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이 '러시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로 날아간다.

대한항공은 오는 29일부터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리는 바이칼 호수로 유명한 이르쿠츠크에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2회씩 정기 직항편을 신규 취항한다.

러시아와 몽골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는 바이칼 호수의 관광 기점으로, 동시베리아 최대의 도시로 경제·문화의 중심지이자 시베리아 철도의 주요 역 중 하나다. 또 '풍요로운 호수'의 의미를 지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민물 호수로, 특히 여름철에 시원함까지 느낄 수 있어 전 세계 관광객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아름다운 관광지이기도 하다.

기존에 바이칼 호수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톡 등 다른 러시아 도시들을 경유해서 이동할 수밖에 없어 시간과 비용이 두 배로 들었다. 그렇지만 대한항공의 이번 신규 직항편 취항으로 관광객들의 바이칼 호수 여행이 더욱 편리해질 전망이며 이번 직항노선 취항을 통해 러시아 관광 수요가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한항공은 인천-이르쿠츠크 노선에 145석 규모의 B737-800 기종을 투입하며, 출발편은 밤 8시 35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해 다음 날 오전 0시 45분 이르쿠츠크 공항에, 도착편은 오전 3시 이르쿠츠크 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오전 6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알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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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나무알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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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9월 23일 이르쿠츠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5박 6일 일정으로 바이칼 호수와 알혼섬을 여행했다.

바이칼은 러시아의 남쪽에 있는 호수로, 북서쪽의 이르쿠츠크 주와 남동쪽의 부랴트 공화국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이며 이름은 타타르어로 '풍요로운 호수'라는 뜻이다. 약 2500만~3000만 년 전에 형성된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담수호이다.

호수마을 리스트비안카서 바이칼 호 조망으로 하루 마무리



리스트비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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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비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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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비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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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우리는 호수마을 리스트비안카로 갔다. 시베리아 전통 목조 건축인 딸찌 목조건축 박물관과 바이칼호수 박물관, 노천 시장 등을 둘러보고 체르스키 전망대에 올라가 바이칼호수를 조망하는 것을 끝으로 하루 일정을 마쳤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호숫가엔 색색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환바이칼 열차를 타러 간다.잠이 안 와 뒤척이다가 안정제를 먹고서야 잠들었다.



환바이칼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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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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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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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 바이칼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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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은 환바이칼 열차를 타는 일정이다.슬류지안카~바이칼역을 9시간 달리는 환바이칼 열차는 3칸짜리 빨간띠를 두른 미니열차였다. 바이칼 호수를 달리며 아름다운 장소에 정차해 잠깐씩 산책을 하는 코스로 앙카 쏠카 철교, 빨라빈늬 고립마을, 슈미하터널 등을 둘러본다.

열차에서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과 단풍든 자작나무를 바라보느라 하나 같이 정신줄을 놓았다.

점심은 한식 도시락. 이틀

만에 먹는 김치가 왜 그리 맛있는지. 나는 한국을 떠나서는 김치 때문에 못 살 것 같다.

그리고 보드카. 짜릿하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어야 하는 데 취기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가슴에 담고

우리는

열차에서 내려 저녁 식사 후 '반야'를 체험해 보기로 했다.바이칼 호수로 뛰어드는 시베리아 사냥꾼 목욕법이다.깜깜한데 강물로 뛰어들라니?반야는 자작나무로 만든 사우나에서 나뭇잎으로 서로 등을 두들겨 주는 친절한 목욕법이다. 나는 쑥스러워 반바지를 입고 했다. 암튼 벗고 만나니 더 친해지는 것 같았다.

바이칼 호수의 33개 섬 중 가장 보석 같은 섬... 알혼섬



알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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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혼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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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찍기사진찍기에 열중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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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우리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알혼섬에 입성한다.날씨가 오늘따라 한껏 분위기를 연출한다.먹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분다. 이런 회색빛 하늘을 무척 좋아한다.알혼섬은 바이칼 호수의 33개 섬 중 가장 보석 같은 섬이다.후지르 마을을 지나 부르한 바위를 올라갔다.여기저기 사랑의 징표가 조약돌로 새겨져 있었다.그들도 우리처럼 사랑을 간곡히 원한다.



통나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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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혼섬에 들어와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왔다. 슬프게도 원래 예약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하루 묵을 예정인데 이틀 묵는 여행객이 왔다고 우리의 예약을 취소시켜 버렸다. 깜찍한 예약법이다.그래서 일정에도 없던 최고의 깨끗하고 예쁜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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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

아 ,글씨 ~!!"여기서 사단이 났다.저녁에 샤워기를 틀어대니 불이 나갔다.새까만 정적 속에서 샤워를 하다 말다 찬물로 8차례 하다 보니 정신이 반쯤 나갔다가 돌아왔다.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와 보지 않는다.나는 큰소리로 "사람 살려 ~"를 외쳤지만, 돌아오는 건 옆방 친구들의 "전기가 다 나갔나 봐"라고 외치는 소리뿐이었다.이렇게 돼지 목 따는 소리로 울부짖을 때 옆방엔 고귀하신 선생님이 계셨다는 것을 다음날 알고 얼마나 창피하던지.

저녁 식사 후엔 늘 그래 왔듯이 술과 차로 담소를 나눈다.

술을 아주 잘 먹는 언니들은 서로 자기가 술고래라고 뻐기고,

술을 아주 못하는 나는 안 취한 척 연극을 해야 했다.

이 자리에서 기죽지 않으려면. 하하.

내 가슴은 아직도 자작나무 숲을 헤치고 다닌다



무심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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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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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의 나라 바이칼에 왔으니 한 컷쯤은 넣어줘야 할 것 같아서 올렸는데... 자작나무 사진을 찍기가 참 어렵다.

다음날, 숙소에서 나와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침에 사진을 찍으러 바닷가에 갔다가 열쇠를 잃어 버렸다. 200루불을 내지 않으면 방문을 안 열어주겠다는 쥔장의 엄포에 200불을 준비해 나갔는데... 해운 언니가 열쇠를 집 마당에서 주었다고 가서 열어보라고 한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물론. 아주 작은 해프닝들이 여행의 양념이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내 가슴은 자작나무 숲을 헤치고 다닌다. 보리 언니가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 가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떨릴 때 가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은행에 대출도 있고 현금 서비스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껏 잘 살아오지 않았나? 나는 또 여행 보따리를 쌀 것이다. 두 달을 못 넘기고...

알록달록, 테트리스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바실리 성당의 별명은 일명 ‘테트리스 성당’ 이다. 유명한 게임 테트리스의 첫 화면에 나오면서 수많은 사람의 인상에 선명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중독 시켜 “KGB의 음모다”라는 말까지 들었던 테트리스의 알록달록함은 이제 모스크바의 한 면을 이루고 있다. 바실리 성당의 이미지뿐 아니라, 힘차게 다리를 내뻗는 러시아 민요춤의 이미지도 테트리스의 고향이 모스크바임을 확연히 보여준다.


다양한 색의 도형, “테트로미노”의 향연인 테트리스도 처음 만들었을 때는 색깔도 소리도 없었다. 테트리스를 만든 알렉세이 파지노프는 소비에트 과학원에서 음석인식과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연구원으로 러시아의 퍼즐인 ‘펜토미노’에서 영감을 얻어 1984년에 처음 이 게임을 개발했다. 이후 동유럽, 헝가리를 거쳐 서방으로 넘어가면서 명실상부한 역대 최고의 게임으로 인정받았다. 1989년 미국 소프트웨어 배급협회에서 최초로 4개 부문을 석권하기도 한 이 게임은 아케이드 버전, 휴대용 게임, 콘솔 게임, 모바일 게임 등 무려 59개의 게임플랫폼에서 위용을 떨쳤다. 수많은 법정분쟁만큼이나 요란한 인기였다. 한 게임잡지는 이 게임에 대해 “믿지 못할 만큼 간단하고 방심할 수 없을 정도로 중독적이다”라고 논평했다.


당시 개인의 지적재산권을 인정하지 않던 소련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게임의 인기와 상관없이 돈을 벌지 못했던 알렉세이 파지노프는 이후 미국으로 넘어가 96년경부터 마이크로소프트와 테트리스 컴퍼니에서 일하면서 게임개발자들의 영웅으로 [해트리스], [클락웍스] 등의 게임을 만들며 계속 활동하고 있다.



붉은, 광장

붉은 광장”은 모스크바의 붉은 심장일 테다. 크렘린의 전면에 펼쳐진, 레닌의 묘가 있는 광장. 예전부터 차르의 선언,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 지금도 메이데이와 같은 행사나 사열식이 이루어지는 곳. 그러나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 광장은 붉지 않다. 바닥에 깔려있는 포석은 다갈색이며, 규모도 그리 크지 않다. 가장 넓은 부분이라고 해봐야 겨우 너비 100m, 길이 500m 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붉은 광장이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말이다. 그 이전에는 상업광장, 화재광장 등으로 불렸다. “끄라스나야”는 고대 슬라브어로 ‘붉은’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결혼식을 따르는 행렬을 ‘붉은 행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를 ‘붉은 아가씨’라 부르기도 한다.

붉은 광장에서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붉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예술품”으로 불리는 바실리 성당,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굼 백화점, 역사박물관과 크렘린 성벽을 배경으로 한 레닌묘, 스빠스까야 탑이 붉은 광장을 중심으로 한곳에 모여 있다.


세라믹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바실리 성당에는 이 성당을 너무나 사랑한 이반 대제가 또다시 이토록 아름다운 건물이 지어질까 두려워 건축가 두 명의 눈을 뽑아버렸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후 1919년 8월 KGB가 성당의 성직자를 총살시키고 1929년에는 역사박물관에 넘겨지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1936년에는 철거의 위기에 직면하기도 하였으나 간신히 위기를 넘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0년부터는 이 성당에서 예배가 다시 시작되었다.


레닌묘가 있는 크렘린 성벽 아래는 일종의 공동묘지이다. 현재 230여 개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데, 트로츠키, 스탈린, 흐루시초프, 막심 고리키 등의 흉상을 그들의 무덤 앞에서 볼 수 있다. 레닌묘는 현재 붉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안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레닌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검은, 크렘린

냉전 시대, 널리 알려졌던 소련의 이미지는 ‘크렘린’과 ‘검은’을 찰떡처럼 붙여놓았다. 그들의 음험함,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함, 비열한 계산속 등을 몽땅 ‘검다’는 표현 속에 우겨 넣어 크렘린 위에 발라버린 것이다. 그러나 사실 크렘린은 검지 않다. 온갖 아름다운 성당과 건물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현재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다채로운 색으로 다가간다. 원래 크렘린의 의미는 고대 러시아에서 쓰이던 보통명사로, ‘도시 내부의 요새, 성벽’이다.

러시아 내의 오래된 도시들은 다 크렘린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모스크바의 크렘린이 가장 유명하며, 러시아어 대문자로 시작할 경우 보통 모스크바의 크렘린을 말한다. 1156년 모스크바를 만들었다고 알려진 유리 돌고루키 공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 이곳은 러시아의 역사의 증언자다. 귀족들의 결혼식, 짜르의 대관식, 온갖 출정식 등의 공식 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독특하게도, 크렘린 내부에는 성당이 많다. 3대 성당인 성모승천교회와 성수태고지교회, 대천사교회 이외에도 많은 교회당들이 자리 잡고 있다. 모스크바의 정중앙이라고 알려진 곳에 있는 높이 100m의 이반대제종탑은 한때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레닌이 기거하기도 했던 노란색의 화려한 대통령 궁에서는 지금도 대통령이 집무를 보고 있어 관광객의 출입을 막고 있다. 현대식 디자인의 크렘린 대극장도 어깨 겯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구상에서 실전용으로 만든 것 중에는 가장 크다고 알려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거대한 포와 한번도 울리지 못한 거대한 종도 볼 수 있다. 너무 커서 종탑에 설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전시용으로만 놓여 있다고 한다.


크렘린의 아름다운 건물들은 제각각의 매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푸른 막대기가 숨겨진, 야스나야폴랴나

모스크바의 쿠르스카야 역에는 야스나야폴랴나로 가는 특급열차가 있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브론스키는 전쟁터로 떠나기 위해 이 역에서 이별을 한다. 야스나야폴랴나는 톨스토이의 생가와 묘지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 가면 대문호 톨스토이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검은 소파와 톨스토이의 무덤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이곳에는 푸른 막대기의 전설이 내려온다. 톨스토이의 맏형 니꼴라이는 “이 숲에는 푸른 막대기가 숨겨져 있는데, 그 막대기를 찾은 사람은 전 세계 인류를 이해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늘 말해왔다. 어린 톨스토이와 그의 형제들은 그 막대기를 찾아 영지의 숲 속을 돌아다니곤 했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도 그 막대기를 잊지 못하던 톨스토이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딸에게 바로 그 숲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비석도 없이 조촐한 그의 무덤은 그 유언에 따른 것이다.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톨스토이는 꽤 심각한 노름꾼이었는데, 한번은 노름 끝에 야스나야폴랴나 저택을 잃고 말았다. 그에게 있어 자기가 나고 자란 이곳을 잃는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태어난 영지인 야스나야폴랴나를 특별히 사랑했다.


그는 일기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야스나야폴랴나 저택-나는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나 자신에게 구역질이 나서, 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이다.”라고 쓰며 괴로워했다.

그는 결국 백방으로 수소문하다 소설 한 편을 급히 써주기로 하고 계약금으로 영지를 되찾았다. 농노가 해방되고 지주들의 토지가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꽤 넓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그였지만, 그가 이 땅에 가졌던 애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 이 에피소드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지구의 정신적인 자오선은 야스나야폴랴나를 지나간다”고 한 러시아의 시인의 말은, 톨스토이에 대한 존경의 뜻이자 그가 뿌리를 내렸던 이 땅에 대한 경의의 뜻이라 봐야 할 것이다.


몇 차례 모스크바에서 야스나야폴랴나까지 도보여행을 하기도 했던 그는 결국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82세의 나이로 영지를 떠난 그는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아스타포보라는 작은 역의 역장 관사에서 눈을 감았다.



별빛 속을 날던 기억, 모스크바 우주박물관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는 유리 가가린이다. 그는 1961년 4월 12일 우주선 바스똑-1호를 타고 1시간 29분 만에 지구 상공을 일주하고 귀환하였다. 냉전상황 속에서 미국과 우주를 향한 치열한 경쟁을 하던 소련에서 그는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아쉽게도 1968년 비행훈련 중 추락사하였는데, 그 뒤 유명한 혁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크렘린 벽에 묻혔다. 모스크바 시내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별빛 속을 가르는 우주에의 꿈은 2차대전 이후의 소련에게 절박한 것이었다. 미국과의 자존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총력을 다하던 그들은 1957년 세계 최초로 지구궤도에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했다.

스푸트니크 2호는 한발 더 나아가 최초로 생명체를 태운 우주선으로 계획되었고, 거리의 개인 ‘라이카’가 우주를 여행하는 최초의 지구생물체로 선발되었다. 라이카 덕분에 사람들은 무중력 상태에서도 지구 생물이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라이카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애초에 돌아올 수 있도록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우주선이기도 했지만 우주선의 문제로 발사 후 실내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 다섯시간 만에 죽고 만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라이카가 독극물이 든 먹이를 먹고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모스크바 우주박물관은 세계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우주정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4년에 세운 100m 높이의 거대한 ‘스페이스 오벨리스크’ 하단부에 자리잡고 있다. 기념비의 정상에는 우주선 모형이 위풍당당하게 올라서 있다. 우주박물관에는 유리 가가린의 초상화와 인류 최초의 여자 우주비행사 발렌찌나 테레슈꼬바의 흉상, 최초의 자동월면차 루나호트-1호, 라이카를 기념하는 조형물, 우주선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우주정복에 대한 소련의 집념은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낳았다.



노랑 자켓의 사나이, 마야코프스키

마야코프스키는 아방가르드한 포스터 디자인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의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는 모든 것이 강렬했다. 시가 강렬했고, 인상이 강렬했고, 사랑이 강렬했고, 혁명적 태도가 강렬했고, 서른여섯의 나이에 권총으로 마감된 죽음이 강렬했다. 미래파 운동을 주도하고 독특한 실험 시를 쉬지 않고 발표했던 그는 이미 열다섯 살에 노동당원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모스크바 미술학교에서 열 살 많은 친구인 미래파 화가 다비드 브를류크를 만난 그는 1912년 브를류크가 작성한 미래주의 선언문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에 서명하고 시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14년 그는 밝은 노란색 블라우스를 입고 등장했다. 주변의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시인인 스테판 쿠즈바이트는 “마야코프스키의 노란색 셔츠”라는 시를 써 그 놀라움을 표현했다. 이는 미래주의 시운동을 위한 해프닝으로, 그의 동료는 뺨에 새 그림을 그리고 등장하기도 했다. 그 사건에 대해 마야코프스키는 말했다.

“나는 양복을 가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꾀죄죄한 셔츠가 두벌 있었을 뿐이다. 경험에 비추어 넥타이로 가리면 좀 나을 것 같았다. 돈이 없었다. 누나한테 노란색 천을 얻어 몸에 감았다. 성공. 이는 즉, 인간에게서 가장 눈에 띄고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넥타이라는 뜻. 따라서 넥타이를 확대하면 성공도 확대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넥타이의 크기란 한정되어 있으므로 나는 꾀를 부렸다. 즉, 넥타이 같은 재킷, 혹은 재킷 같은 넥타이를 만들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결국 그의 노란색 블라우스, 혹은 셔츠, 혹은 튜닉이라 기억된 그의 옷은 넥타이의 확대판이었던 셈이다. 시뿐 아니라 미술에까지 걸쳤던 그의 작품들은 마야코프스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형형색색, 빅토르 최 골목

대학로나 명동에 비교되곤 하는 모스크바의 번화가 아르바트 거리에는 빅토르 최의 이름이 붙은 작은 골목이 있다. 그가 무명시절에 노래를 불렀다는 골목이다. 길이는 채 100m가 안 되지만 빅토르 최를 잃은 슬픔은 깊다. 매년 8월 15일은 그가 28세의 나이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은 날로,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은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젊은이들로 늘 북적북적하다. 그를 추모하는 벽, 스찌나 쏘야는 그에게 바치는 낙서가 형형색색 아로새겨져 있다. 아직도 꽃다발이 바쳐지고, 아직도 담뱃불을 향처럼 피워놓는 곳. 그의 팬들은 관광객의 호기심에 찬 카메라를 거부한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최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록그룹 키노의 리더로, 유명한 록가수다. 러시아 록 음악의 최고참인 유리 솁축도 “러시아 록 음악의 시초”라고 인정하는 이다. 소련 역사를 움직인 13명 중의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빅토르 최는 러시아 록의 전설이자 영웅이다.

고려인 2세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미지인 그의 노래 몇 곡은 한대수, 윤도현 등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정치적인 메시지로 가득 찬 반항적인 가사의 곡으로 젊은이들을 흔들었던 그는 영화를 찍기도 했으며, 영화 홍보를 위해 미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굉장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실에서 화부로 일하며 살았는데, 그것은 그가 소련정부의 환영을 받지 못했던 데도 그 이유가 있다. 소련의 잡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그의 사후 그에 대해서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록커가 빅토르 최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라고 평했다.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인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품이 300만점이고 다 돌아보려면 20㎞를 걸어야 한다. / 백야나라 이현희씨·노랑풍선 강영종씨 제공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은 볼셰비키 혁명 후 시베리아 폐광촌에 감금됐다. 혁명 군대는 백러시아군이 황제를 구하러 접근해오자 1918년 7월 16일 밤 황제 일가를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다. 간수가 황제를 향해 "너를 총살하겠다"고 외쳤다. 놀란 황제가 "뭐라고?" 묻자 간수는 "이거다!"라며 권총을 쐈다. 황후, 5명의 아들 딸, 그리고 두 명의 시종도 죽임을 당한 후 땅에 묻혔다.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1998년 7월 DNA 검사를 거쳐 니콜라이 2세 일가로 확인된 유골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성당 묘지에 안장했다.

지난주 가본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성당은 로마노프 왕조의 표트르 대제(大帝·1682~1725년 재위)가 세운 요새 안에 있다. 성당 지붕엔 금으로 도금된 높이 122m의 첨탑이 세워져 있다. 요새는 오랫동안 정치범 수용소로 쓰였는데 도스토옙스키는 1849년 이곳 교수대에 섰다가 사형 직전 황제 특사가 달려와 형 집행이 중단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사방이 모두 금칠로 장식된 예카테리나 궁전의 방. / 백야나라 이현희씨·노랑풍선 강영종씨 제공
며칠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보면서 머릿속을 맴돈 의문이 있다. 어떻게 이렇게 호사스러운 도시가 300년간 유지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수탈적(收奪的) 풍요'였을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딸 엘리자베타는 황위에 오른 후 예카테리나 궁전을 지었다. 모두 55개의 방을 갖추고 있는데 846㎡의 가장 큰 홀을 들어가보니 사방 벽이 모두 금칠로 장식돼 있다. 서재로 썼다는 호박(琥珀·amber) 방은 세 벽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빈틈 하나 없이 호박으로 모자이크 돼 있다. 엘리자베타는 1만3000벌의 옷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35년 이상 매일 한 벌씩 갈아입을 수 있는 만큼이다. 황실과 귀족의 호사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과 농노들은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페테르부르크의 최대 관광 포인트는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라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다. 에르미타주를 완공한 예카테리나 2세(1762~1796년 재위)는 에르미타주의 방마다 한 명씩 82명의 남자 첩을 거느리고 살았다고 한다. 에르미타주엔 300만점의 미술·조각품이 전시돼 있다. 거기서 피카소의 '수녀와 창녀', 마티스의 '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 같은 작품을 구경할 수 있었다.

유혈 현장의 구세주 성당의 모습. 내부는 성서의 이야기들을 담은 308점의 모자이크 작품으로 벽면과 천장이 장식돼 있다. / 백야나라 이현희씨·노랑풍선 강영종씨 제공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300년 전 세운 계획도시다. 표트르는 페테르부르크 말고는 돌로 건물 짓는 것을 금지한 후 전국의 석공과 석재들을 모아들였다. 갯벌 위에 도시가 지어지는 동안 노역에 동원된 4만명의 포로와 농노가 죽었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 건축물인 이삭 성당은 프랑스 건축가 몽페랑이 1818년부터 40년 동안 지었다. 성당의 돌기둥들은 한 덩어리의 바위로 만들어졌는데 기둥 하나가 114t이나 된다. 돌덩어리들은 핀란드에서 배로 운반해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을 닮으려고 노력한 도시다. 곳곳에 성당, 궁전, 박물관, 미술관이 있고 네바강과 운하들을 따라선 유람선들이 오간다. ‘북방의 베네치아’로 불린다. 시가지의 5~8층 건물들은 귀족들 저택이었다. 공산혁명 후 정부가 저택들을 몰수한 뒤 칸막이를 치고 화장실을 설치해서 서민들에게 분배했다. 얼마 전 러시아의 천연가스회사 가스프롬이 시 외곽에 100층이 넘는 빌딩을 지으려다가 유네스코의 반대로 무산됐다. 페테르부르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1811년 지어졌다는 카잔 성당에서 들은 성가(聖歌)도 인상적이었다. 2층 벽면에 테라스처럼 튀어나온, 한 평도 안 돼 보이는 공간에서 5명의 성가대가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슴이 밑으로 푹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님도 대꾸하듯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구름 속에서 나오는 목소리 같았다. 모스크바가 볼쇼이라면 페테르부르크는 마린스키다. 마린스키 발레단의 ‘라실피드’라는 작품을 감상하면서 발레는 발이 아니라 팔로 하는 예술이라는 걸 알게 됐다. 여주인공이 팔과 손의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감정 표현이 그렇게 다양하고 감동적일 줄은 몰랐다.

대한항공이 12월 8일부터 동계시즌으론 처음으로 매주 화·토요일 두 차례 인천공항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직항 노선을 운항할 예정이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수·일요일 오전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1588-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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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끝자락서 안나가 묻는다… 당신은 바른가

"너희들. 인간이 왜 나쁜 사랑에 그렇게 매혹되는 줄 알아? 절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카슨 매컬러스의 말이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비텝스키(Vitebsky) 기차역.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비텝스키(Vitebsky) 기차역. 19세기 러시아 고관의 아내인 안나는 기차역에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안나는 불륜이라는 비난에도 남편과 자녀를 버리고 사랑을 좇았지만, 브론스키마저 자기를 떠나려 하자 스스로 기차에 몸을 던진다. / Corbis·토픽이미지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을 읽던 밤, 나는 별수 없이 불륜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나쁜 사랑의 대표 격으로 기껏 불륜, 외도 같은 말만 떠올리는 내 빈약한 상상력이 한심하긴 했지만. 그리고 "불륜이란 다른 생에 대한 갈망" 이라고 말하던 광고인 박웅현을 떠올렸다. 그가 '안나 카레니나 프로젝트'를 가지고 한국신경정신과 협회가 주관하는 박람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나는 좀 의아했다. 그래서 "왜 광고 회사가 신경정신박람회에 부스를 만들어요?" 하고 되물었다.

"안나가 불륜 끝에 자살하잖아요. 안나의 얘기에 우리 생활 속 우울증의 이유가 거의 다 나와요. 그걸 현실에 적용해 본 거예요. 예를 들어 안나랑 브론스키의 만남을 어떻게 했느냐면, 나는 지금 결혼해서 한 5년차쯤 되고 아들과 남편이 있고 잘 살고 있다 쳐요. 그런데 어느 날 청담동 파티에 갔는데 정우성이 와서 나한테 호감을 표하네? 어떡할 겁니까.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또 마주쳤는데, 잠깐 시간 있느냐고 하는데 어떡할 거야? 정우성 같은 그 남자랑 얘기를 해봤더니 어라, 잘 통하네? 어떡할 겁니까! 이게 지금 다 안나예요. 수많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있죠. 청담동 압구정동에도 있고, 미아리 광화문에도 있고."

그의 얘길 듣다가 한참을 웃었다.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 부르는 것들을 읽고 보는 건 무엇 때문일까. 고전이 전화번호부만 한 그 악랄한 두께로 보통 사람을 질리게 하는 건 세계 공통인데도 말이다. 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다소 불량스럽게 얘길 하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전쟁'의 19세기 러시아판이다.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관대작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자기와 이혼해 주지 않는 남편과 어린 자식들 사이에서 지독한 불행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달리는 기차에 스스로 몸을 날려버린다는 내용이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마침표를 찍은 건 마흔아홉. 톨스토이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세계관이 크게 바뀌는데,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통렬한 심정으로 참회록을 쓰기에 이른다. 참회록 집필 후,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전 인류에게 훈계하는 계몽주의적 스승으로 극적인 변환점을 맞는다. 굳이 톨스토이가 안나를 비극적 죽음으로 내몬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그녀의 사랑이 불륜이었기 때문일까. 아마도 교과서적 답이라면, 비극적 죽음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의 연애와 결혼 제도, 생활 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는 답이 아니라 자기만의 질문을 끝없이 재발명하기 때문이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본 건 우연한 일이었다. 여의도에 생긴 몰(mall)에서 회의 중 발생한 심각한 문제 때문에 좀 많이 늦어진다는 친구의 문자를 받던 날, 나는 커피를 마시는 대신 영화를 보았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안나로 등장하는 이 영화가 소설을 얼마만큼 반영했느냐가 아니라, 나는 그녀가 안나의 비극을 얼마나 훔쳐냈는지를 보고 싶었다. 안나를 유혹하는 브론스키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안나의 남편 카레닌 쪽에 훨씬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름다운 남자의 대표 격인 '주드 로'가 브론스키가 아닌 '카레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속 그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세월이 주드 로에게 그럴 듯한 주름살을 만들어주는 동안, 내 편견과 생각도 조금씩 바뀌었다는 것을 말이다. 삼십대의 마지막에 보는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읽을 때마다 예전에 그은 밑줄이 달라지면 달라질수록, 좋은 소설이란 편견을 꽤 오랫동안 유지해온 나 같은 사람은 안나 카레니나를 좋은 소설이라 권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역시 좋은 소설이다. 왜냐하면 마침내 나는 십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테레사가 자기 '충견' 이름을 왜 '카레닌'이라고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레닌은 테레사가 보기에 타고난 희생양이었고, 그녀는 자신을 이 19세기 러시아 남자와 동일화한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는 순간까지 친구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안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이 기차와 함께 끝나는 그토록 수미일관한 풍경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이 기차에서 끝날 리 없다. 삶이란 우연과 플롯을 분별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사랑이나 이별이란 인과관계와 하등 상관없는 '돌연' 혹은 '불현듯'이란 말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 포스터

극장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를 보다가 나는 안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 세계의 여자들이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산다는 걸 불현듯 훔쳐본 사람의 눈빛으로 극장을 나오는 여자들을 세세히 바라봤다. 혹시 친구가 늦게 오는 건 회의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은 아닐까? 멀리 친구 모습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장시간 회의에 찌든 그녀가 브론스키와 춤을 추던 안나처럼 아름다워 보였던 건 아마도 내 불온한 상상력 덕분이었겠지만.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과 더불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이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혁명에 이르는 역사적 과도기에 놓인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풍속과 내면생활을 150명이 넘는 등장인물과 사실적인 묘사, 엄청난 깊이와 힘으로 반영해냄으로써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당대 작가들에게서 '완전무결한 예술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돼 역사적 시대에 예술적 공식을 이끌어낸 작품의 전범으로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안나 카레니나 1
국내도서
저자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 연진희역
출판 : 민음사 200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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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악의 겨울 최고의 겨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알몸으로 눈밭을 뒹구는 사우나를 경험할 수도 있는 곳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알몸으로 눈밭을 뒹구는 사우나를 경험할 수도 있는 곳이다.
※ 최고의 겨울 블라디보스토크

2003년 겨울. 이듬해 있을 영화 '태풍'의 촬영을 준비하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전구 하나부터 열차와 건물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공산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도시는 나를 잔뜩 긴장시켰다. 워낙 추운 날씨라 사진이나 TV에서 보았던 둥그런 털모자를 쓰지 않으면 머리가 터진다고 가이드가 끔찍한 엄포를 놓았다. 어쨌건 미리 그곳의 유력 인사들과 교분을 쌓기 위해 문화 담당 부시장과 함께 한 재력가의 저택을 방문했다. 한 시간 가량 차바퀴가 푹푹 파이는 눈길을 달려 군복의 남자들이 자동소총을 들고 선 게이트를 통과한 다음 저택의 본채 옆에 지어진 한 목조 가옥으로 갔다. 그곳은 특별히 손님을 접대할 때 쓸 목적으로 지어진 사우나였다. 우리를 환영해 준 주인과 함께 보드카를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사우나실로 들어갔다. 친구가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기에 행여 실수를 할까 긴장한 탓인지 편안한 기분이라기보단 일종의 통과의례를 치르는 느낌이었다. 붉게 달구어진 석탄 덩어리에 물을 붓자 치이익~ 하고 순식간에 좁은 사우나실이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찼다. 이어, 몸에서 송글송글 땀이 나오기 시작하자 주인이 자작나무 가지를 들더니 나더러 의자에 누우라고 했다. 그러곤 거기(?)를 덜렁거리며 나뭇잎이 달린 가지로 내 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뜰로 나오라고 했다. 아직도 술기운이 남은 터라 에라 모르겠다 싶어 알몸인 채로 따라 나갔다. 시키는 대로 높이 쌓인 눈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내 몸을 던지자 그대로 눈 속에 푹 파묻혔다. 그러곤 으아악~ 아악~ 고함을 치며 눈 속을 뒹굴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눈 속의 벌거벗은 자유로움! 난 아직도 블라디보스토크의 그 겨울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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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쉽게 다가가는 러시아의 양대 보고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는 러시아 최대 도시다. 도시의 이름은 모스크바강의 이름을 따라 명명됐다. 1147년 러시아 정교 수도사들이 기록한 연대기에 처음 그 이름이 등장한 모스크바는 당시만 해도 키예프 공국의 한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8세기 초부터 1918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수도를 대신했던 기간을 제외하고 14세기부터 지금까지 러시아의 수도로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해왔다.

러시아 북서쪽에 자리한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로 ‘북방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란 이름으로 불렸다. 도시 곳곳을 아름답게 수놓은 궁전과 성당, 여러 조각은 이 도시의 찬란했던 역사를 짐작하게 한다.

2014년 1월부, 한국과 러시아 비자 면제 협정 발효로 보다 편리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문화·예술의 두 축을 이루는 이들 도시로 떠나보자.

[모스크바]

붉은 광장, 붉은 광장 아이스링크
붉은 광장, 붉은 광장 아이스링크
붉은 광장은 모스크바 여행의 기점이자 제1의 명소다. 주변에 크렘린, 성 바실리 성당, 레닌묘, 국립역사박물관 등 명소들이 즐비하다. 7만 3천 평방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의 광장은 구 소련 시절, 5월 1일 메이데이와 11월 7일 혁명기념일이 되면 웅장한 퍼레이드 행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성 바실리 성당, 크렘린 등 역사적 건물 즐비

성 바실리 성당
성 바실리 성당
성 바실리 성당은 이반 대제가 몽골의 카잔 칸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여 1555년에 건립을 시작, 1560년에 완성한 건축물이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 중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양파 모양을 한 47미터 높이의 중앙 지붕과 그 주위를 둘러싼 높이가 다른 8개의 지붕이 어우러져 독특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러시아어로 ‘성벽’을 의미하는 크렘린은 중세에는 각 지방에서 만들어졌다. 그중 모스크바 크렘린은 여러 측면에서 러시아의 중심을 표현한다. 모스크바 한가운데에 자리해 지리적인 중심이고, 대통령과 각료 집무실이 들어서 있기에 정치와 권력의 중심이다. 또한 러시아 문화와 역사의 중심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크렘린은 나폴레옹군의 모스크바 입성 때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현재와 같이 20개의 탑을 가진 모습으로 재건됐다.

크렘린 궁전, 모스크바 구세주 성당
크렘린 궁전, 모스크바 구세주 성당
내부에는 대통령 집무실, 원로원, 12사도 사원, 이반 대제의 종루, 우스펜스키 대성당, 블라고베시첸스키 성당, 아르항겔리스키 성당, 그라노비타야 궁전, 대크렘린 궁전, 무기고 등 역사적인 건물이 즐비하다.

구세주 성당은 시내 중심부 모스크바강에 인접해 있다. 러시아가 1812년 12월 나폴레옹군의 침략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건립한 러시아 정교사원이다. 스탈린 통치 시절에 파괴되었지만 구 소련 붕괴 후 정부의 재정 지원 및 국민 성금을 통해 재건됐다. 성당은 비잔틴 양식 기초 위에 러시아 전통의 교회 건축 양식에 따라 지어졌다. 좌우 대칭의 외형을 지니고 있으며, 내부는 많은 성화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러시아 문화ㆍ예술의 정수, 모스크바

모스크바 여행의 또 다른 특별함은 곳곳에서 러시아 문화, 예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인 볼쇼이에선 세계 최고 수준의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이뤄진다. 현 극장 건물은 1824년 건축된 것으로 전면의 그리스식 원기둥과 지붕 위의 로마식 전차 장식이 눈길을 끈다.

모스크바 전경
모스크바 전경
트레차코프 미술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더불어 러시아 2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19세기 공업 자본가였던 트레차코프가의 파벨르와 세르게이 두 형제가 수집한 미술품들을 근간으로 소장품이 5만여 점에 이른다. 안드레이 류블료프의 ‘삼위일체’를 비롯해 러시아 미술의 걸작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두고 ‘유럽을 향해 열린 러시아의 창’이라고 했던 푸시킨의 표현처럼, 이 도시는 서유럽의 여러 문화에 대해 열려 있었다. 이에 따라 건축을 비롯한 다양한 삶의 양식은 물론 자유주의 사상도 함께 유입됐고,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후에 제정 러시아의 근간을 뒤흔들고 결국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킨 도시로 만들었다.

세계 3대 박물관, 에르미타주

여름 궁전
여름 궁전

이 역사적인 도시의 백미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다. 역대 황제의 거처와 부속 건물로 이뤄진 미술관으로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다. 현재 조각, 미술품, 발굴 물품 포함 약 250만점을 전시, 1점당 1분씩 감상하더라도 5년이 소요될 만큼 방대한 양의 전시품을 소장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후원으로 한국어 작품 안내 서비스도 제공 중이다.

최초로 표트르 대제의 딸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미술품을 수집, 궁전에 전시한 이래 예카테리나 2세가 유럽에서 4천여 점에 달하는 최고 수준의 미술품을 구입했고, 이후 소장품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건물 자체도 굉장히 화려해 그 당시 황실의 권위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층별로 보면 1층은 원시문화, 구소 동방민족의 문화·예술, 고대 세계문화·예술, 2층은 러시아 문화, 19세기 서유럽 예술(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등), 3층은 근대에서 현대까지 서유럽 예술, 동방문화, 고대화폐 등을 전시하고 있다.

성 이삭 대성당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최고 건물이다. 무려 40년에 걸쳐 지어진 성당은 길이 111미터, 폭 97미터, 높이 101미터로 1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 규모를 자랑한다. 성당 지붕의 원형 돔 건설에는 100킬로그램의 금이 사용되었다 한다. 내부장식에는 22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서 내용을 묘사한 그림 150점, 모자이크 62점, 성당 장식 동상 300여 점 등 뛰어난 예술품이 가득하다.

네바강 하구, 그리스도 부활성당
네바강 하구, 그리스도 부활성당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핀란드만이 보이는 곳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이 있다. 표트르 대제의 여름 궁전으로 1714년 수많은 건축가, 조경기사, 조각가가 참여해 건설했다. ‘위 공원’과 ‘아래 공원’으로 구분되며, 위 공원에는 표트르 대제의 별궁이 있고, 아래 공원에는 조각상과 분수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네바강 하구에 자리한 토끼섬이라는 이름의 작은 섬에는 이 도시의 중추와도 같던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가 남아 있다.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으로부터 러시아를 지키기 위해 건설했다. 요새를 둘러싼 두꺼운 벽은 높이 12미터, 폭 4미터로 5개의 문이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1706년부터 짓기 시작해 약 35년이 걸려 완성됐다. 6개의 성채 가운데 네바강을 향한 나리시킨스키 성채에서는 매일 정오를 알리는 공포를 쏜다.

1881년 5월 1일,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암살 당한 자리에 지어진 그리스도 부활성당은 16~17세기 러시아 건축 양식을 띠고 있다. 피의 사원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성당의 인테리어는 각기 다른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으며, 수천 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인상적이다. 외형은 흡사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을 떠오르게 한다.

‘혁명 희생자의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

마르스 광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에 위치한 공원이다. 오랜 세월 군사 행진과 훈련 장소로 쓰였기 때문에 마르스 광장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이 장소는 ‘큰 풀밭’이라고 불렸으나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즐거운 풀밭’으로 이름이 변경됐고, 18세기 후반에는 다시 ‘차르의 풀밭’으로 명명됐다. 이후 볼셰비키가 1917년 2월 혁명 중 학살당한 많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꺼지지 않는 불을 설치했고, 이 광장에 ‘혁명 희생자의 광장’이란 이름을 붙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
상트페테르부르크 야경
모스크바에 볼쇼이 극장이 있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마린스키 극장이 있다. 역사적인 오페라, 발레 극장이다. 세월을 거치면서 ‘황실 마린스키 극장’, ‘국립 오페라와 발레 아카데미’, 그리고 세르게이 키로프의 이름을 따서 ‘키로프 오페라와 발레 아카데미 극장’(약칭 키로프 극장)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현재 이름은 알렉산드르 2세의 부인인 마리아 알렉산드로프나 황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은퇴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인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음악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 기사제공 : 대한항공 스카이뉴스(www.skynews.co.kr)
※ 자료 협조 : 러시아문화원(www.russiacenter.or.kr) / 메디오루스(www.mediorus.com)

서울/인천~모스크바
대한항공 주 5회 운항 (약 10시간 5분 소요)

서울/인천~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한항공 주 2회 운항 (약 9시간 50분 소요)

※자세한 스케줄은 대한항공 홈페이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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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와 자연 … 신비의 정점에 있는 바이칼 호수

알혼섬 하보이
알혼섬 하보이

동시베리아 남쪽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원정대의 야영지였다. 17세기 중반 무렵 그런 야영지들은 점차 도시의 형태를 갖춰갔고, 그렇게 이르쿠츠크를 비롯해 시베리아의 도시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러시아의 동방으로 가는 관문과도 같았기에 많은 정부 및 학술단체는 이르쿠츠크에 기반을 두었고, 동시베리아에서 이뤄지는 무역이 이곳 상인들에 의해 좌우되었을 만큼 이르쿠츠크는 이 일대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됐다.

시베리아에 숨은 듯 있지만 감출 수 없는 매력으로 가득한 이르쿠츠크로 떠나보자.

이르쿠츠크 트램
이르쿠츠크 트램
이르쿠츠크 중심부에는 꽃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도시의 중앙 광장인 키로프 광장이다. 시민들의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지는 광장은 축제나 국가기념일 등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특히 크리스마스나 새해 연휴 때는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설국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키로프 광장
키로프 광장
베츠느이 아곤
베츠느이 아곤

키로프 광장 주변에 자리한 스파스카야 교회는 이르쿠츠크뿐 아니라 동시베리아 전체를 통틀어 지금까지 보존되는 몇 안 되는 석조 건물 중 하나다. 1710년 지어진 이 교회는 이르쿠트강 하류에 정착촌을 조성하러 왔던 시베리아 원정대 소속 카자크 사람들에게 매우 신성한 안식처였다. 교회 건물 외벽에 그려진 벽화는 우랄산맥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시베리아 전역을 통틀어 그와 비슷한 양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희소 가치를 지니고 있다.

꺼지지 않는 불, 베츠느이 아곤

이르쿠츠크주 정부 청사 뒤편의 승리 광장에는 이곳의 명물 베츠느이 아곤이 있다.  ‘꺼지지 않는 불’이라고도 불리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이 지방 출신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타오르는 불이다. 불꽃 아래로 설치된 파이프를 통해 가스가 공급되어 비나 눈이 와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매년 승전기념일이 되면 죽은 용사들을 기념하고자 많은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키로프 광장 멀리서 아름답게 보이는 바가이블레니야 교회는 이르쿠츠크의 시민들에게 있어 아주 의미 있는 사원이다. 1693년 당시의 교회 이름은 ‘바가이블레니야 가스빠드냐’라고 불렀으나 1716년 화재로 인해 소실됐고, 1718년 7월부터 석조로 재건축했다. 역사적인 고비 때마다 이르쿠츠크 시민들은 이곳으로 모였고, 중요한 성명을 발표할 때는 항상 이 교회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건물 외부에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동식물의 모양을 조각하고, 약 300가지 색상의 타일을 이용해 장식했다. 당시에 타일을 제작하던 기술은 지금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쌈지공원
쌈지공원
바이칼호에서 발원하는 안가라강은 이르쿠츠크를 흐르며 철마다 다른 매력을 자랑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강바람,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이고, 겨울에는 자욱한 물안개를 배경으로 나뭇가지에 핀 얼음꽃이 진풍경을 연출한다. 이르쿠츠크 연인들은 안가라강 인근에서 길바닥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쓰기도 하고 강가에 있는 가드레일에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한다. 이곳은 또한 연중 이르쿠츠크 신혼부부들이 들르는 필수 코스이기도 하다.

노동자 광장은 안가라 강가에 위치한 매우 조그마한 광장이다. 쌈지공원이라고도 불린다. 도심에서 가깝고 광장 주위로 고풍스런 벤치가 놓여 있어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로 가득하다. 이 광장 한가운데에는 알렉산드르 3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르쿠츠크 대표 건축물, 즈나멘스키 수도원

알렉산드르 3세동상
알렉산드르 3세동상
안가라강을 벗어나 우샤코프카강 기슭에 위치한 즈나멘스키 수도원은 이르쿠츠크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수녀들의 숙소로 지어졌던 건물로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지금과 같은 석조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내부 장식은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고, 피터 대제가 하사했다는 성서도 보관 중이다.

시베리아에는 원래 15개의 여자 수도원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중 즈나멘스키 수도원이 가장 훌륭한 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다. 수도원 정원에는 쿠릴섬과 알래스카 지역을 처음으로 탐험했던 셸리호프의 무덤, 혁명을 꾀했던 데카브리스트들과 그 가족들의 무덤이 있어 유명하다.

발콘스키의 집은 데카브리스트였던 발콘스키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지은 건물이다. 이 집에서는 음악회나 시낭송, 가면무도회 등이 쉬지 않고 열려 마치 이르쿠츠크의 문화센터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기라도 하듯 당시 사용했던 피아노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1985년 12월 10일, 11년간의 재건축 공사를 마친 후 데카브리스트 기념관으로 개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르쿠츠크시에서 바이칼 호수 쪽으로 47킬로미터를 가면 딸찌가 나온다. 이곳에 딸찌민속촌이 있다. ‘딸찌 목조건축 구조물 박물관’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지만 그냥 민속촌이라고 부르면 딱 어울리는 곳이다. 민속촌에 들어서 오솔길을 따라 가면 타이가 숲의 진수를 맛볼 수 있고 바이칼 지역의 옛 주거 형태도 만나볼 수 있다.

바이칼 호수 최대의 섬, 알혼

끝없이 펼쳐진 시베리아 평원을 감상하면서 알혼섬으로 이동해보자. 알혼섬으로 가려면 먼저 MRS(Motors Repair Service)라고 부르는 마을을 들러야 한다. 소련 시절 선박을 수리하는 공장이 있던 곳으로 아름다운 호수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마을 어귀를 돌아서면 선착장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연락선을 타야 알혼섬으로 갈 수 있다.

바이칼에 있는 크고 작은 20여 개의 섬 중 가장 크고 또 유일하게 사람이 사는 섬이 알혼섬이다. 바이칼의 한가운데에 마치 바이칼 호수를 축소한 것처럼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부터 예사롭지 않다. 면적은 우리나라 거제도의 두 배쯤에 달한다. 알혼이란 부리야트어로 ‘햇볕이 잘 드는 땅’이라는 뜻으로 이름에 걸맞게 일조량이 풍부하다. 기록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맑은 날이 가장 많이 관측되는 지역 중에 한 곳이라고 한다.
불한 바위는 알혼섬의 중심에 자리한 후지르 마을 가까이에 있다. 이곳은 바이칼 호수에 관한 모든 자료나 사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바이칼의 상징이자 명함과도 같은 곳이다. 먼 발치에서 보면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지만 이 바위 앞에 서면 그 위용에 압도되는 느낌이다. 붉은색 이끼로 덮여 있어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두 개의 봉우리는 전체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혼섬 삼형제바위
알혼섬 삼형제바위
알혼섬 불한바위
알혼섬 불한바위
알혼섬 최북단에 위치한 하보이는 부리야트어로 송곳니를 뜻한다. 이는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이 영락없이 송곳니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마치 밧줄에 목이 감긴 여인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이곳으로부터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우쉬칸섬이 보이기도 한다. 하보이 가는 길 정상에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탑과 소원을 기원하는 장승이 있어 친숙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간후슌에는 붉은색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삼형제 바위다. 이곳의 바위는 유독 붉은빛이 강해 이곳에서 보는 바이칼은 더욱 푸르게 느껴진다.

리스트비얀카 노천시장
리스트비얀카 노천시장
바이칼 호수 주변을 따라 촌락을 이룬 리스트비안카는 오늘날 세계 각지로부터 바이칼 호수를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이 어울리는 글로벌 관광지가 되었다. 리스트비안카란 러시아어로 낙엽송이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일대가 시베리아에서는 보기 드물게 낙엽송 군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리스트비얀카에 위치한 숙박시설
리스트비얀카에 위치한 숙박시설
리스트비안카 선착장 주변 광장은 바이칼호에서만 잡힌다는 생선인 오믈을 훈제하는 연기로 가득하다. 또한 연기 속에서 훈제 오믈을 파는 아낙들과 좌판을 펼치고 각종 기념품을 파는 잡화상들로 붐빈다. 러시아 전통의 목제 인형인 마트료시카부터 이 지역 특산물인 보라색 옥돌 등 판매 물품도 다양하다. 특히 자작나무 껍질을 이용해 만든 다양한 소품들이 눈길을 끈다.


바이칼 호수의 정보가 집적된 바이칼 호수박물관

바이칼 호수박물관에 가면 바이칼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박물관은 바이칼 호수에 관한 정보를 분석하고 자원을 수집, 보관하는 업무를 수행 중이다.  호수 주변의 동식물과 광물의 샘플, 호수의 기원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 논문, 각종 수치 등을 지도나 도표를 통해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바이칼 호수박물관
바이칼 호수박물관

2004년 개설된 수족관에서는 바이칼 호수에 서식하는 오믈, 시크, 하리우스를 비롯해 네르파도 볼 수 있다. 네르파는 세계에서 유일한 담수 바다 표범이다. 훈련이 잘 된 네르파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셈을 할 수도 있다. 북극에서 사는 네르파가 어떻게 민물인 바이칼 호수에서 살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이곳 원주민들은 네르파를 영물로 여겨 신성시한다.

이르쿠츠크 벼룩시장 근처의 작은 수족관에서도 네르파의 공연을 볼 수 있다. 규모나 시설은 소박하지만 네르파의 재주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공연 일정이나 시간이 다소 불규칙하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특히 그날그날 네르파의 컨디션에 따라 공연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바이칼 호수에서 약 0.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리스트비안카의 유일한 교회인 성 니콜라이 정교회가 있다. 19세기경 이곳의 상인 세레브랴코프가 바이칼을 건너던 중 폭퐁우를 만나 위험에 처했을 때 성 니콜라이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를 했는데 다행히 전원 무사히 돌아오게 됐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감사의 뜻으로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1846년에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완공이 되기 전 그가 사망하는 바람에 그의 부인이 그를 이어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아담한 아름다움이 전해지는 건물이다.

* 기사제공 : 대한항공 스카이뉴스(www.skynews.co.kr)
* 자료협조 : 바이칼전문 BK TOUR(www.bktour.kr)
도서 ‘바이칼’(우리가 간직해야 할 지구의 푸른 눈) / 박대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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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올해 개관 250주년을 맞은 에르미타주박물관. 눈 덮인 궁전 광장 가운데 알렉산드르 1세를 기리는 탑이 장엄하다.
올해 개관 250주년을 맞은 에르미타주박물관. 눈 덮인 궁전 광장 가운데 알렉산드르 1세를 기리는 탑이 장엄하다. /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관광개발위원회 제공

겨울, 도시는 인위로 가득하다. 전력을 다해 화려하다. 운하와 네바강을 건너는 500여개의 다리, 도열한 그리스·로마·비잔틴·고딕·로코코의 건물은 단 한 번의 동어반복 없이 쓰인 한 권의 책이다. 유럽식 유행이 러시아산 청동과 화강암에 들어와 일으키는 우아한 발작, 이곳을 사랑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선언한다. "이곳은 모든 것이 카오스다…. 모든 것이 삶이요, 움직임이다." 지난 10일 저녁, 늪 위에 세워진 계획도시에 닿았다. 북방의 수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다.

◇도시의 동맥, 네프스키 대로

도로변, 가로등이 켜진다. 이 예술의 시가지는 전장에서 태어났다.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스웨덴의 침공을 막으려 도시를 세웠고, 전쟁 후인 1712년 아예 수도를 이리로 옮겼다. 시인 푸시킨이 "유럽을 향해 열린 창"이라 읊었듯, 도시는 유럽의 최고급 문물을 한껏 받아들여 치장했다.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 탄생지였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900일간 포위돼 40만명이 아사(餓死)한 주검의 땅이었으며, 그럼에도 끝내 미(美)를 포기하지 않은 곳. 도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 연대기의 중심에 네프스키 대로가 있다. 도시의 방문자는 모두 이 거리를 걸어야 한다. 길이 4.5㎞, 폭 30m가 넘는 이 도시의 동맥.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집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속 모든 어리석고 황망한 주인공이 활보하던 이 거리에, 웬만한 명물은 다 있다. 공사 기간 40년, 공사 중 10만명이 죽어나갔고, 돔에만 100㎏의 황금을 칠한 이 도시의 랜드마크 성 이삭 성당, 사탕 같은 양파 지붕을 한 피의 사원, 반원형의 회랑에 94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늘어선 카잔 대성당 등 이 동네의 경복궁이자 숭례문인 굵직한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나른한 땅거미 끝에 밤의 위력이 닥친다. 겨울엔 해가 오전 10시쯤 떠 오후 4시면 진다. 차라리 밤의 거리라 해도 좋다. 소비에트 시절 방공호 같은 지하철 역을 벗어나면, 도로 전선 위에 걸린 램프가 트리 장식처럼 반짝인다. 연애의 기분처럼 몽롱하다. 푸시킨이 연적과 권총 결투를 치르던 날 아침 레모네이드를 마셨다는 '문학 카페'를 찾는다. 1816년 문을 열어 당대 러시아 최고의 문인들이 죄다 다녀간 곳이다. 푸시킨은 졌고, 죽었고, 이후 레모네이드는 판매되지 않는다. 그가 앉았다 갔다는 창가 쪽 세 번째 자리에 다객이 앉아 130루블쯤 하는 커피를 홀짝인다. 붉은 벽지 옆, 창밖에 얼지 않은 운하가 흐른다.

저녁 무렵의 네프스키 대로.
저녁 무렵의 네프스키 대로. /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관광개발위원회 제공
◇건축과 그림과 음악의 향연

간헐적으로 눈이 날린다. 바람은 살을 엔다. 박물관은 이럴 때 가는 것. 세계 3대 박물관 에르미타주로 간다. 올해 개관 250주년을 맞았다. 네프스키 대로의 끝에 다다라 무게 600t, 높이 74m짜리 알렉산드르 1세 탑이 시력을 압도한다. 그 앞 에메랄드색 건물, 98개의 바로크 양식 조각상으로 지붕을 꾸민 겨울궁전이 에르미타주의 본관이다. 3층, 400개의 방에 고대 시베리아부터 20세기 프랑스 미술까지 총 300만 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크리스털 샹들리에와 대리석 기둥, 천금석과 공작석의 세공이 끝없다. 한국어 음성안내기를 든 채 거장의 화폭에 정신이 혼미할 때쯤, 창밖을 내다본다. 어김없이 네바강이 흐르고 있다. 멀리 바실리 섬에 있는 피터 폴 요새도 반짝인다.

러시아의 색을 보고 싶다면, 러시아 박물관으로 가면 된다. 11~21세기 러시아 미술의 진수가 총망라돼 있다. 드미트리 레비츠키, 일리야 레핀 같은 러시아 거장의 그림을 만날 절호의 기회. 러시아 박물관 앞 예술광장 가운데 푸시킨 동상이 팔을 벌리고 있다. 19세기 극장 마린스키에 가 발레 '지젤'을 보다 잠이 들어도 좋다. 2시간여의 환각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서도 빛나는 도시

13일 오전, 도시 외곽으로 간다. 볼이 얼얼할 정도로 눈이 날린다. 시내에서 차로 30분 거리인 푸시킨 시(市)로 가는 길, 스탈린 시대의 튼튼한 주택들을 지나 모스크바광장에서 잠시 차를 세운다. 레닌 동상의 코트 깃에 강철의 서리가 피어 있다. 젊은이들이 눈싸움을 한다. 지난밤,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을 찾아가다 골목에서 먹던 블린(Blin·러시아 팬케이크)처럼, 눈밭이 가로등 불빛에 노릇노릇하다. 그 위에 누가 손가락으로 '페테르부르크 2015'라 써놨다.

눈길을 더 달리면 예카테리나 궁전이다. 눈 내리는 여름궁전, 예카테리나 1세 여제가 세운 러시아에서 가장 호화로운 이 공간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호박방. 방 전체가 5.6t의 호박으로 장식돼 있다. 입에 넣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색이다. 각 방의 문이 일직선상에 있는 '안필라다' 양식으로, 금박 된 보리수 장식과 도자기 벽난로 등 이곳에서 저곳까지 한눈에 이어진다. 응접실에선 어린이를 위한 신년맞이 콘서트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 예술의 총아에서, 꼬마들은 새로운 눈을 뜨게 될지 모른다. 점심 무렵, 쇄빙선처럼 해가 건너온다. 도스토옙스키의 '페테르부르크 연대기'를 다시 펼친다. "도시의 미래는 아직도 이데아 속에 있다."

인포메이션
여행수첩 

에르미타주 400루블. 월요일 휴관. 수요일 오전 10시~오후 9시. 나머지 오전 10시 30분~오후 6시. 사진 촬영 허용. hermitagemuseum.org

러시아 박물관 350루블. 화요일 휴관. 목요일 오후 1~9시. 나머지 오전 10시~오후 6시. 사진 촬영 허용. rusmuseum.ru

문학카페 레스토랑 겸 카페. 매일 저녁 피아노 연주. litcafe.su

마린스키 극장 작품과 좌석에 따라 500~5000루블 이상. 인터넷 예매 가능. mariinsky.ru

예카테리나 궁전 400루블. 화요일·마지막 월요일 휴관. 오전 10시~오후 4시 45분. 월요일은 오전 10시~오후 7시 45분. 호박방은 촬영 금지. eng.tzar.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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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타보니 - 최종석 기자 르포

'유라시아 친선 특급'인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를 무궁화호와 비슷한 시속 80~90㎞로 달린다. 이 열차는 침대차 9량, 식당차 2량을 비롯해 총 15량으로 구성돼 있다. 침대차 한 량엔 약 3㎡ 크기의 방 9개가 있다. 방은 2인실과 4인실로 나눠져 있다. 침대의 길이와 폭은 키 170㎝ 성인이 똑바로 누우면 꽉 찰 정도로 짧고 좁다.

하지만 창 밖으로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진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녹색 평원에 하늘로 쭉쭉 뻗은 나무와 무성한 수풀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선로 옆은 분홍과 노랑 등 각양각색의 꽃 잔치다. "시베리아에도 꽃이 피는구나." 친선 특급 참가자들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시베리아 열차는 자주 덜컹거린다. 옛날 완행열차를 탈 때가 연상된다. 승차감은 나쁘지 않다. 평평하게 쭉 뻗은 선로를 달리고 다리나 터널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열차는 4~6시간을 달린 뒤 간이역에 멈춰 20~30분씩 쉰다. 이때 열차 안은 찜통이 된다. 열차에 별도 발전차가 없어 달릴 때만 냉난방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이 열차엔 기관사와 승무원 등 30명이 탄다. 침대차마다 승무원 2명이 교대로 근무한다. 식사는 기본적으로 양식이다. 샐러드와 함께 감자, 돼지고기 등 메인 요리가 한 접시에 담겨 나온다. 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차에 앉으면 직원들이 차례로 요리를 내온다. 좀 짜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맛은 괜찮다. 객차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큰 물탱크가 있어서 컵라면을 먹거나 차를 마실 수 있다.

유라시아 친선특급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2인실 객실 내부 모습(왼쪽). 성인 한 명이 겨우 누울 정도로 좁다. 오른쪽은 열차 식당칸에서 제공하는 식사.
시베리아 횡단열차 객실·식사 - 유라시아 친선특급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2인실 객실 내부 모습(왼쪽). 성인 한 명이 겨우 누울 정도로 좁다. 오른쪽은 열차 식당칸에서 제공하는 식사. /노보시비르스크=최종석 기자
제일 어려운 점은 씻는 것이다. 샤워실이 없고 1㎡ 크기의 화장실 세면대에서 물만 졸졸 나온다. 꼭지 아래에 달린 코크를 눌러 위로 올려야 물이 나온다. 화장실은 소변·대변을 그대로 선로에 버리는 방식이다. 그래서 열차가 역에 멈춰 서면 변기를 사용할 수 없다.

열차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고 발판도 깔았지만 꽤 낡았다. 객차와 객차 사이는 걸어 건너기가 불안하고 지붕엔 전선이 드러나 있다. 정현우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차량기술단장은 "실내를 깔끔하게 수리하긴 했지만 차량 자체는 1970~1980년대에 운행했던 우리 '비둘기호'와 비슷한 구형"이라며 "바퀴 부분은 1960년대에 러시아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기관차는 디젤이 아니라 전동차다. 시베리아 철로 전체에 전차선을 깐 것이다. 열차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벌판을 달리지만 선로는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전날 밤 덜컹하는 소리에 네 번이나 깼다. 새벽 3시였지만 하늘은 어슴푸레한 미명이 감돌았다. 여긴 북극이 가까운 시베리아 한가운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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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를 일군 집념의 예술도시

여름 궁전
여름 궁전
표트르 대제, 유럽으로 향하는 창을 꿈꾸다

1703년, 스웨덴에서 되찾아온 습지 위에서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1672~1725)는 장대한 계획을 시작했다. 네바 강 하구에 101개의 섬이 얼기설기 자리한 이 습지를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하고 물렁한 땅은 돌로 촘촘히 메워 도시를 만들겠다는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계획이었다. 어찌나 무모한지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고 심지어 아들까지 반대하고 나섰지만 표트르 대제의 뜻은 확고했다. 결국 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계획을 밀고 나간 집념의 왕은 해수면보다 낮은 땅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무려 15만명이 희생되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오명 속에서 성 베드로의 도시, 아니 표트르 대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서유럽의 화려한 면모를 닮은 도시

청소년기를 서유럽에서 보낸 표트르 대제는 뒤처진 러시아의 위상에 열등감이 생겼다. 전통만 고수하는 러시아에 변화가 필요하다 여긴 그는 새 도시에서 서유럽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이길 원했다. 특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매료된 그는 바다와 강, 운하의 능력이 얼마나 많은 이득을 생산하는지 알게 되었다. 러시아 최북서단의 네바 강이 바다로 흘러나가는 길목에 새 도시를 만들고 서유럽과 같은 문화를 심어나간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러시아 전통 복장을 금지하고 수염을 길게 기르는 습관마저 싹둑 잘라버린 그는 수염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수염세라는 세금까지 매겼다. 이렇게 철저하게 서유럽을 닮아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화려한 서유럽풍의 웅장한 건축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운하와 수많은 다리를 간직한 아름다운 외관이 갖춰지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의 베네치아’로 불리게 되었다.

에르미타주 미술관 내부
에르미타주 미술관 내부

은둔자를 위한 겨울 궁전,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서유럽화, 근대화가 남긴 유산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에르미타주 미술관(The State-Hermitage Museum)을 누구나 먼저 손꼽는다. 표트르 대제의 저택으로 지어져 왕가의 겨울 궁전으로 증축된 이 웅장한 왕궁에는 약 400만점의 예술품과 유물이 1,020개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미처 내놓지 못한 작품도 상당하다는데, 소장하고 있는 모든 작품을 하나에 1분씩만 감상해도 무려 8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농담 같은 통계는 끝없이 이어지는 1,800여 개의 문과 120개의 계단, 총길이 27km의 압도적인 외관 앞에 서면 수긍하게 된다. ‘은둔자의 집’이라는 이름과 달리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한 내부와 대대로 전해진 방대한 양의 유명 미술품은 루브르 미술관, 바티칸 박물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명예를 안겨주었다.

'죄와 벌'을 가른 센나야 광장의 730걸음

벌레만도 못한 전당포 노파를 죽음으로 단죄하기 위해 좁다란 다락방에서 나와 무더운 초여름의 센나야 광장을 가로지른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의 집까지 총 730걸음을 꼼꼼하게 센다.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 등장하는 센나야 광장과 주변의 빈민가는 러시아의 대문호로 불리는 도스토옙스키가 직접 경험한 가난의 흔적을 그대로 품고 있다. 지금은 도스토옙스키 박물관(Dostoyevsky Literary Memorial Museum)으로 말끔하게 꾸며져 있는 그의 허름했던 하숙집은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담긴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진면목을 소개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번민에 휩싸여 걸었던 730걸음 동안 펼쳐진 처참한 도시의 풍경은 그의 또 다른 작품 '백야' 속에 등장하는 더할 나위 없이 인위적인 도시의 몽상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깊이를 만든다. 그 깊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의 언어로 승화된 진정한 찬사 아닐까.

푸시킨 동상 / 넵스키 거리
넵스키 대로를 바라보던 푸시킨의 짧은 삶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은 도심을 가로지르는 넵스키 대로(Nevsky Avenue)를 따라 늘어서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표 이미지는 이 대로에서 포착된다. 그 덩치 큰 이미지들의 사이 좁은 골목에 숨은 예술가의 단골집이 있다. ‘문학 카페’로 불리는 유서 깊은 이 찻집에는 러시아 국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푸시킨의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에게 구애를 하며 명예를 더럽히는 일행을 향해 결투를 신청하고는 안타깝게 결투에 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허망하게도 결투의 총성 아래 서른여덟의 짧은 생을 마치고 만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 말라던 자신의 작품을 마지막 순간에 떠올렸다면 죽음의 결투를 불러들인 노여움을 잠재울 수 있었을 텐데…. 죽음을 불사하며 지키고자 했던 아내와 자신의 명예는 지켜진 것인지.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 예술의 혼

마린스키 극장
마린스키 극장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러시아를 집어 삼키려는 히틀러의 야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서대문 같은 이 도시를 무너뜨릴 소모전 대신 철통처럼 포위해 아사(餓死)시킬 계획을 세운 나치는 내부로의 식량과 연료 공급로를 끊어버렸다. 한겨울 혹한과 허기라면 손쉬운 항복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나치의 예상과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은 무려 900일 동안 버텼다. 기아와 질병으로 주민의 3분의 1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지만 함락되지 않았던 덕분에 모스크바도 살아남았다. ‘영웅의 도시’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안겨준 이 역사 이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기근이 종종 찾아왔었다. 놀라운 사실은 굶주린 때일수록 예술극장의 무대가 더 활발히 불을 밝혔다는 것이다. 정통 발레의 산실로 불리는 마린스키 극장(Mariinsky Theatre)도 나치의 포위망 아래서 더 열심히 불을 밝혔다. 그 이전인 1920년대에 찾아온 기근 당시에도 마린스키 극장은 불을 밝혔고 마린스키 극장이 배출한 우아한 백조,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보내준 식량 원조 덕분에 수많은 무용수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재탄생한 클래식 음악

계속된 서유럽을 향한 모방은 19세기에 이르러 예술가들의 정체성 혼란을 야기했다. 나아가 러시아의 특색이 담긴 예술이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음악가들에게서 러시아만의 개성이 가득한 작품이 속속 탄생했다. 그 결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문 음악원이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에 차이콥스키가 교육을 받아 작곡가로 데뷔했으나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암암리에 퍼져 힘든 상황 아래 놓였다. 주옥같은 작품 덕분에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작품은 서유럽풍이다.

반면에 음악원 교수로 활동하며 러시아 색채를 꾸준히 담아낸 림스키 코르사코프도 동시대 인물이다. '왕벌의 비행'으로 유명한 그의 작품은 지극히 러시아적인 소재 아래 탄생했다. 오랫동안 음악원을 이끌며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키워 놓은 그의 능력 덕분에 지금도 그 명성이 대단하다. 전세계에서 러시아 연주자들이 선보이는 놀라운 테크닉과 굵직한 음악성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초절정의 기교를 선보이는 현 클래식계의 인기 절정 피아니스트 아르카디 볼로도스의 화려한 피아니즘도 이곳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 림스키 코르사코프 음악원에서 만들어졌다. 서유럽에 대한 모방으로 만들어진 도시에 유럽 문화의 정수인 클래식 음악의 세계적인 산실이 있다는 아이러니, 바로 이런 개성 강한 역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참모습 아닐까.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네바 강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네바 강

· 글ㆍ사진 : 곽정란(여행작가)
'슬림 유럽 데이', '비엔나 칸타빌레', '자신만만세계여행-유럽, 캐나다, 중국' 저자
前 KBS '클래식 오디세이', '찾아가는 음악회' 음악 코디
· 기사 제공 : 대한항공 스카이뉴스(www.skynews.co.kr)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모스크바

러시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앞 호수. 차이콥스 키는 이곳에서 발레음악‘백조의 호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북위 55도에 위치한 모스크바는 1년 중 100일 넘게 비가 오고 70일 넘게 눈이 내린다. 하지만 두 세기 전만 해도 이 잿빛 도시는 푸시킨, 톨스토이, 차이콥스키, 도스토옙스키 등 예술 거장(巨匠)들을 낳았다. 독일 프로이센까지 진출하던 제국의 중심이기도 했다. 공산주의 시기를 거친 오늘날엔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많은 도시라 불린다. 지난 3월 미(美) 포브스지(誌불)는 전 세계 억만장자 1011명 중 가장 많은 79명이 모스크바에 산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31일 방문한 모스크바에는 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레닌이 깜짝 놀랄 민영 백화점

구소련에 공산주의를 심었던 레닌이 지금 살아 이 건물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굼(GUM)백화점. 모스크바의 중심지 붉은 광장, 레닌의 시신이 박제가 돼 누워있는 곳의 건너편에 있는 백화점이다.

원래 명칭은 국영백화점(Glavny Universalny Magazin). 단어의 첫 글자만 따서 '굼(GUM)'이라 불렀다. 소련 붕괴 후 1993년 민영화되었지만 명칭은 그대로 '굼백화점'이다.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 모스크바'를 상징하는 곳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굼 백화점 내부. 200m가 넘는 통로를 따라 좌우로 세계의 각종 명품 브랜드숍이 늘어서 있다. 빈부 격차가 심한 모스크바에서 이곳은 부유층이 즐겨 찾는 곳이다./오현석 기자 socia@chosun.com
1893년에 지어진 건물은 아케이드 양식이다. 중앙의 분수대에서 좌우로 길이 뻗어 있고, 그 좌우로 3층에 걸쳐 상점이 입점해 있다. 길의 길이만 242m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천장은 유리로 만들어 놓아 자연의 빛이 그대로 들어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백화점 내부는 쇼핑하기 적합하다. 수백개의 상점들은 하나하나가 구찌, 샤넬 등 내로라하는 세계적 명품 브랜드들이다. 백만장자들이 즐겨 찾는 백화점이라서 그런지 길 한가운데 명품 자동차를 전시해놓기도 했다.

러시아의 현대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곳은 아르바트 거리다. 우리로 치면 대학로쯤 되는 젊은이의 거리다.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주고,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한다. 최신식 레스토랑과 선물 가게도 즐비하다. 이곳 입구에는 푸시킨이 살던 집과 그의 동상이 있고, 좀더 들어가면 한국계 록 가수 고(故) 빅토르 최를 기리는 벽을 볼 수 있다. 알록달록한 그라피티가 뒤범벅되어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하나가 빅토르 최에 대한 글과 그림임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자유와 저항의 아이콘이었던 빅토르 최는 교통사고로 죽은 지 21년이 지나도 여전히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살아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조금 걸어 차이콥스키 국립음악원 근처로 가면 마치 뉴욕과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예술 전공 학생들의 아지트인 이곳의 술집에선 담배를 문 노(老)피아니스트가 하는 즉흥 연주가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동·서양 양식 혼합된 고(古) 건축물

러시아의 최첨단이 즐겁더라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옛 건축물들을 보지 않으면 어리석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接點) 러시아에서만 있는 건축 양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크렘린과 붉은 광장에 모여 있는 러시아 정교회 사원들이 눈에 띈다.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던 우즈펜스키성당, 황실 예배당으로 쓰인 블라고베르첸스키사원들은 모두 지붕이 양파 모양으로 돼 있어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느낌이다.

붉은 광장 남쪽의 상크트바실리대성당도 유명한 건축물이다. 알록달록한 색의 이 성당이 친숙하게 느껴진다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된다. 누구나 한 번씩 밤을 지새웠던 PC게임 '테트리스'에 배경으로 나왔던 바로 그 건축물이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럭셔리'한 장소는 어디일까. 거리에서 만난 러시아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니 귀에 익은 이름이 나왔다. '롯데호텔<사진>'. 우리나라의 고유 브랜드 호텔인 롯데호텔, 그것이다.

지난해 9월 오픈한 '롯데호텔 모스크바'는 '상위 1%만 공략한다'는 마케팅 전략으로 한국에서보다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했다. 팝스타 에이브릴 라빈, 토니 브랙스톤, 샹송 가수 라라 파비안, FC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축구선수 사무엘 에투가 투숙료를 100% 내고 이곳에만 묵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호텔 2층에 오픈한 프랑스 레스토랑 '피에르 가르니에'의 인기가 대단하다. 이 식당은 지난 10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러시안 스탠더드뱅크가 함께 주최하는 시상식에서 '모스크바 최고의 식당'에 선정되기도 했다. 호텔 지하에 오픈한 뉴욕의 최고급 일식집 '메구(Megu)'도 외교관과 기업 CEO 등 러시아 최상류층이 즐겨찾는 명소라고 호텔 측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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