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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멕시코

멕시코 멕시코시티 : 황금으로 빚은 초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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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번쩍이는, 코르테스와 천사의 황금

해발 2,240m의 고원에 자리잡은 멕시코시티는 황금으로 뒤덮여 있었고, 황금 때문에 멸망했고, 황금의 추억으로 살아가는 도시다. 14세기 초 톨텍 제국이 멸망한 뒤 이곳으로 옮겨온 사람들은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을 건설하고 대제국 아즈텍의 영광을 구가했다. 이 도시는 인구 20~30만 명을 수용한,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대도시였다.


1518년 베라크루스 해안에 도착한 정복자 코르테스는 5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내륙 정복에 나섰다. 황금으로 뒤덮여 있다는 즈아즈텍의 도시에 대한 소문이 그의 피를 끓게 했다. 그는 주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병사와 말을 늘려가며 수도로 들어섰다. 황제 몬테주마 2세는 전통에 따라 그들을 환영했고 황금으로 된 갖가지 선물을 하사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코르테스의 병사들은 축제를 벌이기 위해 사원에 모여든 아즈텍의 지도층을 몰살시키고 황금을 노략질했다. 그 가치는 구대륙의 물가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분노한 시민들은 '슬픔의 밤(La Noche Triste)'에 스페인 병사들과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왕을 처단했는데, 이때 황금을 들고 달아나다 호수에 빠져 죽은 병사들은 저주받은 보물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코르테스의 황금 주화 역시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스페인 군대를 신의 사자로 착각했던 아즈텍 제국은 멸망했고, 테노치티틀란은 가톨릭교회를 믿는 멕시코시티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이 도시는 거대한 기둥 위에 있는 황금의 천사상이 내려다보고 있다. 멕시코 독립전쟁 개시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앙헬(El Ángel)은 이 도시를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독립의 천사상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지나치게 맛있는, 타코와 식도락의 전쟁터

아즈텍의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 만든 토르티야를 애용해왔다.


아메리카 대륙의 한가운데서 유럽 각국의 방문을 허락한 멕시코는 식도락의 전쟁터가 되었다. 아보카도를 넣은 아즈테카 수프, 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돼지껍질 튀김, 테킬라, 메스칼, 코로나와 같은 갖가지 술들…. 그중에서도 타코(Taco)를 빠뜨리고서는 이 도시를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아즈텍을 비롯한 중앙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 만든 토르티야를 밥이나 빵과 같은 기본적인 식사로 애용해왔다. 농부의 아내들은 토르티야에 여러 재료들을 싸서 먹는 타코를 새참으로 만들곤 했는데, 각 지역 사람들이 멕시코시티로 몰려들어오면서 수백 가지 타코가 경연을 벌이게 되었다. 국립궁전 옆의 소칼로 광장(Plaza de la Constitución)은 주말마다 온갖 노점으로 뒤덮여, 화끈한 살사 소스를 끼얹은 타코를 베어먹기에 아주 좋은 장소가 된다.

여행객들은 뜨거운 오후에 가벼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길거리 타코를 찾게 마련이지만 유념해둘 사실이 있다. 멕시코시티에서 타코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 이후의 식사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오후의 식사를 가장 거나하게 먹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시간을 제외한다면 곳곳의 타코 가게에서 갈아구운 고기, 석류 알맹이, 허브와 채소, 각종의 살사 소스가 뒤섞인 맛의 향연에 동참할 수 있다.


지나치게 흥겨운, 마리아치 밴드

"멕시코~, 멕시코~" 영화 [제8요일]을 보고난 사람들은 이런 노래를 자기도 모르게 부르게 된다. 왜 프랑스 영화를 보고 대서양 너머의 저 나라를 찾게 되는 걸까?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요란한 치장의 멕시코 가수가 난데없이 나타나 노래를 부르기 때문인데, 그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잊기가 어렵다.


커다란 모자에 쫙 달라붙은 옷과 부츠를 갖춰 입은 마리아치 밴드는 멕시코의 흥겨움을 전 세계에 퍼뜨렸다. 미국 남부를 비롯한 곳곳의 식당에서 돈을 받고 노래를 해주는 이 밴드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역시 본연의 마리아치를 만나려면 멕시코시티, 특히 가리발디 광장(Plaza Garibaldi)을 찾아가야 한다. 여러 길거리 밴드들이 마치 경연을 벌이듯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복장의 스타일이나 악기의 구성들이 조금씩 다르다. 여러 음역대의 크고 작은 기타와 바이올린은 집시 밴드의 구성과 비슷하지만, 때론 하프도 등장하고, 쿠바 음악에 영향을 받은 트럼펫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가리발디 광장에서는 마리아치 외에 야로초, 노르테뇨 등의 민속 음악 밴드들도 만날 수 있다.




마리아치 밴드의 음악은 스페인을 중심으로 중미와 아프리카의 민속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코요아칸에 있는 프리다의 '푸른 집'. 다리를 자른 말년의 그녀는 이 집과 정원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못했다.


20세기 초반 황금의 천사는 영광스럽게 기둥 위로 올라갔지만, 독립국가 멕시코는 여전히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의 절대 권력 아래 무릎 꿇려 있었다. 스페인 지배자들로부터 유형과 무형의 유산을 물려받은 대지주들은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있었고,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는 지배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러시아 혁명의 전초가 되는 멕시코 혁명의 봉화가 타오른다. 멕시코시티는 아메리카의 등불이 되었고, 도시는 혁명이 가져다준 창조적 열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 한가운데 있었던 남자가 디에고 리베라. 그 그늘 아래 더욱 독창적인 예술혼을 불태운 여자가 프리다 칼로였다.


시대를 불태운 뜨거운 연인이었지만 동시에 치정극의 맞상대였던 두 사람. 그들의 작품은 멕시코시티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대변하고 있다. 아즈텍 문명의 유산을 혁명적 스케일로 재현한 디에고의 벽화는 대통령궁에 있는 '멕시코 식민의 역사'를 비롯해 이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멕시코의 국민 예술가로 미국과 러시아에까지 그 명성을 떨친 디에고의 위용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반면 프리다는 오랫동안 '디에고의 부인'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죽은 뒤 수 십 년 뒤인 1980년대에 와서야 새로운 예술 운동을 통해 그녀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알려지게 되었다. 소아마비로 고통받은 어린 시절, 여성으로서의 억압과 콤플렉스, 멕시코의 자연을 느끼게 하는 원시적 화풍…. 그녀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마이너리티의 대변자가 되었다. 현재 박물관이 된 프리다의 '푸른 집(La Casa Azul)'은 그녀의 예술과 더불어 남편 디에고와 혁명가 트로츠키에 얽힌 놀라운 삶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의 발길로 분주하다.



지나치게 현학적인, 바스콘셀로스 도서관

21세기 들어 멕시코시티는 세계에서 가장 번잡하고 오염되고 위험한 도시라는 오명을 벗어나고자 여러 노력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 역시 이 도시의 놀라운 창의성과 초현실주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멕시코의 국립 도서관장을 역임한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도서관(José Vasconcelos Library)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난해한 구조의 도서관으로 보인다. 큐브 형의 구조물이 서로 얽혀 있는 사이로 거대한 공룡의 골격이 전시되어 있다.

빈센트 대통령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이 건축물은 '멕시코시티의 막대한 인구는 막대한 문학 인구'라는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다. 부에나비스타 기차역과 결합된 건물을 통해 하루 35만 명에 이르는 이곳의 지하철, 버스, 교외 기차 이용객을 독서 대중으로 끌어들이고자 한다.




도서관은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발레나'를 비롯한 여러 멕시코 현대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지나치게 모은 세계, 코로니아 로마

보자르 스타일의 건축물을 만날 수 있는 코로니아 로마, 아트 갤러리.


분명 코로니아 로마(Colonia Roma)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수도가 아니라 이 지역의 옛 이름인 라 로미타(La Romita)로부터 왔다. 그러나 이 동네를 거니는 사람들이 유럽의 어느 도시에 왔다는 착각에 빠지기란 어렵지 않다. 루이 카브레라 공원의 아름다운 분수와 곳곳에 자리잡은 보자르(Beaux-Arts) 양식의 건물들은 '리오 데 자네이로' '마드리드' 등 먼 나라의 이름을 딴 지명들과 겹쳐지며 묘한 다국적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20세기 초반 중상류층이 모여 살면서 아름다운 건축과 조각으로 장식해갔던 이 지역은 1940년대에 이르러 부유층이 교외를 떠나며 조금씩 쇠퇴해갔다. 1985년의 대지진의 여파는 이 지역에도 커다란 타격을 주었는데, 신기하게도 무너진 대부분은 새로 지은 건물들이었다고. 그 덕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지금도 멕시코시티의 서정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가 되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신들 - 국립 인류학 박물관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유일신을 내세우며 이 땅을 정복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온갖 신들이 뒤엉켜서 사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증거가 바로 여기, 기둥 하나로 받혀져 있는 84m의 캐노피 아래 있다. 멕시코 모든 박물관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국립 인류학 박물관(Museo Nacional de Antropología). 아즈텍인들이 테오티우아칸을 두고 '인간이 신이 되는 장소'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수 있는 곳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전시물은 멕시코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태양의 돌'. 25톤의 돌에 새겨진 거대한 신의 모습인데, 중앙에 있는 태양의 신 주위로 종교 의식에 사용되던 달력의 주기가 표시되어 있다. 기괴한 팔다리의 위치를 보여주는 땅의 여신, 노래와 춤을 담당했다는 거북이 모양의 신,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유명한 팔렌케 청년의 머리 등 예술혼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아텍의 '태양의 돌'은 소칼로 광장 아래에 있다가 1790년에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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