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빛과 물빛에 취해 걷는 길. 산과 계곡, 호수와 18세기의 풍경이 오롯이 남은 마을. 영국식 티룸에서 ‘애프터눈 티’ 한 잔에 지친 다리를 쉴 수 있는 곳. 자연과 역사가 함께 살아 있는 곳.

열여섯 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높은 산들

“잉글랜드에서 걷기의 심장과 영혼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레이크 디스트릭트다.” 여행 가이드북 ‘론리플래닛’은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잉글랜드 북서부의 쿰브리아주에 위치한, 동서로 50킬로미터 남북으로 40킬로미터의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1년 내내 관광객들이 몰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가득 찬 영국 도보여행의 성지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호수인 윈더미어를 비롯해 열여섯 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깊은 계곡,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산빛과 물빛이 고운 그 미색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걷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워즈워드나 요절한 키츠, 셸리러스킨 등 수많은 시인과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산길과 물길, 능선길, 계곡길, 마을길, 들길이 전방위로 펼쳐져 있어 걸으며 소요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뜨린다.

한없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레이크 디스트릭트. 18세기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가 즐겨 걸었던 트레일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수많은 트레일 중 한 곳을 꼽기란 뷔페식당에서 첫 접시를 채우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래도 대표적인 길 두 곳만 소개하자. 첫째는 페어필드 홀스슈(The Fairfield Horseshoe) 코스. 걷기를 놀이로 선택한 최초의 인간 중의 하나인 워즈워드가 즐겨 걸었던 트레일이다. 페어필드는 레이크 디스트릭트 중심부에 자리한 873미터의 산이다. ‘페어필드 홀스슈’는 이름 그대로 페어필드산의 한 쪽 능선을 타고 정상에 오른 후 반대편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말발굽 모양의 코스로 6시간 남짓 소요된다.

길은 A191도로를 따라 암블사이드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시작된다. 도로 옆으로는 양들이 풀을 뜯는 들판이 이어진다. 30분 남짓 도로를 따라 걷다가 라이달 마운트(Rydal Mount)라는 이정표가 붙은 길로 들어선다. 라이달 마운트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의 대표격인 워즈워드가 181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37년을 살았던 집이다. 워즈워드의 후손들은 그의 선조가 쓰던 물건과 가구가 그대로 남겨진 이 집의 일부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회칠을 한 흰색 건물은 16세기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해 고풍스런 느낌이다. 워즈워드가 시를 쓰곤 했다는 작은 방의 창문으로는 푸른 호수의 끝자리와 정원의 나무들이 가득 담겨온다.


페어필드산 정상으로 향하는 오르막 능선길.

산빛, 물빛 영롱한 대자연의 신비

정원을 둘러본 후 라이달 마운트를 나서면 이제 본격적으로 페어필드산으로 향하는 길이다. 페어필드는 워즈워드가 라이달 마운트에 사는 37년간 수도 없이 오르내렸던 산이다. 길은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돌담이 장식처럼 박힌 가파른 길을 올라갈수록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져 걸음이 늦어진다. 암블사이드와 윈더미어 호수와 주변 숲이 따라온다. 초반부는 경사가 급하지만 중반 이후는 비교적 평이하게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의 전망은 시원하다. 서쪽으로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스카펠 파이크(Scafell Pike 978미터)가, 동쪽으로는 하이 스트릿 산(High Street)의 긴 능선이, 남쪽으로는 윈더미어 호수의 아름다운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아담한 호수 '라이달 호수'주변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돌담과 운치 있는 낙엽길

하산길은 돌무덤으로 표시된 길을 따라 반대편 능선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능선길에는 양떼를 위해 설치한 돌담이 길게 늘어서 있다. 돌담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호수를 넘어온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가을햇살이 어깨로 내려앉는다. 물빛은 곱고 산세는 넉넉해 마음까지 상쾌해진다. 아스라이 보이던 암블사이드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면 길의 끝이다.

1년 내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

두 번째 코스는 암블사이드에서 그라스미어까지 가는 4시간의 코스.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지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폭우가 쏟아진다거나 강풍이 불어온다 해도 1년 내내 걸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A591 도로를 따라 암블사이드를 벗어나면 길이 시작된다. 러프릭 테라스(Loughrigg Terrace)를 경유해 그라스미어까지 2시간 남짓은 순한 능선길이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어서 길을 잃을 염려도 없다. 그라스미어 마을에 도착하면 워즈워드가 묻힌 성 오스왈드 교회와 그의 생가 ‘도브 코티지’를 둘러본다. 주변의 작은 티룸에 들어가 ‘애프터눈 티’를 즐기는 것도 영국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이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 생강빵도 베어 물고 걷는다. 돌아올 때는 도브 코티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해 코핀 루트를 지나 라이달 마운트를 둘러본 후 암블사이드로 돌아오면 된다.

그라스미어와 주변 산들이 파노라미처럼 펼쳐진다.

코스 소개
가장 영국적인 풍경을 자랑한다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도보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19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마을들이 호수 주변으로 병풍처럼 둘러선 곳이라 한 번 이곳의 매력에 빠지면 벗어나기가 힘들 정도다. 또 도보여행뿐 아니라 본격적인 등산, 낚시와 항해, 산악 자전거 등 다양한 야외활동을 할 수 있다. 워즈워드와 베아트릭스 포터의 자취로 가득한 이곳에서는 워즈워드의 생가와 박물관, 포터의 농가인 힐탑(Hill Top)과 호크쉐드(Hawkshead)에 위치한 베아트릭스 포터 갤러리 등도 볼 수 있다.

찾아가는 길
잉글랜드 북서부 호수지방의 중심지 윈더미어까지는 런던 휴스턴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4시간 소요.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암블사이드행 버스를 타도 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작은 마을 암블사이드는 교통이 편리하고, 다양한 숙소와 각종 편의시설을 잘 갖추었기 때문에 도보여행자들의 베이스 역할을 하는 곳이다.

여행 TIP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국립공원은 국가의 소유인 공적 공원이 아니라 농장이나 단체 혹은 개인이 소유한 사적 공간이다. 국립공원 내의 트레일은 종종 마을이나 개인 소유의 목초지 등을 통과할 때가 많으므로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호수 지역은 변덕스러운 날씨로도 악명 높다. 이곳을 여행할 때는 반드시 여벌의 옷과 방수잠바, 방수신발, 지도와 나침반을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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