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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이탈리아 로마 : 달콤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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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거짓말을 위한 면죄부 - 진실의 입

"온종일 좋은 것만 할 거에요. 머리를 깎고, 젤라토를 먹고, 노천카페에 앉고..." [로마의 휴일]의 공주 오드리 헵번은 패전의 상처로 괴로워하던 이 도시에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일을 선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나? 거짓말! 공주는 서민 소녀로 변장한 채 길거리를 쏘다니다 잠든다. 기자인 그레고리 펙이 묻는다. "아가씨의 집은 어디에요?" "콜로세움!" 기자 역시 특종을 위해 그녀의 거짓말을 모르는 척한다.


둘은 스페인 광장, 마르첼로 극장, 베네치아 광장, 산타젤로 성 등 로마 곳곳을 누비며 지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하루를 보낸다. 베스파 스쿠터를 마구잡이로 몰다 경찰서에 잡혀가지만, 또 하나의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다. "결혼하러 가는 도중이었거든요."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Santa Maria in Cosmedin) 교회 안에는 '진실의 입(La Bocca della Verità)'이라는 둥근 조각이 있다. 고대 로마의 분수 장식이거나 하수구 뚜껑으로 보이는데, 여기에 얽힌 전설이 중세부터 내려오고 있다. 이 조각의 입 부분에 뚫린 구멍에 손을 넣고 거짓말을 하면 손을 깨물어버린다는 거다. [로마의 휴일]에서 진실의 입에 손을 넣은 그레고리 펙은 마치 진짜 손이 잘린 양 오드리 헵번을 깜짝 놀라게 한다. 헵번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진행된 장면이라 그 놀란 표정은 연기가 아니었다나. 어쨌든 아직까지 진실의 입에 손을 물린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로마에서는 웬만한 거짓말은 거짓말로 취급당하지 않는다는 걸까?

엄친아가 되고 싶은 사기꾼의 방 - 레지스 그랜드 호텔

휴가 때라면 약간의 거짓말은 용납된다. 더더구나 사시사철 들떠 있는 이 도시에서는. 그러나 스릴러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창조해낸 [재주꾼 리플리 씨, The Talented Mr. Ripley]의 거짓말은 정도가 심했다. 사기꾼 톰 리플리는 재벌인 그린리프의 부탁으로 이탈리아에서 흥청망청 살고 있는 아들 디키를 데리러 온다. 그러나 디키의 자유분방한 삶, 혹은 그 디키 자체를 사랑하게 된 톰은 결국 그를 죽이게 된다. 그리고 이 로마에서 디키로 변신하기 위한 공작을 펼친다.


하이스미스의 소설은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와 맷 데이먼 주연의 [리플리]로 두 번 영화화되었다. [리플리]에서 톰이 로마에서 머무는 곳은 레푸블리카 광장 근처의 레지스 그랜드 호텔(St Regis Grand Hotel)로 진짜 로마에 있다. 훗날 톰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는 디키의 친구 프레디를 만나는 곳은 나보나 광장이고, 톰이 스쿠터를 타다가 넘어지는 곳은 스페인 광장 근처이다. 픽션 속의 시대가 같은 1950년대인지라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오드리 헵번을 만났을 수도 있다.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는 1950년대의 로마를 재현하고 있다.

허영만큼 달콤한 건 없다 - 트레비 분수

믿거나 말거나의 전설로 동전을 받아먹는 트레비 분수. 그러나 그걸 훔쳐가는 인간들도 꾸준하다.


[로마의 휴일]과 [리플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950년대의 로마는 미국인들에게 유럽의 낭만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유럽의 문화 수도 파리는 미국인들의 기를 죽였지만, 패전국의 수도이자 고대 유적들이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로마는 여러모로 느슨했다. 때문에 이 도시는 전후 10년 동안 사치스런 여행객들에 의해 방탕과 환락의 소돔으로 바뀌어 갔다.


페데리코 펠리니감독은 이 로마의 허영을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이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느 기자의 눈에 붙잡힌 로마의 부유층과 유명인들의 세계는 눈부시지만 또한 거품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상징적인 장면이 바로 섹스 심벌 아니타 에크베르그가 트레비 분수에 뛰어들어 마치 보티첼리의 비너스처럼 물속을 거니는 모습이다.


트레비 분수는 또 다른 거짓말로 우리를 꼬인다. 바로 분수 안에 동전을 던지면 로마로 돌아온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전설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최근의 버전에 따르면 동전 세 개를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로 던지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분수는 이 거짓말로 하루 평균 3천 유로를 삼킨다고 한다.

홍콩에서 날아온 무술 영웅의 허세 - 콜로세움

[벤허]와 [글래디에이터]의 로마는 마초들의 도시다. 그 한가운데 전사들의 경기장, 콜로세움이 있다. 힘 좀 쓰는 남자들이라면 그 안에서 세계의 강자들과 목숨을 건 격투를 벌이고 싶은 꿈을 꿀만도 하다. 허세로 전설의 영웅이 된 이소룡, 그리고 그 허세로 전설의 놀림감이 되고 있는 척 노리스가 그 꿈을 이루었다.


중국인들은 세계 곳곳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탈리아에서만큼은 쉽게 정착하지 못했다. 1970년대에 와서야 이탈리아로의 이민이 본격화되었지만,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 앞에 차이나타운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는 거절당했다. 이소룡은 [맹룡과강]을 통해 이민 초창기 로마에서 고난을 겪고 있던 중국인들을 찾아온다. 당연히 이곳의 마피아들이 그와 부딪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 폭력배들은 자기 식대로 총알 세례를 퍼부으면 될 걸 어설픈 주먹질로 대든다. 그마저 여의치 않자 미국의 살인청부업자 척 노리스를 불러온다. 그 정황이야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 세기의 격투 영웅들은 콜로세움에서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게 된다.


이소룡과 척 노리스, 세기의 두 허세가 콜로세움에서 만난다.

허풍선이 남작의 제작공장 - 시네시타 스튜디오

시네시타에서는 [갱스 오브 뉴욕]의 세트장도 만날 수 있다.


로마의 거짓말은 심지어 산업적이기까지 하다. 도시의 동남쪽 교외에 있는 시네시타 스튜디오(Cinecittà Studios)는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여러 걸작들을 만들어낸 이탈리아 영화의 산실이다. 더불어 [벤허] 이후 싼 제작비와 근사한 주변 환경에 매혹된 세계 각국의 영화 제작진들이 온갖 몽상의 프로젝트를 실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학사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허풍의 대명사가 영화사에서 가장 비범한 상상력의 감독을 만난 테리 길리엄의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의 대부분의 장면은 여기에서 촬영되었다. 영국 드라마인 [닥터 후]에서는 고대 폼페이를 재현하기도 했고, 마틴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을 위해 19세기 중엽의 뉴욕 거리를 완벽하게 세트화시키기도 했다.

적그리스도의 본거지, 프로폰도 로소

로마는 또한 가장 성스러운 도시, 바티칸을 안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과 같은 위대한 종교 예술들을 찬미하기 위해 긴 줄을 선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도시는 동시에 가톨릭을 둘러싼 온갖 오컬트의 본령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의 예언자 전설을 테마로 한 [오멘] 시리즈의 꼬마 악령 데미안은 6월 6일 6시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엑소시스트]의 악령이 쓰인 꼬마 리건의 엄마 역할로 오드리 헵번이 섭외되기도 했는데, 그녀가 영화를 로마에서 찍어야만 한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탈리아 호러의 대명사 다리오 아르젠토는 바로 이 도시 한복판에서 어둠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온 로마의 검은 아들이다. 그는 [서스페리아, 1980년], [인페르노, 1980년]를 통해 '세 어머니'라는 흑해의 마녀 전설을 모티프로 한 연작을 만들어왔는데, 30년 만에 [눈물의 마녀, 2007년]로 3부작의 완성을 이룬다. 시리즈는 한숨의 어머니, 어둠의 어머니, 눈물의 어머니라는 세 마녀가 프라이부르크, 뉴욕, 그리고 로마에 본거지를 두고 어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테마를 다루고 있다. 바티칸 근처에 있는 '프로폰도 로소(Profondo Rosso)'는 호러 스릴러의 테마숍으로, 다리오 아르젠토의 작은 박물관과 같은 모습이다.


다리오 아르젠토는 로마인의 어두운 상상력을 대변한다.

난니 모레티의 진짜 로마 - 가르바텔라

가짜 로마도 진짜 로마도, 베스파 스쿠터로 달리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


그렇다면 거짓말이 아닌 진짜 로마는 어디 있는가? 로마에서 살며 로마 시민을 주인공으로 로마의 영화를 찍는 난니 모레티에게 물어보자. 그는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의 즐거운 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 '베스파'를 통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로마의 일상을 보여준다.


"나는 베스파에 탄 채 아파트들을 둘러보는 걸 좋아한다." 난니가 탄 베스파 스쿠터는 지난 수십 년간 변모해온 로마의 일상적인 풍경들을 지나간다. 특히 가르바텔라(La Garbatella) 지역은 그가 생각하는 진짜 로마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오래된 주거 지구인 이 동네는 블록마다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등 서로 다른 스타일의 건축물로 패치워크를 만들고 있다. 현대적인 건물 사이사이에 고대의 깨진 조각상들이 덩그러니 서 있다. 무솔리니 파시즘이 지배하던 때에 국수주의적 색채가 짙은 레무리아(Remuria)로 지역명을 바꾸려는 시도를 완강히 거절했을 만큼 지역민들의 자부심도 강한데, 이러한 격렬한 정신은 축구팀 AS 로마를 응원하는 벽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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