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여름 타이베이 예술대학 레지던시에 머물게 될 기회가 생겼다.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 각자의 작업을 하기 위해 모인 곳이었다. 

어린 시절 내게 타이베이는 여름이면 40도를 넘나드는 찜통 같은 곳으로, 여름에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도시였다. 여름에 타이베이에 다녀온 후 열사병 비슷한 걸 앓았던 엄마의 영향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이베이는 내게 '차이밍량'이나 '에드워드양', 후시아오시엔 같은 감독들의 도시로 바뀌었다. '애정만세'와 '하나 그리고 둘' '비정성시'와 '밀레니엄 맘보'의 도시로…. 

하지만 무엇보다 타이베이에는 헤어졌지만 만나고 싶은 친구가 있었다. 22년 넘게 한 번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바쁜 일정을 쪼개 그 도시에 머무를 이유 말이다. 

7월과 8월, 내 생애 가장 무더웠던 나날. 타이베이 예술대학 안에 있는 50m 트랙의 수영장에서 자주 수영을 했다. 타이베이에 유독 야시장이 발달한 이유를 그곳에선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밤이면 선배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타이베이에서 가장 큰 '스린 야시장'에 갔다. 서울 메트로만큼 깨끗한 지하철을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타이베이에서 만났다. 

흥미로운 건 타이베이 지하철 안에선 음료수를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던 선배의 손에 여섯 번째 손가락처럼 언제나 들려 있던 '타이완비어'도 지하철에선 절대 금지였다. 

"왜? 그럼 목 마르면 어떡해? 생수도 마시면 안 돼?" 

"그럼 몰래 마시다가 걸리든지! 벌금 내야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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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러시아워 [사진제공 = GettyImagesBank]

너무 더워서 나처럼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하루에 몇 캔씩 타이완비어를 물처럼 마셨다. 타이베이 사람들 손에는 과일주스 아니면 청량음료, 버블티가 들려 있었다. 버블티 가격도 서울에 비해 놀랄 만큼 쌌다. 그곳에서 나는 물 먹는 하마처럼 늘 음료수를 마셨다. 시장은 언제나 새벽까지 북적였다. 자주 시장을 돌아다니며 진심으로 대만 음식을 좋아하게 됐다. 

나의 첫 외국인 친구는 밴쿠버에서 만난 대만 여자아이였다. 그녀의 영어식 이름은 '엔젤'이었는데 이름처럼 착한 애였다. 엔젤 때문에 처음으로 밴쿠버의 차이나타운에서 버블티를 마셨다. 그때의 놀라움이라니! 아직도 음료수 안에 든 '찹쌀떡'같은 검은 물질, '타피오카펄'의 쫀득한 질감이 기억날 정도다. 

나는 엔젤에게 순두부와 잡채를, 그녀는 내게 국수와 베이징 덕을 종종 요리해줬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내가 만난 대만 친구들은 참 순하고 다정하며 친절했다. 

서울로 돌아갈 즈음 레지던시에 머물던 홍콩 남자아이의 전시를 봤다. 자기 몸에 이런저런 상처를 내고, 그 상처의 흔적을 발표하는 엽기적인 전시였다. 보기에 따라선 구토를 유발할 만한 작품이라 보는 내내 힘들고 흥미로웠다. 

옆방에선 가야금인지 거문고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악기 소리가 아침마다 들려왔다. 정말이지 엉망진창의 연주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엘리자베스 맥닐의 '나인 하프 위크'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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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여행박사]

"사흘에 한 번씩 내 머리를 감겨주었다. 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는데, 처음 두어 번은 솜씨가 형편없었다. 어느 날 그는 눈이 돌아가게 비싼 '켄트 오브 런던' 머리 브러시를 사왔고, 그날 저녁 그 빗으로 날 때렸다. 멍이 다른 것보다 훨씬 오래갔다. 매일 밤 그 브러시로 내 머리를 빗질했다." 

이런 문장을 읽으며 언젠가 복도에서 그 사람과 마주치면 머리빗으로 꿀밤을 한 대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타이베이를 떠나기 전 선배와 둘이 여행을 떠났다. 스쿠터를 타고 대만 전체를 여행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타이베이만 벗어나면 도무지 영어가 통하지 않아 택시에서 엉뚱한 곳에 내리거나 황당한 곳에 불시착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불시착하듯 내렸던 바닷가 마을이 떠오른다. 시골의 작은 식당에선 견종을 알 수 없는 검은색 개를 키웠는데, 그 개는 내 옆에 앉아 우리가 만두를 먹을 때마다 혀를 길게 내민 채 침을 뚝뚝 흘렸다. 내 생전 그렇게 침을 많이 흘리는 개는 처음 보았다. 나는 만두 하나를 검은 개에게 주었다. 개는 내 손가락까지 맛나게 먹어치울 기세였다. 

여전히 덥고, 습한 바람이 불어왔다. 대만의 여름밤은 시간마저 물 속의 휴지처럼 녹여버릴 것 같았다. 검은 개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던 타이완비어의 맛이 아직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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