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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미국

미국 : 소설 브루클린 풍자극_ 브루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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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가 남자? 터프한 남자가 여자?… 이곳에선 원칙을 논하지 말라

한때 다니엘 페낙의 '말론센' 시리즈에 열광했던 나는 그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벨빌' 같은 곳에서 살면 소설은 절로 써질 것이라 상상하곤 했다. 인생의 절반을 거대한 아파트 단지 속에서, 비슷한 억양의 한 가지 언어만 듣고 살아온 내게 유대인 이민자들과 불법 체류자들, 아랍인과 흑인, 중국인들이 다닥다닥 모여 사는 시끄러운 동네가 매력적으로 보인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영화‘브루클린으로 향하는 마지막 비상구’를 본 사람들에게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은 몽롱한 도시다. 그러나 작가 폴 오스터는 여러 작품을 통해 브루클린의 매력을 세세히 보여준 다. 사진은 뉴욕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브루클린교(橋)의 모습. / AFPㆍ연합
"가지각색으로 다른 외국의 억양이 합쳐진 소리에, 그곳의 아이들과 나무들에, 열심히 살아가는 중산층 가정에, 레즈비언 커플들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에, 길거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하는 헐렁한 흰 옷을 걸친 인도인 성자들에게, 그곳의 난쟁이들과 불구자들에게, 보도를 따라 굼벵이 걸음을 걷는 늙은 연금 수령자들에게, 그곳의 교회 종소리와 수천 마리 개들에게, 지하 셋방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길거리를 따라 손수레를 밀고 돌아다니며 빈병과 폐품을 찾아 뒤지는 떠돌이 넝마주이들에게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폴 오스터가 묘사하는 브루클린과 다니엘 페낙이 속삭이는 벨빌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비슷해서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인종과 언어를 초월한 욕망의 집결지 같다. 언젠가 '엘르'에서 폴 오스터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나는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70년대에 인구통계 조사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할렘가 담당이었죠. 아주 나이 많은 흑인 여자의 집을 방문하게 됐어요. 시력을 거의 잃은 여자였는데 나를 멀찍이 보더니 이러더라고요. 당신은 흑인이 아니군요. 백인이에요. 내 인생 통틀어 우리 집에 온 첫 번째 백인이네요."

그 첫 번째 백인의 존재는 작가라는 자기 정체성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벨빌이나 브루클린 같은 곳에 아이가 탄생한다면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 나오는 주인공 '모모' 같은 존재, 아이지만 신비로운 눈망울을 가진 '어른아이'로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브루클린 풍자극'에도 어느 날, 이런 존재가 선물처럼 배달된다.

"나는 조용히 죽을 만한 장소를 찾고 있었다"로 시작하는 소설 '브루클린 풍자극'은 퇴직한 59세 생명보험판매원인 네이선 글래스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폐암으로 항암치료를 받던 중 회사에서 잘리고, 아내와는 일찌감치 이혼했으며,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과도 사이가 틀어지기 일보 직전인 이 위기의 남자가 어느 날, 죽을 만한 장소로 브루클린을 선택한다.

뉴욕시 브루클린의 워터프론트 공원에서 한 부부가 마천루를 뒤로 산책을 하고 있다. / APㆍ뉴시스

하지만 그는 우연히 헌책방에서 오래전 소식이 끊겼던 조카 톰을 만나게 되고, 타고난 엘리트로 영문학 교수가 될 재목이었던 톰이 어떤 사연인지 한껏 뚱뚱해진 몸으로 택시 운전을 하다가 브루클린의 헌책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톰이 변한 이유를 찾던 네이선은 주소 하나 달랑 적힌 쪽지를 들고 자신에게 찾아온 톰의 조카 루시와 살게 되고, 곧 톰과 함께 행방이 묘연한 루시의 엄마를 찾아 긴 여행을 나서게 된다.

그들의 기이하고 괴상한 여행이 주는 선물은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느냐는 폴 오스터의 오래된 질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죽음의 끝에서 삶 쪽으로 걸어 나오던 주인공 네이선이 마주친 뉴욕의 하늘은 세계무역센터의 북쪽 타워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기 딱 46분 전인 2001년 9월 11일 오전 여덟시. 그의 증언대로 "그로부터 두 시간 뒤에는 3000명을 재로 만들어 버린 연기가 브루클린 쪽으로 밀려올 것이고 그와 함께 죽음과 재가 하얀 구름으로 우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이다.

브루클린을 '브루클린으로 향하는 마지막 비상구' 같은 영화의 배경으로 기억하는 사람에게 이곳은 분명히 술에 취한 몽롱한 눈빛의 창녀 '트랄라'의 도시이다. 그러나 폴 오스터가 말하는 브루클린, 특히 '에드거 앨런 포우'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비교논문으로 삼촌 네이선을 늘 기쁘게 했던 톰이 택시 운전기사로 이 도시를 누비며 이 도시를 예찬하는 장면에선, 그만 이 욕망의 집결지에 비추는 수많은 네온들이 결국 도시의 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새벽 세 시 반에 타임스 광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다 보면 모든 통행이 다 끊어져서 문득 세상 한복판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머리 위로는 사방에서 온통 네온 불빛이 쏟아져 내리고요. 아니면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이나,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택시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실제로 우주 속을 날고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이토록 시적인 문장이 가능한 도시에서 처참한 테러가 자행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이고, 누구보다 터프한 저 남자가 여자라는 또 다른 역설, 이것이 브루클린이 가지고 있는 삶의 역동성은 아닐까. 인간은 죽음으로서 또한 살아가는 그런 존재는 아닐까라는 거대한 질문이 유효한 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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