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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일본

일본 시코쿠 헨로미치 - 1200년 역사의 일본 불교 성지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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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절박한 삶의 물음표 따위가 없다 해도, 간절한 비원 같은 것을 품지 않았다 해도, 누구나 삶의 속도를 멈추고 일생에 한 번은 떠나야 할 순례의 길. 산과 바다와 들과 마을 사이 여든여덟 채의 절집을 지나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오는 1,200킬로미터의 먼 길.

천이백 년간 이어져 온 불교 성지 순례길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네 개의 본섬 중에 가장 작은 섬 시코쿠. 그 섬에 천이백 년간 이어져 온 불교 성지 순례길이 숨어 있다. ‘헨로 미치’라 불리는 길은 번호가 붙은 88개의 절을 순서대로 돌아 1번 절로 돌아오는 1,200킬로미터의 장거리 순례길이다. 시코쿠에서 태어나 시코쿠에서 깨달음을 얻은 홍법대사(774년-835년)의 발걸음을 좇는 순례다.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진언종을 창시한 홍법대사는 최초로 중일사전을 펴내고, 일본어 알파벳인 히라가나를 만들기도 한,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승 중의 한 분이다.

홍법대사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숲길을 걷고 있는 순례자.

깨달음을 향한 1,200km의 순례 의식

지난 1,200년간 순례자들은 홍법대사의 발자취를 따라 깨달음을 간구하거나, 간절한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 이 길을 걸어왔다. 현대적인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 험한 길을 걸어서 순례할 수밖에 없던 순례자들은 이 길에서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순례자들의 전통 의상인 흰 옷은 길에서 삶을 마치게 되었을 때 수의로 사용하기 위해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한 절에서 다음 절로 이동하며 4-5일 만에 순례를 마친다.

하지만 최근, 지나치게 빠른 일상의 속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려는 도보 순례자들이 다시 몰리고 있다. 굳이 깨달음의 염원이나 절실한 갈망이 없어도,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어서이다. 버스와 자동차와 자전거와 기차 곁을 스쳐가면서 오직 두 발에만 의지해 1,200킬로미터를 걷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땀과 눈물과 고통이 배인 그 먼 길을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 남겨지는 것들이 궁금하다면, 별 수 없다. 직접 배낭을 메고 순례자가 되어 이 길 위에 오르는 수밖에.


'하쿠이'라 불리는 흰 옷은 순례자의 상징이다.

순례는 1번 절 료젠지에서 시작해 88번 절 오쿠보지까지 걸은 후 다시 1번 절로 돌아옴으로써 완성된다. 섬을 한 바퀴 일주하는 이 형식은 깨달음을 향한 중단 없는 추구를 의미한다. 갈림길마다 빨간 화살표와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순례자의 그림이 길을 알려주기에 어지간한 길치도 걱정 없이 걸을 수 있다. 순례자들은 절에 들어서면 정해진 순서대로 참배를 행한다. 먼저 수돗가에서 손과 입을 헹굼으로써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혼도라 불리는 본당으로 간다. 향과 초를 바치고 반야심경을 읊은 후 이름과 주소 등을 적은 종이 오사메후다를 바치며 시주를 한다. 다음은 홍법대사를 기리는 대사당에서 같은 순서로 참배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납경소에 가서 납경장이라 불리는 공책에 도장과 서명을 받음으로써 순례의 의식이 끝이 난다.

료젠지에서 오쿠보지까지 88개의 절

순례는 도쿠시마현(德島)의 1번 절 료젠지에서 시작된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순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함으로써 순례를 시작한다. 1번 절에서 10번 절까지는 4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로 하루 이틀에 걸을 수 있는 평지길이다. 순례의 첫 시험대는 11번에서 12번 절 쇼산지까지 가는 길이다. 전체 순례길 중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길이다. 경사가 가파른 오르막을 끝도 없이 오르는 깊은 산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쿠시마현의 마지막 절인 23번 절 야쿠오지는 태평양에 면한 절이다. 야쿠오지에서 다음 절인 고치(高知)현의 24번 절(홍법대사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까지는 무려 84킬로미터. 절이 사라진 길은 더없이 적막하고 쓸쓸하며 멀게만 느껴짐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길이다. 37번 이와모토지에서 38번 콩고후쿠지까지는 이보다 더 먼 87킬로미터. 전체 구간에서 절과 절 사이가 가장 긴 길이다. 코치 현을 걸을 때면 절벽으로 막힌 산들과 망망한 태평양으로 인해 종종 고립무원의 기분이 들기도 한다.


시코쿠의 세 번째 현은 에히메현(愛媛縣). 절벽 위에 서 있는 45번 절 이와야지를 지나면 시코쿠에서 가장 큰 도시 마쓰야마. 전설적인 도고 온천에서 지친 몸을 쉬고, 8개의 절을 이 도시에서 통과하는 동안 오랜만에 도시의 혜택을 즐길 수도 있다. 가장 높은 900미터 산 위의 66번 절 운펜지를 지나면 가가와현(香川). 인구 1인당 우동집의 숫자가 일본에서 가장 많다는, ‘사누끼 우동’의 본고장이다. 우동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 덕분에 걷는 내내 싸고, 맛있고, 양까지 푸짐한 우동을 즐길 수 있다. 뇨타이 산을 넘어 88번 절에 도착하면 전통에 따라 그동안 들고온 지팡이를 이곳에 남겨두고 돌아선다. 마지막 40킬로미터를 더 걸으면 1번 절. 긴 순례의 끝이다.

고된 순례길을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동행해준다.

마음까지 환해지는 예쁜 순례길의 모습

홍법대사와 함께하는 길

1,200킬로미터의 길을 혼자 걷는다 해도 결코 혼자는 아니다. 길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인동행’이라 적힌 팻말처럼 홍법대사가 내내 함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코쿠의 주민들이 순례자들에게 건네는 작은 정성인 ‘오세타이’가 있어 내내 따뜻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다. 산과 바다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풍경의 빼어남, 길에서 만나는 순례자들과의 인연, 피로를 덜어주는 온천과 신선하고 맛있는 토속음식 등은 순례길의 즐거움을 더하는 요소들이다. 가깝지만 멀게 느껴졌던 이웃나라의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덤까지 따라온다. 일생에 한 번은 꼭 걸어야만 한다고 뜨겁게 추천하는 길이다.

순례자들이 여관 앞 바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코스 소개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인 홍법대사(774-835)의 자취를 따라 88개의 절을 참배하는 순례길. 번호가 매겨진 88개의 절을 1번 절부터 시계방향으로 순례, 다시 1번 절로 돌아오는 1,200킬로미터의 길이다. 순례자들은 ‘하쿠이’라 불리는 흰 웃옷을 입고, ‘스게가사’라 불리는 삿갓모자를 쓰고, 홍법대사를 상징하는 ‘즈에’라는 이름의 지팡이를 들고 걷는다. 절에 들어서면 수돗가에서 입과 손을 헹군다. 본당에서 향과 초를 바치고, 종을 쳐서 도착을 알린다. 이름과 주소, 날짜를 적은 종이 ‘오사메후다’를 함에 넣고, 시주를 바치고 반야심경을 읊는다. 대사당에서 똑같은 순서를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납경소에서 납경장에 도장과 서명을 받는다. 빨간 화살표로 전 구간이 안내되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전 구간을 완주하면 순례자 교류 센터에서 완주증서를 받을 수 있다.

찾아가는 길
순례의 시작점이 되는 1번 절 료젠지는 도쿠시마현의 반도(坂東)시에 있다. 서울에서 시코쿠의 마쓰야마나 다카마쓰로 가는 직항 항공을 이용한다면 기차로 반도시까지 이동. 고야산에서 출발한다면 페리로 와카야마시에서 도쿠시마시까지 두 시간이 걸린다.

여행하기 좋은 때
봄과 가을이 걷기에 좋다. 여름은 우기와 높은 습도 때문에 쉽게 지친다. 날씨가 좋은 봄이 가장 인기 있는 기간이어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단체 순례자들이 넘치는 시기다. 덜 붐비면서 날씨도 비교적 좋은 시기는 10월에서 11월 사이.

여행 Tip
순례자들은 순례 전이나 순례 후 와카야마현의 고야산으로 간다. 홍법대사가 입적한 오쿠노인을 참배하며 홍법대사님께 순례의 안녕을 기원하거나 무사히 마침을 감사드린다. 최근에는 순례를 마친 후에 찾아가는 순례자들이 늘고 있다. 오사카의 난바역에서 기차로 1시간 반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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