뷜라르, Max Havelaar], 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커피경매]라는 소설이 출간되면서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에서 실행되던 ‘강제재배제도’의 폐해가 논란이 되었다.


소설 속에서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의 권리를 위해 열정적으로 투쟁한 인물이었던 ‘막스 하뷜라르’의 이름은 이후 1986년 공정무역거래를 위해 세워진 무역회사의 이름이 되었다. 중간상인의 과도한 착취를 막아 제3세계 커피 재배자들의 원두값을 보장해준 이 재단은 호응에 힘입어 카카오, 초콜릿,차, 꿀, 바나나로 활동 품목을 확대하고 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페어트레이드 위크’가 열린다. ‘스티칭 막스 하뷜라르’ 재단의 주관 하에 댐 광장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 행사에는 전 세계 페어트레이드 단체가 모여든다. 다채로운 페어 트레이딩과 유기농 제품을 구할 좋은 기회이고, 여러 뜻깊은 이벤트들이 연이어 벌어진다. 이 재단은 페어트레이드 레스토랑 주간, 페어트레이딩 결혼식 등도 벌이고있다.

 

 

투명한 매춘을 지향하다 - 드발렌 지역의 홍등가

네덜란드의 자유 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바로 시내 한복판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홍등가이다. 관광코스의 하나로 공인되었을만큼 밝고 발랄하게 조성된 이 거리는 암스테르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네덜란드의 속내를 잘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드러난 홍등가와 마약 가게로 그들의 사회를 재단하지 않기를 충고한다.


암스테르담의 매춘부들의 노동조합 이름은 ‘붉은 실(Rode Draad)’이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스스로의 권익을 옹호한다. 질병 휴가, 세금 혜택, 연금, 임신 휴가, 월경 휴업 시 보상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에서 그들은 조합원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활동에 따른 세금을 내고, 허가를 받지 않았을 경우 엄격하게 제재된다. 덕분에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는 음침한 범죄의 그림자를 벗겨 냈다. 그곳에는 음성적인 매춘시장은 없다.


이러한 합법화를 통해 매춘이 범죄와 결탁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지만, 최근 들어 정책이 변화하고 있다. 시 당국은 2천500만 유로, 약 324억 원의 예산을 들여 홍등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1개 업소를 사들였다. 합법적이지만 “지나치게 많은 매매춘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시 당국의 판단이다. 이에 대한 홍등가 노동조합의 반발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관광의 명소로도 유명한 드발렌의 축소가 암스테르담의 ‘자유로운‘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 도시에서 매춘은 정식 직업이다.

 

 

전 세계로 나아가다 - 암스테르담 항

세계를 향한 네덜란드인의 열망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전설을 낳았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세계적 차원에서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항구가 바로 로테르담 항구이다. ‘항만의 경쟁력 종합평가’에서 전 세계 항만 중 1위의 경쟁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며 부동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로테르담 항구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상징이다.


암스테르담에 자리 잡고 있는 암스테르담 항은 로테르담 항을 보완하는 위치이기는 하지만, 세계 화물 이동의 절반, 즉 50%에 달하는 르아브르-함부르크라인(Le Havre-Hamburg Range)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항구이다. 이 두 개의 항구를 통해 운하와 육상운송, 바닷길은 거미줄처럼 서로 엮인다.


잘 발달된 항구와 물류는 세계를 네덜란드로 끌어들이는 한편, 네덜란드인을 밖으로 내몰았다. 진정으로 세계화된 인간, 네덜란드인들은 전 세계 곳곳으로 나아갔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17세기 당시 세계 무역을 휘어잡았던 그들은 인구 200만 명의 절반인 100만 명이 해외를 향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래서일까. 북해에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전설이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던 다양한 버전의 전설들은 1826년 영국에서 에드워드 피츠볼에 의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출간되기도 했고, 1839년에는 프레드릭 머리엇에 의해 [유령선]으로 탄생하기도 했다. 결국 이 강력한 이미지는 바그너에 의해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으로 완성되면서 현대에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국제적 차원의 관심, 첫 발자국을 딛다 - 라이드세플라인(Leidseplein)

네덜란드인들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하여 한결 같다. 암스테르담과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티베트의 독립에 그들이 가지는 관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아래 있는 티베트의 독립운동은 망명한 티베트인들에 의해 꾸준히 벌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국제적 지원도 적지않다. 그중 ‘국제 티베트 원조기구’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암스테르담. 2004년에 설립되어 국제 티베트독립운동의 유럽지부를 맡고 있다. 


이러한 조직을 통한 상시적인 활동 이외에도,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이벤트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1999년 암스테르담 라이 파크할(Rai Parkhal)에서 열린 [프리 티베트 99] 콘서트만 해도 블러, 앨러니스 모리셋,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 등의 유명 뮤지션들이 참가하여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중에서도 색다르게 눈길을 끌었던 이벤트는 ‘자유를 위한 발자국(footprintsforfreedom.com)’. 디자이너인 브리트 다스(Britt Das)라는 여성이 티베트의 독립 열망을 지지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라사까지 1만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1년 동안 걸어서 간 이 이벤트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출발지점은 라이드세플라인(Leidseplein) 지구였는데, 나이트라이프로도 유명한 이곳에는 출발점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하다 - 렘브란트 하우스 미술관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이 활약하던 17세기는 네덜란드의 황금의 세기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전 유럽의 지식인들이 몰려들다시피 했는데, 가장 큰 이유로 당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자신의 나라에서 도피해온 수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암스테르담에서 활발하게 토론을 하며 지식을 나누었고, 그 결과물들이 속속 출판되었다. 직접 암스테르담으로 올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저작물을 이곳으로 보내 출판하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출판 중심지의 하나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데카르트, 로크, 스피노자 등이 당시 활발하게 활동한 철학자들이었다. 


렘브란트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렘브란트는 인간의 감정과 영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고, 주로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들임에도 색다른 해석을 부여했다. 유다는 단순히 배신자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상이었고, 예수 또한 성스럽기만 한 자리를 벗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자를 그릴 때도 이상화된 여성미는 관심이 없었다.


렘브란트는 자유롭게 기존의 관습을 벗어난 작품을 그렸다.

 

미인이라 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여성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추의 미학'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의 그림은 당시의 관행을 힘차게 뛰어넘었기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현재에는 그의 예술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그의 탁월한 판화와 드로잉 작품들은 렘브란트 하우스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숨겨주고 보호해주다 - 안네 프랑크의 집

[안네프랑크의 일기]는 나치의 만행을 폭로하는 대표적 작품으로, 위조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암스테르담에는 당시 암스테르담을 점령했던 나치의 폭력을 피해 숨어 살던 안네 프랑크의 집이 있다.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이자 유대인 사업가였던 오토 프랑크는 집을 개조하여 비밀공간을 만든 뒤 그곳에서 2년간 숨어 지냈다. 프랑크 가족과 친구가족, 이렇게 두 가족은 집 뒤쪽의 체리공장 창고와 연결된 이 아지트에서 숨죽인 나날을 보냈고, 그 당시의 기록은 안네의 일기에 생생하게 적혀 있다.


그들의 안전은 고작 2년간 보장되었을 뿐이다. 한 밀고자에 의해 아지트에서 끌려나온 그들은 포로수용소로 잡혀갔다가 아버지 오토 프랑크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했다. 겨우 살아나온 오토 프랑크는 프랑크 회사의 여사원이 몰래 숨겨놓았던 안네의 일기를 받게 되고, 결국 이 책은 출간되어 6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면서 전 세계에 나치의 만행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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