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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미국

미국 : 이 편지를 만약 당신이 받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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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야 말하지만…당신에게 19살 난 아들이 있어
이 편지를 만약 당신이 받는다면…

만약 내가 남자라면 인생에서 부딪히고 싶지 않은 가장 두려운 일은 말할 것도 없이 누군가에게 '지금에서야 말하지만…'으로 시작되는 낯선 편지를 받는 일일 것이다. 만약 그 편지가 "우리가 헤어진 후, 난 임신한 걸 알았어. 난 낳기로 결심했고, 아들을 낳았지. 벌써 19살이 다 돼가. 그 애가 며칠 전 말 없이 여행을 떠났어. 아마 스스로 당신에 대해 알아본 모양이야. 아버지를 찾아간 게 확실하단 느낌이 들어. 이 주소가 만약 맞는다면 당신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라고 끝난다면 어떤 기분일까. 보낸 사람의 주소도, 이름도 없는 정체불명의 핑크색 편지 봉투를 받았다면 말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남자에게 전달된 핑크색 편지봉투처럼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보일 리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헤어진 여자가 몇 명인지 도대체 기억도 나지 않는데, 자신에게 19살 된 아들이 있다니. 게다가 그 아이가 날 찾아온다고? 하지만 살면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황당한 편지를 받은 이 남자, '돈 존스턴'은 억양도, 표정도 없이 자신에게 온 황당한 편지를 에티오피아에서 이민 온 이웃 '윈스턴'에게 읽어준다.

영화 ‘브로큰 플라워’에서 주인공은 오래된 연인을 찾기 위해 예약한 비행기를 몇 번씩 갈아타고, 미국의 낯선 도시를 달린다. 사진은 샌프란시스코 공항을 떠나고 있는 보잉 747의 모습. / 블룸버그

무감각한 미국인 '돈'은 활력 넘치는 다섯 아이의 아빠이며 죽이는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아내를 둔 '윈스턴'의 부추김에 아이의 엄마일 법한, 즉 헤어졌던 여자친구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추리소설 마니아인 '윈스턴'은 '돈'을 대신해 애인들의 주소를 알아내고, 아들 찾기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를 대신 마친다. 만약 홈즈와 포와로를 좋아하는 윈스턴 입장에서 이 여행에 이름을 붙인다면 '힌트는 핑크!'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돈'은 윈스턴이 예약한 비행기를 몇 번씩 갈아타고, 렌트한 차를 몰며 그가 녹음해 준 1970년대 카바레 풍의 에티오피아 음악을 들으며 미국의 낯선 도시를 달린다. 달리는 그의 자동차 안에는 아름다운 분홍색 장미 꽃다발이 들려 있지만 헤어진 오래된 연인을 찾아나서는 '돈'의 여행은 과거의 상처를 더듬는 일이 될 것이므로, 언젠가 '천국보다 낯선'에서 짐 자무시가 그려냈던 흑백의 길만큼이나 거칠고 울퉁불퉁하다.

첫 번째 돈이 찾아간 로라는 카레이서였던 남편을 자동차 사고로 잃고 '롤리타'라는 애칭의 딸과 살아간다. 그녀에게 아들이 없음을 안 '돈'은 한때 히피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두 번째 연인 '도라'를 찾아 떠난다. '도라'는 부유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었지만 '돈'이 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그가 준 진주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다. 그러나 '돈은' 그녀에게서도 아들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한다. 성공적으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기르던 검은색 개 '윈스턴'의 죽음을 계기로 동물들의 '언어'를 알아듣는 새로운 능력이 생긴 세 번째 여자 카르멘은 동물 의사소통 센터를 운영하며 지낸다. 하지만 그녀 역시 그에게 '아들'에 대한 어떤 단서도 남겨주지 않는다. 거친 모터사이클족들과 함께 사는 페니는 아들의 존재에 대해 묻는 그를 문전박대하며 욕을 내뱉고 분노를 표현한다.

그러나 돈이 만난 여자들은 하나같이 '분홍색'을 상징하는 어떤 물건들을 가지거나 입고 있다. 로라의 핑크색 가운, 도라의 분홍색 부동산 명함, 카르멘의 분홍 바지와 페니의 분홍색 모터사이클과 타자기는 이들 모두가 편지를 보낸 주인공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환상과 더불어 영화를 조금 더 몽환적으로 만든다.

내 아이의 엄마는 누구인가? 나에게 정말 아들이 있는가? 만약 아들이 있다면 그 아이는 누구인가? 성공적인 삶을 살던 주인공이 젊은 시절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과거의 일들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 이야기에 나는 언제나 매혹당했다. 그리고 그런 영화나 소설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프로방스 같은 시골로 떠나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브로큰 플라워'에서 도시는 그저 이름 없는 배경으로서만 작동한다. 아마도 그것은 짐 자무시 특유의 영화적 태도로, 영화가 끝까지 유지하는 모호함에 복무하기 위한 감독의 배려일 것이다.

만약 이런 영화가 똑같은 방식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면, 나는 '빌 머레이'가 연기한 '돈'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연 '기타노 다케시'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을 눈물 나게 웃겨 본 사람만이 얼굴에서 완벽하게 웃음기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위대한 코미디언만이 가장 처연한 '무표정함'을 연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멀리서 보면 인생을 지독한 희극이라고 믿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편견일지 모른다.

늦은 점심을 먹은 오후,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만약 이런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진다면 누가 빌 머레이 특유의 무표정을 훔쳐낼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돈'이 건네는 마지막 대사, "과거는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삶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여기 있는 건 현재뿐이고, 이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전부구나"를 가장 무표정하고 덤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그런 배우 말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주인공의 얼굴을 그려보고 있는 중이다. 빌 머레이의 이마와 눈가에 생긴 π(파이)모양의 주름을 보면서 나는 3.1415926…의 원주율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영화 속 길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브로큰플라워: 짐 자무시 감독 작품. 샤론스톤, 제시카 랭, 프랜시스 콘레이, 틸다 스윈튼 같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들이 ‘돈’(빌 머레이)의 과거 여자들로 출연해 열연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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