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럽/러시아

러시아 모스크바 : 영화 '안나 카레니나' -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반응형

삶의 끝자락서 안나가 묻는다… 당신은 바른가

"너희들. 인간이 왜 나쁜 사랑에 그렇게 매혹되는 줄 알아? 절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지. 카슨 매컬러스의 말이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비텝스키(Vitebsky) 기차역.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비텝스키(Vitebsky) 기차역. 19세기 러시아 고관의 아내인 안나는 기차역에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안나는 불륜이라는 비난에도 남편과 자녀를 버리고 사랑을 좇았지만, 브론스키마저 자기를 떠나려 하자 스스로 기차에 몸을 던진다. / Corbis·토픽이미지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을 읽던 밤, 나는 별수 없이 불륜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나쁜 사랑의 대표 격으로 기껏 불륜, 외도 같은 말만 떠올리는 내 빈약한 상상력이 한심하긴 했지만. 그리고 "불륜이란 다른 생에 대한 갈망" 이라고 말하던 광고인 박웅현을 떠올렸다. 그가 '안나 카레니나 프로젝트'를 가지고 한국신경정신과 협회가 주관하는 박람회에 나간다고 했을 때, 나는 좀 의아했다. 그래서 "왜 광고 회사가 신경정신박람회에 부스를 만들어요?" 하고 되물었다.

"안나가 불륜 끝에 자살하잖아요. 안나의 얘기에 우리 생활 속 우울증의 이유가 거의 다 나와요. 그걸 현실에 적용해 본 거예요. 예를 들어 안나랑 브론스키의 만남을 어떻게 했느냐면, 나는 지금 결혼해서 한 5년차쯤 되고 아들과 남편이 있고 잘 살고 있다 쳐요. 그런데 어느 날 청담동 파티에 갔는데 정우성이 와서 나한테 호감을 표하네? 어떡할 겁니까.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또 마주쳤는데, 잠깐 시간 있느냐고 하는데 어떡할 거야? 정우성 같은 그 남자랑 얘기를 해봤더니 어라, 잘 통하네? 어떡할 겁니까! 이게 지금 다 안나예요. 수많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있죠. 청담동 압구정동에도 있고, 미아리 광화문에도 있고."

그의 얘길 듣다가 한참을 웃었다.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 부르는 것들을 읽고 보는 건 무엇 때문일까. 고전이 전화번호부만 한 그 악랄한 두께로 보통 사람을 질리게 하는 건 세계 공통인데도 말이다. 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다소 불량스럽게 얘길 하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전쟁'의 19세기 러시아판이다. 그것은 남들이 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관대작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체면과 자존심 때문에 자기와 이혼해 주지 않는 남편과 어린 자식들 사이에서 지독한 불행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달리는 기차에 스스로 몸을 날려버린다는 내용이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마침표를 찍은 건 마흔아홉. 톨스토이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세계관이 크게 바뀌는데,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통렬한 심정으로 참회록을 쓰기에 이른다. 참회록 집필 후,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전 인류에게 훈계하는 계몽주의적 스승으로 극적인 변환점을 맞는다. 굳이 톨스토이가 안나를 비극적 죽음으로 내몬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그녀의 사랑이 불륜이었기 때문일까. 아마도 교과서적 답이라면, 비극적 죽음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 사회의 연애와 결혼 제도, 생활 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는 답이 아니라 자기만의 질문을 끝없이 재발명하기 때문이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본 건 우연한 일이었다. 여의도에 생긴 몰(mall)에서 회의 중 발생한 심각한 문제 때문에 좀 많이 늦어진다는 친구의 문자를 받던 날, 나는 커피를 마시는 대신 영화를 보았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안나로 등장하는 이 영화가 소설을 얼마만큼 반영했느냐가 아니라, 나는 그녀가 안나의 비극을 얼마나 훔쳐냈는지를 보고 싶었다. 안나를 유혹하는 브론스키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안나의 남편 카레닌 쪽에 훨씬 더 관심이 갔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름다운 남자의 대표 격인 '주드 로'가 브론스키가 아닌 '카레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속 그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세월이 주드 로에게 그럴 듯한 주름살을 만들어주는 동안, 내 편견과 생각도 조금씩 바뀌었다는 것을 말이다. 삼십대의 마지막에 보는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읽을 때마다 예전에 그은 밑줄이 달라지면 달라질수록, 좋은 소설이란 편견을 꽤 오랫동안 유지해온 나 같은 사람은 안나 카레니나를 좋은 소설이라 권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역시 좋은 소설이다. 왜냐하면 마침내 나는 십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테레사가 자기 '충견' 이름을 왜 '카레닌'이라고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레닌은 테레사가 보기에 타고난 희생양이었고, 그녀는 자신을 이 19세기 러시아 남자와 동일화한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는 순간까지 친구는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은 안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이 기차와 함께 끝나는 그토록 수미일관한 풍경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이 소설이 아니었다면 기차에서 시작된 사랑이 기차에서 끝날 리 없다. 삶이란 우연과 플롯을 분별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사랑이나 이별이란 인과관계와 하등 상관없는 '돌연' 혹은 '불현듯'이란 말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영화 '안나 카레니나' 포스터

극장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를 보다가 나는 안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 세계의 여자들이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을 안고 산다는 걸 불현듯 훔쳐본 사람의 눈빛으로 극장을 나오는 여자들을 세세히 바라봤다. 혹시 친구가 늦게 오는 건 회의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은 아닐까? 멀리 친구 모습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장시간 회의에 찌든 그녀가 브론스키와 춤을 추던 안나처럼 아름다워 보였던 건 아마도 내 불온한 상상력 덕분이었겠지만.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과 더불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이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혁명에 이르는 역사적 과도기에 놓인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풍속과 내면생활을 150명이 넘는 등장인물과 사실적인 묘사, 엄청난 깊이와 힘으로 반영해냄으로써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당대 작가들에게서 '완전무결한 예술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돼 역사적 시대에 예술적 공식을 이끌어낸 작품의 전범으로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안나 카레니나 1
국내도서
저자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 연진희역
출판 : 민음사 2009.09.04
상세보기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