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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핀란드

핀란드 : 진한 커피 향과 무비로드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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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주는 감동은 참으로 대단하다. 어느 일요일 오후 혼자 방 안에 앉아 영화 <필링Feeling>을 훌쩍거리며 본 지 무려 3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찡한 콧등의 울림이 느껴질 정도니 말이다. 이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을 감동을 주는 영화는 여행을 떠나게도 한다. 7년 전 우연히 본 영화 <카모메 식당>이 그랬다. 갈 곳 모를 진한 외로움을 지닌 주인공이 음식을 통해 치유돼가는 것을 보면서 영화 속 무대인 헬싱키에 반드시 가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겨났다.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것을 오스트리아 출장길 비행기 안에서 깨닫고 마음이 ‘꽁당꽁당’ 뛰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처럼 여행이 쉽지 않던 2000년대 초반에는 여행사의 상품 혹은 도시를 테마로 여행의 목표를 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여행의 목표를 특정한 장소, 먹거리, 쇼핑, 레포츠, 음악 등으로 세분화해서 떠나는 여행객들이 많아지고 있다. 여행은 이제 디테일한 카테고리 안에서 다양해지고 있다. 핀란드의 수도인 헬싱키에 마음이 꽂힌 것은 핀란드와 전혀 상관없이 일본의 한 영화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그곳에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긴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핀란드 헬싱키 풍경

외로움과 그리움이 신화처럼 퍼지다

원래 헬싱키는 목적지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로 10일간의 긴 출장 일정을 짜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유럽의 노동절과 맞물려서 항공편에 문제가 생겼다. 이리저리 상황을 알아보니 어쩔 수 없이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1박을 하고 프랑크푸르트로 간 후 바로 오스트리아로 환승하는 복잡한 일정이 나오게 됐다. 이번 출장은 매우 힘들겠다고 속으로 투덜투덜하면서 헬싱키에서 1박을 하고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일정을 체크하다가 지도 상의 헬싱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세상 어디를 가도 슬픈 사람은 슬프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법이잖아요” 라고 말하던 사치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 년 전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던 중에 우연히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았다. 그랬더니 내 무료함은 외로움이 되었다가 곧 그리움으로 변해갔다. 꼭 그곳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기하게도 헬싱키로 여정이 잡힌 걸 보면, 그리움의 깊이에 따라 무엇이든 이뤄질 수도 있겠다는 작은 희망이 생긴 것 같아 내심 흡족했다.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까지 북유럽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절묘하게 믹스돼 있는 이미지다. 추운 나라일수록 절실한 감성이 신화처럼 깊이 밴 탓이리라. 

핀란드 헬싱키 풍경

핀란드의 반타 국제공항에 내리면서 ‘후욱’ 코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긴 비행의 피곤이 절로 풀리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바로 오스트리아로 가야 하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웬만하면 그냥 쉴까도 생각했지만, 사치에의 목소리가 들린 이상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헬싱키 시내로 가기 위해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반타 국제공항으로 돌아와 651번 버스(61번 버스도 가능)로 갈아탔다. 전체 면적의 75%가 산림으로 뒤덮인 핀란드답게 시내로 가는 내내 거친 소나무 숲이 계속 이어졌다. 핀란드에서는 5월부터 9월까지 낮의 길이가 19시간에 달하는 백야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대낮처럼 환한 탓에 정신없이 시내 투어를 하다가 문득 본 시곗바늘이 버스가 끊기는 저녁 9시 언저리에 와 있음을 발견하고 기겁을 한 적도 있다. 우리처럼 외곽에 숙소를 마련했다면 반드시 정기적으로 시계를 살펴봐야 낭패를 보지 않을 듯하다. 1시간 정도를 달려 마침내 헬싱키 시내로 들어섰다. 헬싱키 중앙역 광장을 중심으로 쇼핑몰이 양옆으로 이어져 있고 명품숍도 즐비했다. 4월 말의 날씨는 쌀쌀하지만 시원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눈물 나게 맛났던 ‘카빌라 수오미’

핀란드 헬싱키 풍경

에스플러네이드 공원(Esplanade Park)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노천카페에서 차 또는 맥주를 마시는 핀란드인과 관광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 공원 곳곳에서는 벤치에 앉아 눈 감고 그저 햇볕을 즐기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찾아가야 할 ‘카모메 식당’을 찾는다는 가벼운 흥분은 물어물어 길을 찾아가면서 불안감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두리번거리는 한 덩치 하는 동양의 두 남자가 신기하고 안타까웠는지 딱 보기에도 호호 할머니 같은 분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마치 축지법이라도 쓰는 듯 골목골목을 10여 분간 종횡무진 누비시더니 거짓말처럼 카모메 식당 앞에 우리를 내려놓으셨다. 원래 이름은 ‘카빌라 수오미(KAHVILA SUOMI)’로 항구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자그마한 식당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마치 성지순례 행렬처럼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드시며 떠나는 모습에 무척 감동해 한동안 할머니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막상 찾아간 카빌라 수오미는 영화 촬영장으로 입소문과 유명세를 탄 만큼 꽤나 화려한 외관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저 항구에 있는 자그마한 식당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영화 포스터 하나가 덩그러니 붙어 있을 뿐이니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식당 찾기에 신경을 쓰다가 긴장이 풀리니 몹시 허기가 졌다. 식당 안에 들어가 창가 쪽 테이블에 앉으니 맘씨 좋게 생긴 할머님이 시원한 물 한잔을 갖다 주셨다. 이곳 핀란드 할머니들은 왜 이리 다 멋있고 인자하게 생기신 걸까. 연어스테이크와 미트볼을 주문하니 삶은 달걀을 띄운 브로콜리수프를 내줬다. 한술 뜨니 진한 크림의 고소한 맛과 브로콜리의 향이 어우러져 굳어 있던 몸이 단숨에 녹아 풀어졌다. 수프는 계속 리필할 수 있는데 그때마다 예의 인자한 미소를 띠며 삶은 달걀을 올려주시는 할머니의 미소 덕에 참으로 행복했다. 이곳의 연어스테이크는 반드시 먹어보길 추천한다. 핀란드에서 주로 잡히는 어종답게 연어의 풍미는 가히 오감을 만족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기에 으깬 감자와 튀김 감자를 선택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으깬 감자가 더 맛있었다. 10유로 내외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간단한 샐러드는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고 커피 및 간단한 음료도 마음껏 마실 수 있다. 특히 직접 만든 하우스 맥주 맛은 피로회복제처럼 느껴졌는데, 보리의 향과 적절한 탄산 그리고 과하지 않은 감미가 계속 리필을 하게 만들었다. 이 역시 무료다.

핀란드 헬싱키 풍경


항구를 거닐다

핀란드 가정에서 식사 대접을 받은 듯한 푸근함과 포만감을 안고 헬싱키 항구로 나섰다. 카빌라 수오미에서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바로 사치에가 장을 보던 마켓 플레이스가 나온다. 아침 6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열리는데 오후 2시에 공항에 도착한 탓에 직접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시간 맞춰 가면 싱싱한 채소와 과일, 생선을 파는 활기 넘치는 시장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워낙 신선하고 값싼 생선이 많아 ‘피시 마켓(Fish Market)’이라고도 불린다. 출출할 때는 바로 먹을 수 있게 만든 훈제 고기나 핀란드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완두콩을 간식으로 먹으며 눈과 입이 즐거워지는 구경을 할 수 있다. 또한, 5월 중순에서 9월 초까지는 야시장이 선다고 하니 놓치지 말 것. 

이곳에서는 시원하게 느껴졌던 날씨가 상당히 춥게 느껴졌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 항구는 춥다는 선입견 탓도 있는 것 같았다. 뒤집어놓은 배 위에 앉아 있는 늠름한 카모메(일본어로 갈매기를 뜻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사람들이 다가가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볼일만 보는 그 당당함(?)이 아주 귀여웠다. 이 항구를 통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이나 러시아의 탈린으로도 가는데 바이킹라인과 실야라인이라는 페리를 이용한다. 발트 해의 처녀라는 애칭답게 항구가 그리 크지 않고 아기자기한 것이 예쁜 여성을 닮았다. 어느덧 항구 벤치에 앉아 발트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저절로 이끌리듯 벤치나 바닥에 앉아서 바다를 보고 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걸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자연스레 그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저물어가는 항구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담았다. 

핀란드 헬싱키 풍경


Info
핀란드의 수도로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 남부 핀란드에 있는 핀란드 만 기슭에 위치한 항구도시이고 1952년 제15회 올림픽과 제47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가 개최된 곳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핀란드 최대의 수출입항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쇄빙선을 가동하여 항로를 유지하고 있다. 핀란드의 국영 항공사인 핀에어를 이용해 헬싱키까지 직항으로 가거나 유럽으로 가면서 헬싱키에서 1박 스톱오버하는 것도 좋다. 스톱오버 시 반타 국제공항 근처에 숙박처를 정하고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해 시내에 다녀오면 반나절 안에 헬싱키를 즐길 수 있다.


여병구 작가는 
‘여행은 떠날 때마다 이유를 만들게 하는 행복한 변명이다’를 모토로 세계여행잡지인 <뚜르드몽드>의 편집장으로서 여행을 떠나거나 혹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좋은 여행’을 만들어가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지만 독자들의 대신 누릴 권리를 위해 그의 시선은 항상 세계로 향하고 있다.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글·사진 여병구(여행작가, <뚜르드몽드> 편집장)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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