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에곤 실레가 사랑한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차로 3시간 떨어진 작은 도시 체스크 크룸로프. 100년 전 이곳에서 화가 에곤 실레는 인간의 삶의 새겨진 의심과 불안을 왜곡되고 뒤틀린 육체로 거칠게 그려내 결국 쫓겨났다. 하지만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나무와 강과 돌에 새겨진 그의 흔적을 더듬고 음미한다./체코관광청 제공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차로 3시간 떨어진 작은 도시 체스크 크룸로프. 100년 전 이곳에서 화가 에곤 실레는 인간의 삶의 새겨진 의심과 불안을 왜곡되고 뒤틀린 육체로 거칠게 그려내 결국 쫓겨났다. 하지만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나무와 강과 돌에 새겨진 그의 흔적을 더듬고 음미한다./체코관광청 제공
체코 프라하에서 남쪽으로 3시간을 달려 닿은 곳은 '보헤미안의 진주' 체스키 크룸로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나지막한 둔덕을 넘자 오메가(Ω), 쉽게 말해 말발굽 형태로 마을을 끼고 굽이쳐 흐르는 블타바 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리를 건너 들어선 마을은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듯하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건물들, 사이좋게 머리를 맞댄 붉은 '박공지붕'들에선 중세의 전설이 솟아오른다. 가이드 베로니카가 "전쟁 난 적 없고, 불탄 적도 없어서 16세기 건축물이 동화처럼 남아 있다"고 했다. 골목마다, 귀퉁이마다 기념품과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들이 손님을 부른다.

그 길 한가운데 '에곤 실레 아트센터'가 서 있다. 화가 에곤 실레(1890~1918)의 작품을 담고 있는 곳이다. 실레가 누군가? 천부적 재능을 지닌 동시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더불어 세기말·세기초 가장 뛰어난 오스트리아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에곤 실레 마니아라면 200여점에 달하는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빈 레오폴드 미술관에 가야 한다. 이 아트센터엔 복사본만 있으니까. 그래도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원래 실레 어머니의 고향.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 툴른에서 조그만 기차역의 역장 아들로 태어난 실레는 전 세계 어느 곳보다 이 도시를 사랑했다.

에곤 실레(오른쪽)과 1912년 22세 때 그린 자화상./레오폴드미술관·위키미디어 커먼스
에곤 실레(오른쪽)과 1912년 22세 때 그린 자화상./레오폴드미술관·위키미디어 커먼스
어두컴컴한 실내에 발을 들인다. 10~20명 들어갈 수 있는 소규모 방이 차곡차곡 펼쳐진다. 900평짜리 전시 공간에 실레만 있는 건 아니다. 다른 20세기 체코 화가들의 작품도 뒤섞여 숨 쉰다. 흙으로 거칠게 마감한 벽에 실레가 체스키 크룸로프를 화폭에 담은 그림이 걸려 있다. 조그마한 스케치들도 눈에 띈다. 거친 물살을 가르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 갓 세탁한 빨래가 펄럭이는 가정집 발코니, 짙푸른 강물과 대비되는 건축물의 노란 담벼락까지. 보고 있자니, 조금 전 무심코 지나온 도시 곳곳이 100여년 전에는 21세 실레의 스케치거리였단 생각이 퍼뜩 든다.

실레의 어머니는 독특했다. 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애틋한 감정은 없었다. 타고난 방랑벽에 따뜻한 모성애를 그리워했던 실레는 1911년 이곳에 작업실을 얻고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 화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건축가가 되었을 실레는 새로운 도시보다 오래된 도시의 낡은 건축 그림을 좋아했고, 체스키 크룸로프만 한 곳이 없었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오래된 도시에서 창문틀을 레몬색으로 칠할 거라며 들떴다. 뜻 맞는 예술가 친구들도 불러들였다. 하지만 평온도 잠시, 주민들이 석 달도 못 가 그를 못마땅해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과 동거하고, 여성의 누드를 그리고, 어린이를 데려다 모델로 세우는 삐쩍 마른 청년이 세상 사람들 눈엔 한낱 기행과 외설로 보였으리라. 결국 그는 얼마 못 살고 쫓기듯 딴 곳으로 떠나야 했다.

사람들은 얼른 그의 재능을 알아봐주지 않았다. 빈의 예술학교를 다닐 땐 교수들 사이에서 '악마가 너를 내 수업에 들어오게 하였구나!' 같은 말이 나돌았다. 궁핍함, 색 바랜 피부, 차가운 눈동자와 앙상한 손. 실레 그림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죽음의 그림자가 져 있고 시대를 앞서가서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런 그를 눈여겨본 사람이 '인생의 스승' 클림트였다. 17세 실레의 작업실을 찾아온 클림트는 어린 동료의 그림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그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러곤 "당신이 그려낸 얼굴들의 표정을 보니 질투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서로의 그림을 주고받으며 같은 해 숨을 거둘 때까지 깊은 우정을 나눴음은 물론이다.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
행복과 불행은 동시에 온다. 1914년 1차 대전 징집 명령이 떨어진 후, 실레는 빈에서 만난 여인 에디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식을 올린다.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며 몇 년 동안 재료비 걱정 없이 자유롭게 그림 그릴 수 있을 만한 돈도 벌어들인다. 하지만 1918년 10월 28일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 6개월이던 아내가 세상을 뜬다. 사흘 뒤 그 자신도 숨을 거둔다. 잠든 것처럼 고요한 죽음이었다.

한 화가의 삶을 한 도시가 품고 있다. 여행을 떠나 무엇을 보고 기억에 새길 것인지는 저마다의 몫. 스물여덟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영원한 이방인' 실레의 아트센터를 나와 생강빵 가게에 들른다. 16세기부터 전래되는 고유 비법에 따라 매장에서 직접 만들고 있단다. 체코어로 '페르니크(Pernik)'인 이 수제 압착 빵은 나무틀에 반죽을 손으로 다져 넣어 원하는 모양을 찍어낸다. 시간이 멈춘 곳. 저 홀로 부풀어오른 덩어리에 톡 쏘는 생강 냄새가 밴다. 보드라운 입에 조그만 조각을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씹어 삼키는 체코 아기의 볼이 탐스럽다. 시간은 다시 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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